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슬라브주의

범슬라브주의

다른 표기 언어 Pan-Slavism

요약 동부와 중동부 유럽에 있는 슬라브인들의 공통적인 민족적 배경을 깨닫고 공통의 문화적·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그들을 통합시키고자 19세기에 전개된 운동.

이 운동은 19세기 전반기에 서부와 남부 슬라브 출신 지식인·학자·시인에 의해 처음 형성되었는데, 당시 슬라브인들은 자신들의 민족적 동일성을 개발시키고 있었다. 범슬라브주의자들은 민요, 민속학, 그리고 슬라브인들의 농촌 방언 등을 연구하면서 자신들의 공통점들을 강조했으며 슬라브인의 통일의식을 자극하려고 노력했다.

그들의 활동이 주로 프라하에서 이루어진 까닭에 이 도시는 슬라브인의 고대 풍물과 문헌학을 연구하는 최초의 범슬라브주의 중심지가 되었다.

범슬라브주의 운동은 곧 정치적 의미를 띠기 시작했다. 1848년 6월 오스트리아 제국이 혁명에 의해 약화되자 체크 출신 역사학자 프란티세크 팔라츠키는 프라하에서 슬라브인 총회를 개최했다.

오스트리아인에 의해 지배받고 있던 모든 슬라브 민족들의 대표로 구성된 이 총회는 황제의 군주정치를 민주적인 합스부르크가(家)의 지배에 의한 동등한 민족들간의 연합으로 전환할 것을 황제에게 강제하기 위해 그들간의 협력체를 조직하려 했다. 비록 총회는 아무런 성과 없이 끝나버렸지만 이 운동은 계속 지속되었으며, 1860년대에 특히 러시아에서 활기를 띠었다. 왜냐하면 많은 범슬라브주의자들이 러시아가 오스트리아-헝가리와 투르크의 지배로부터 자신들을 보호하고 지도할 수 있기를 기대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러시아 범슬라브주의자들은 이 운동의 이론적 토대를 변경시켰다.

그들은 서부 유럽은 정신적·문화적으로 파산했으므로 이제 서부 유럽에 대한 정치적 지배를 달성해 유럽을 회생시키는 것이 바로 러시아인의 역사적 사명이라는 슬라브 민족 숭배 관념을 채택하면서, 이러한 러시아의 사명은 다른 슬라브 민족들의 도움 없이는 달성될 수 없기 때문에 그들이 오스트리아와 터키 군주들로부터 해방된 후 러시아가 주도하는 슬라브 연방으로 통합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러시아 정부가 이러한 견해를 공식적으로 지지하지는 않았지만, 콘스탄티노플과 베오그라드 대사를 포함한 외무부의 주요인사들은 열렬한 범슬라브주의자였으며, 실제로 그들은 1876~77년 오스만 제국에 대항해 세르비아와 러시아가 전쟁에 참여하도록 했다. 20세기 초반 새로운 범슬라브인 총회를 소집하고 이 운동을 재생시키려는 노력이 행해졌지만 다양한 슬라브 민족들간의 민족주의적 경쟁 때문에 효과적인 협력을 이룰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