베버른

베버른

다른 표기 언어 Anton (Friedrich Ernst) von Webern
요약 테이블
출생 1883. 12. 3, 빈
사망 1945. 9. 15,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 근처 미테르질
국적 오스트리아

요약 12음 기법 작곡가로 제2 빈 악파의 한 사람(→ 무조성).

관현악을 위한 〈파사칼리아 Passacaglia〉, 실내악, 성악곡(리트)이 특히 유명하다.

베버른의 아버지는 광산 공학자로 이 분야에서 합스부르크 제국 정부의 최고 직위까지 올랐다.

귀족 작위는 이미 1574년에 막시밀리안 2세에게서 받았다. 귀족을 의미하는 폰(von)이라는 말이 1918년 혁명 이후 오스트리아에서 사용이 금지되어 안톤 베버른이라는 이름으로 작품을 출판했으나 그는 일생 동안 이 호칭을 간직했다. 아버지의 근무지를 따라 베버른 집안은 두 주의 행정도시인 그라츠와 클라겐푸르트로 이사했다가 다시 빈으로 돌아왔다. 아마추어 피아니스트였던 어머니로부터 첫 음악 교육을 받았다. 이어 클라겐푸르트에서 에드빈 코마우어로부터 기초 음악 이론과 피아노를 배웠으며 첼로 연주도 익혀 지방 관현악단에서 활약했다.

최초의 작품인 첼로와 피아노를 위한 2개의 소품(1899)과 몇몇 가곡은 클라겐푸르트 시절에 나온 것이다.

클라겐푸르트 김나지움을 졸업한 후 1902년, 바이로이트 음악제에서 바그너 오페라 공연을 관람하고 깊은 인상을 받았다. 그해 가을 빈대학에 들어가 음악학과 작곡을 공부했으며 1906년, 독일 작곡가 하인리히 이자크(1450경~1517)의 〈코랄리스 콘스타니티누스 Ⅱ Choralis Constantinus Ⅱ〉에 관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즈음인 1904년 가을, 작곡가 아르놀트 쇤베르크의 제자가 되었는데 그와의 만남은 베버른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베버른은 스승 쇤베르크, 그리고 친구가 된 젊은 작곡가 알반 베르크와 함께 새로운 차원의 음악 표현법을 탐구했으며, '무조성'을 확립하게 되었다. 무조성은 지배적인 조성 중심의 필연성을 부정하는 혁명적인 개념이었다.

그러나 베버른은 출발부터 분명한 자기 양식을 만들어냈다. 쇤베르크로부터의 배움은 1908년 끝났으나 이때 이미 많은 작품을 작곡한 뒤였다. 이를테면 관현악적 전원곡 〈여름 바람 Im Sommerwind〉(쇤베르크에게 배우기 이전에 작곡한 곡), 여러 곡의 현악 4중주, 리하르트 데멜의 시에 의한 가곡들, 관현악곡 〈파사칼리아〉 작품번호 1, 합창 카논곡인 〈Entflieht auf leichten Känen〉 작품번호 2를 들 수 있다. 이러한 작품들은 여전히 전통적 조성에 바탕을 두고 작곡되었다.

그러나 슈테판 게오르게의 가곡(1908~09)에서 처음으로 고정된 조성 중심에 더 이상 의존하지 않는 음악 세계로 나아갔다.

1911년 이종사촌 빌헬미네 뫼르틀과 결혼했다. 그러나 가톨릭에서는 당사촌간의 결혼을 금지하고 있어서 네 아이 중 3명이 태어난 뒤인 1915년에야 결혼식을 치를 수 있었다. 범신론에 바탕을 둔 깊은 신앙심을 지니고 있었던 베버른은 교회의 권위에 대해 부정적이었고, 사제를 신과 인간의 중개자로 인정하는 것을 거부했다.

1908~13년 빈·이쉴·인스부르크·테플리츠·단치히·슈테틴에서 음악 지도자·지휘자로 일했다. 그러나 틀에 박힌 극장 일이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에 이러한 활동은 오래 지속되지 않았으며, 대신 자유로운 작품 활동에 마음을 두었다. 당시 작품들은 점차 지극히 간략한 형식 안에 강렬한 표현을 담는 성향을 보였는데 작품번호 5~11번이 좋은 예이다. 이러한 '아포리즘' 시대에 이어 다시 확대된 형식으로 돌아가는 경향을 보여주는 작품은 첼로 소나타(1914)이다.

작품번호 12~19는 성악작품으로 모두 1914~26년에 작곡되었다. 피아노 반주를 사용하고 있는 작품번호 12를 제외하고는 모두 지극히 독창적인 관현악 편성을 보여준다.

제1차 세계대전중인 1915년에 입대했지만 눈이 나빠 1916년말에 제대했다. 1917~18년 프라하 오페라 극장에서 마지막 시즌을 보낸 뒤 빈 근교 뫼들링에 정착해 개인 교습을 하는 한편 쇤베르크가 설립한 사설 음악연주협회 감독으로 활동했다(1918~22). 1924년 쇤베르크는 12음 작곡법을 공식화했다.

이것은 반음계에 속해 있는 12개의 음들로부터 만들어진 기본 '음렬'을 사용해 전위·역행·전이라는 조작을 통해 48개의 음렬들을 얻은 다음 이들을 기본으로 해 선율, 리듬적으로 조작해나가는 것이다. 베버른은 피아노곡 〈어린이를 위한 곡 Kinderstück〉에서 처음으로 이 12음 체계를 사용했으며, 이후 작품번호 17~31에 이르는 모든 작품에서 이 기법을 사용해 그것이 지니고 있는 작곡상의 잠재력을 엄격하고 일관성 있게 극한까지 추구했다.

이 시기 동안의 기악 작품들(작품번호 20·21·22·24·27·28·30)은 엄격한 형식의 지배를 받았다. 성악 음악에서는 시인 겸 화가인 힐데가드 존의 서정시를 즐겨 사용했으며 후기의 모든 성악 작품, 이를테면 작품번호 23·25·26·29·31은 그의 시에 곡을 붙인 것이다.

항시 전통과 끈을 잇고 있다고 고백했던 베버른은 독일 리트 장르의 열렬한 대표자였다.

아울러 뛰어난 편곡자였으며, J. S. 바흐의 〈음악의 헌정 Musical Offering〉을 편곡한 〈리체르카타 Ricercata〉는 그의 가장 유명한 관현악 편곡 작품이다(음렬주의). 위에서 언급했던 사설 음악연주협회가 해체된 후 베버른은 여러 합창단을 지휘했다. 이들 합창단 중에서도 일반인으로 구성된 '징페라인'(Singverein)이 가장 유명한데, 이 단체는 '노동자 교향곡 콘서트'(Workers' Symphony Concerts)와 함께 말러의 교향곡 8번과 같은 대작을 연주할 수 있도록 특별히 조직된 아마추어 단체였다.

이 두 단체 모두 사민당(Social Democratic Party)이 후원했으며, 1934년 2월의 '돌푸스 혁명' 이후 해체되고 말았다. 베버른은 객원 지휘자로서 때때로 오스트리아 방송 교향악단을 지휘했으며, 스위스·독일·스페인·영국 등지의 초청을 받아 지휘봉을 잡기도 했다. 뛰어난 선생이기도 했지만 빈대학이나 빈 음악 아카데미 교수직에 임명을 받지 못했다.

그는 맹인을 위한 유대인협회에서 한 작은 직책을 담당했으며, 1932년부터는 개인 강의과정을 열어 운영했다. 고국에서 그가 인정을 받은 경우는 사회당 정부에서 주는 1924, 1932년 2차례 빈 음악상을 수상한 것이 전부였다. 적극적으로 정치적 활동을 하지는 않았지만 그는 점차 위세를 떨치던 우파 민족주의의 희생자가 되어가고 있었다. 1933년 히틀러가 정권을 잡자 쇤베르크는 즉시 유럽을 떠났다. 나치는 '신(新) 빈 악파' 음악을 '문화 볼셰비즘', 또는 '타락한 예술'로 규정하고 이런 종류의 예술공연을 금지시켰다.

1935년 베르크가 사망해 베버른은 더욱 예술적으로 고립되었다.

더욱이 1938년 나치가 오스트리아를 합병하면서 그는 경제적으로 더욱 곤경에 처하게 되었다. 정치적인 이유 때문에 그의 작품은 출판될 수 없게 되었으며, 개인교습을 받는 학생들도 없게 되어 싸구려 작곡가들의 작품을 피아노곡으로 편곡해주는 일로 생활해야 할 지경이 되었다. 그렇지 않아도 소극적인 성격이던 베버른은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완전히 혼란에 빠지게 되었다. 폭격이 증가함에 따라 히틀러 정권에 대한 환멸은 더욱 깊어갔고 1945년 2월 열차 폭격으로 외아들 페터를 잃었다. 러시아군이 빈 근처까지 진군해와 부인과 함께 이미 세 딸과 손자들이 피신해 있던 잘츠부르크 근처 미테르질로 피난했다.

그러나 그는 미군 헌병의 실수로 사살되었다.

베버른에 대한 평가

베버른의 음악은 본질적으로 시적이며 뛰어난 감수성을 보여준다. 산의 장대함에서부터 꽃의 미세한 세계에 이르기까지 자연을 숭배했으며, 이것은 그의 창작적 사고에 영향을 미쳤다. 새로운 미학을 과감히 추구하면서 자신의 길을 개척했으며, 완전한 자신의 어법을 결실로 얻게 되었다.

베버른의 표현주의는 아포리즘적이며 점묘주의적이지만 딕션과 색채의 뛰어난 감각이 두드러지며, 긴박한 분위기에서 폭발적 격렬함까지 다양한 폭을 지닌다. 아울러 그의 작품은 구체적인 개인 경험을 반영하고 있는 경우가 많으며, 그런 점에서 '표제적'이다. 예를 들면 〈관현악을 위한 6개 소품〉 작품번호 6은 작곡가 자신에 따르면, 죽음과 관련된 일화를 술회하는 것이다. 형식 구도들은 분명한 음악 외적 연상을 드러내며, 후기에 나타나는 다양한 기악곡들에서조차도 그러하다.

문학적 관심의 또다른 결과로 많은 성악 작품들이 탄생되었다. 베버른 양식의 새로운 측면(선율과 화성의 단편화, 커다란 도약 진행, 불협화음과 음색의 색다른 사용, 성부 짜임새에 대한 극단적 절제)은 후기에는 후기 낭만주의의 과잉 표현(이를테면 바그너 오페라, 부르크너와 말러 교향곡,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교향시)에 익숙한 이들로부터 비난을 받았다. 그러나 1950년대에 접어들면서 베버른 음악은 피에르 불레즈와 카를하인츠 슈톡하우젠 같은 젊은 작곡가들로부터 신시대의 '초석'이자 모델로 추앙받기에 이르렀으며, 이고리 스트라빈스키와 같은 대가도 그러한 칭송에 동참했다.

1960년대에 음악학자 한스 몰덴하우어가 베버른의 많은 미출판 작품들을 발굴·연구했으며, 그에 따라 베버른의 뛰어난 작품들에 대한 이해의 폭도 넓어지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