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당

민주당

다른 표기 언어 民主黨

요약 1955년 9월 18일 자유당의 사사오입개헌에 반대하여 창당된 정당.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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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개요
  2. 약사
  3. 성격
  4. 조직 및 활동

개요

제2공화국의 집권정당이기도 하다.

약사

자유당이 국민투표제, 대통령중심제, 초대 대통령의 중임제한철폐 등을 골자로 하는 헌법개정안을 통과시키려 하자 민주국민당을 중심으로 한 야당세력이 의원내각제를 주장하며 이에 맞섰다.

자유당의 개정안은 1954년 11월 27일 표결에 붙여져 1표 차이로 부결되었다. 그러나 2일 후인 29일 재적 203명의 2/3는 135.333명인데 소수점 이하는 1명이 되지 못하므로 135명이 2/3선이라는 사사오입으로 가결을 선포했다. 사사오입개헌안이 확정되자 29일 민주국민당을 중심으로 한 범야권세력은 민의원 위헌대책위원회를 구성했고, 30일 이 위원회를 원내교섭단체로서 호헌동지회라는 명칭으로 바꾸었다.

이후 대여투쟁을 하면서 신당 창당을 위해 노력하다가 1955년 7월 17일 신당발기위원회를 구성했고, 9월 18일 발기인대회 및 창당대회를 개최했다. 1956년 제3대 정·부통령 선거에서 부통령에 장면을 당선시켰으며, 1958년 5월 2일 제4대 국회의원선거에서 79석을 차지했다. 1960년 제4대 정·부통령 선거에서 자유당의 부정선거로 인해 4·19혁명이 일어나 자유당 정권이 무너졌고, 6월 15일 의원내각제 헌법개정안이 통과되어 7월 29일 새로운 선거법에 의한 총선거에서 민의원 233석 가운데 175석을, 초대 참의원 58석 가운데 31석을 차지했다.

또한 국회에서 8월 12일 윤보선을 대통령으로, 18일 장면을 국무총리로 선출한 뒤 1961년 5·16군사정변을 맞아 해체되기까지 제2공화국의 집권정당이 되었다. 1963년 1월 정치활동이 재개되자 박순천을 대표최고위원으로하여 재창당했으나, 1965년 5월 3일 제1야당인 민정당(民正黨)과 통합하여 민중당을 창당함으로써 완전히 해소되었다.

성격

민주당은 "우리는 반공반독재투쟁과 책임정치의 구현으로 자유경제체제의 균형분배정책을 실시함으로써 국리민복(國利民福)을 기한다"라는 창당선언문의 내용과 한국민주당의 계보인 민주국민당이 중심이 되어 자유당의 탈당의원 등이 가세한 조직구성에서 볼 수 있듯이 보수적인 정당이었다.

정강은 ① 독재배격, ② 공정한 자유선거, ③ 건전한 국민경제발전 및 근로대중의 복지향상, ④ 민족문화 육성 및 문화교류 촉진, ⑤ 국력의 신장 및 민주우방과의 제휴 등이다. 구체적인 정책에 있어서는 호헌(護憲), 준법정신의 구현, 국민의 기본인권 특히 언론·출판·집회의 자유보장, 국민의 기본생활 보장, 국방력의 확보, 민주우방과의 협조에 의한 외교의 정상화 추진 등 25개 항목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실제는 당내의 내분이 끊이지 않았고, 집권 이후에도 정국안정에 실패했으며 몇몇 지도자를 중심으로 이합집산을 거듭했다.

또한 국민의 요구를 받아들여 정책에 반영하는 정당의 기본적인 역할을 수행하지 못하고, 국민에 대한 통제력도 상실해 혼란를 야기했다. 결국 5·16군사정변이 일어나 무너지고 말았다.

조직 및 활동

창당과정에서부터 여러 분파의 의견이 엇갈려 신당의 발기작업이 매우 지연되었다.

그러나 민주국민당이 중심이 되어 흥사단계와 자유당의 탈당의원, 무소속의원 등을 포함한 원내 33명의 세력을 규합하여 창당했다. 1955년 9월 18일 개최한 발기인대회 및 창당대회에서 전국대의원 2,013명이 참석하여 선언 및 정강·정책을 통과시켰으며, 400명의 중앙위원을 선출했다. 지도체제는 집단지도체제를 채택하고 중앙위원회에서 신익희를 대표최고위원으로, 조병옥·장면·곽상훈·백남훈 등 4명을 최고위원으로 선출했다. 4·19혁명이 있기까지 1번의 국회의원선거와 2번의 대통령선거에서 자유당의 억압과 대통령후보인 신익희(1956)·조병옥(1960)이 사망하는 어려운 상황 속에서 의회에서는 양당제의 기틀을 마련했으며 장면을 부통령으로 당선시켰다.

또한 의원내각제와 반독재투쟁을 추진했다. 그러나 4·19혁명에 의해 의원내각제 개헌과 집권에 성공한 이후 분당과 내부 계파간의 분열로 혼란과 무질서만을 야기한 채 5·16군사혁명위원회의 포고령 제4호에 의해 해체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