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부르

바부르

다른 표기 언어 Babur 동의어 무굴제국 제1대 황제, 자히르 알딘 무함마드 바부르
요약 테이블
출생 1483. 2. 15, 페르가나 공국
사망 1530. 12. 26, 인도 아그라
국적 무굴

요약 바부르는 몽골의 정복자 칭기즈 칸과 티무르의 후예이며 정치가일 뿐 아니라 뛰어난 군사적 모험가, 군인, 시인, 천재적인 일기작가였다.
페르카나 공국의 왕자로 몽골족에서 유래한 바를라스족 출신이었다. 티무르의 옛 수도 사마르칸트를 회복하려는 노력을 지속적으로 기울이다가 1519년 신도와 인도 쪽으로 관심을 돌렸다. 1522년 신드로 진출하는 전략적 요충지인 칸다하르를 점령했으며 1519년에는 처음으로 인도에 침입했다. 1525년 델리 술탄국의 군대와 싸워 승리했다. 이어 동쪽의 아프가니스탄군을 벵골로 쫓아냈다. 그는 칸다하르에서부터 라지푸트 사막과 란탐보르, 괄리오르, 찬데리 요새들로 남쪽 한계선을 그어 벵골 국경선까지 미치는 영토를 확보하여 제국의 형체를 갖추었지만 여전히 평정과 조직화가 필요했다. 이어 무굴 제국의 2대 왕이 되는 아들 후마윤에게 물려주었다.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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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개요
  2. 초기생애
  3. 인도에서의 첫 승리
  4. 무굴 제국
  5. 바부르에 대한 평가

개요

몽골의 정복자 칭기즈 칸과 티무르(타메를라네)의 후예이며 정치가일 뿐 아니라 뛰어난 군사적 모험가, 군인, 시인, 천재적인 일기작가였다.

초기생애

몽골족에서 유래한 바를라스족 출신이었다.

바를라스족은 투르크 지역에서 오랫동안 고립되어 살았기 때문에 언어나 습관에서 투르크인화되었다. 따라서 바부르는 무굴인이라 불리면서도 자신의 지지세력은 대부분 투르크인이었기 때문에 그가 세운 제국도 투르크적 성격을 띠었다. 바부르 가문은 차가타이 씨족에 속했으며 그들은 이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부계는 티무르의 제5대 직계 후손이고 모계는 최초의 몽골 대정복자 칭기즈 칸의 13대손이다.

바부르의 아버지 우마르 셰이크 미르자는 힌두쿠시 산맥 북쪽에 있는 페르가나의 작은 공국을 통치했다. 투르크인들 사이에는 승계(承繼)에 관해 정해진 법률이 없었기 때문에 티무르 왕조(티무르가 세운 왕조)의 모든 왕자들은 티무르의 모든 영토를 통치하는 것이 자신들의 권리라고 생각했다. 영토가 방대했으므로 왕자들의 요구는 끝없는 싸움을 야기했다. 더욱이 티무르 왕자들은 자신들이 왕으로서 다른 사람들을 다스리는 것이 자신들의 일일 뿐이라고 생각했으며, 특정지역이 실제로 티무르 제국의 일부로 통합되어 있는가 아닌가에 대해서는 그다지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바부르의 아버지는 이런 전통에 충실해 일생을 티무르의 옛 수도 사마르칸트를 회복하려는 노력으로 보냈으며, 바부르도 아버지의 길을 따랐다. 이러한 왕조 전쟁의 각축상태에서 요구되는 자질은 충성심과 헌신을 불러일으키는 능력, 가문간의 반목으로 분열된 위험한 파벌들을 잘 다룰 줄 아는 능력, 그리고 상인과 농민에게서 세금을 잘 거두어들이는 능력이었다.

바부르는 이 모두에 능숙했을 뿐만 아니라 천재적인 군 지휘관이기도 했다.

10년(1494~1504) 동안 바부르는 사마르칸트를 되찾기 위해 노력했고 2번에 걸쳐 잠시 그곳을 점령했다(1497, 1501). 그러나 시르다리야(자사르테스) 강 너머 칭기즈 칸의 후예이자 우즈베크의 통치자인 무하마드 샤이바니 칸은 가까운 친척이기보다는 강력한 그의 적수였다.

1501년 바부르는 사르에폴에서 결정적인 패배를 맛보았고 그뒤 3년이 채 못 되어 사마르칸트와 페르가나 공국을 잃었다. 그러나 당시 전투지도력과 자질을 갖춘 능력 있는 왕들은 항상 야망에 차 있었다. 1504년 바부르는 개인적 추종자들과 함께 카불을 차지해 온갖 음모와 반란을 이겨내고 그곳에서 다시 일어났다. 그는 1511~12년 사마르칸트를 다시 공격했으나 실패했다. 이를 마지막으로 사마르칸트 정복의 꿈을 버린 그는 다른 지역으로의 팽창에 전념했다. 신드와 인도 쪽으로 관심을 돌린 뒤 1522년 드디어 신드로 진출하는 전략적 요충지인 칸다하르를 점령했으며 1519년에는 처음으로 인도에 침입했다(→ 로디 왕조). 당시 펀자브 지방은 델리의 술탄 이브라힘 로디의 영토였다.

펀자브의 총독 다울라트 칸 로디는 자신의 권한을 축소하려는 이브라힘을 괘씸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1524년까지 바부르는 펀자브를 3번 이상 침입했지만 펀자브와 델리의 복잡한 정치방향을 파악할 정도로 굳건한 발판을 마련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델리 술탄국은 불화로 분열되어 전복되기 직전 상태에 있었던 것은 분명했다. 전면 공격을 개시중이었으나 바부르는 우즈베크가 카불 왕국을 공격했기 때문에 철수해야 했다.

그러나 이브라힘의 숙부 알람 칸과 다울라트 칸에게서 공동 구원요청을 받자 5번째이자 처음으로 성공적이었던 공격에 나섰다.

인도에서의 첫 승리

1525년 11월에 출정한 바부르는 1526년 4월 21일 델리 북쪽 80㎞ 지점인 파니파트에서 이브라힘과 만났다(→ 파니파트 전투). 바부르의 군대는 1만 2,000명 정도에 불과했지만 그들은 단련된 병사들로서 기마 전술에 능숙했으며 오스만 투르크에서 얻은 새로운 대포로 무장하고 있었다.

이브라힘의 군대는 10만 명의 병력과 100필의 코끼리부대가 있기는 했지만 그들의 전술은 낡은 것이었고 또한 그들은 불화로 분열되어 있었다. 바부르는 냉정함을 잃지 않고, 분열되어 사기를 잃은 적에게 대포에 의한 포격과 효과적인 투르크식 전차 전술을 사용해 전쟁에서 승리했다. 이때 이브라힘은 전사했다. 그의 특징인 속결전술로 바부르는 3일 만에 델리를 점령했고 1526년 5월 4일 아그라에 진주했다. 그곳에서 그가 처음 한 일은 야무나 강가에 현재 람 바그로 알려진정원을 만든 것이었다.

이러한 빛나는 성공이 당시에는 사마르칸트 침략과 조금도 다를 바 없이 보였음에 틀림없다.

바부르의 소규모 부대는 인도의 뜨거운 기후에 익숙치 못했고 그들의 기지인 카불로부터 약 1,300㎞나 떨어진 상태에서 사방이 강력한 적들로 둘러싸여 있었다. 갠지스 강 유역 아래의 모든 곳에는 분열되어 있기는 하지만 무시 못할 군사적 잠재력을 가진 호전적인 아프가니스탄 족장들이 버티고 있었다. 남쪽으로는 거대한 자원을 가진 두 왕국, 말와와 구자라트가 있었고 라자스탄 지역에서는 메와르(우다이푸르)의 라나 상가가 북부 인도의 이슬람교 전체 위상을 위협하는 강력한 동맹체의 수장 역할을 하고 있었다.

바부르의 제일 급선무는 그의 군사들이었다. 그들은 더위에 지치고 적대적인 주변상황에 낙담해 일찍이 티무르가 했던 것처럼 고향으로 돌아가기를 바랐다. 바부르는 그의 일기에 생생하게 기록한 대로 위협하고 질책하고 약속하고 애원함으로써 그들의 생각을 돌려세웠다. 그무렵 라나 상가는 바부르가 그의 선조들처럼 후퇴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10만 기병과 500필의 코끼리를 동원해 공격해 왔다(카누아 전쟁). 주변의 거의 모든 요새가 적들의 수중에 있었기 때문에 바부르는 사실상 포위되어 있었다.

그는 결연히 술을 끊고 술통을 부수어 우물 속에 쏟아버림으로써 신의 가호를 빌었다. 병사들은 이러한 그의 행동과 선동적인 훈시에 고무되어 1527년 3월 16일 아그라에서 서쪽으로 60㎞ 떨어진 카누아에 진지를 구축했다. 바부르는 항상 사용하는 그의 전술을 썼다. 즉 중심부에 포병대와 기병대가 반격할 간격을 남겨둔 채 4륜차 방벽장애물을 치고 좌우에는 회전하는 전차기병대를 두었다. 대포가 코끼리들을 놀라 도망치게 하고 측면공격으로 라지푸트군을 혼란에 빠뜨렸다. 전투 개시 10시간 뒤 라지푸트군은 패주했고 다시는 한 지도자 밑에 그 세력을 규합하지 못했다.

바부르는 이제 동쪽의 도전적인 아프가니스탄 부족을 처리해야 했다.

그들은 바부르가 라나 상가와 전투하고 있을 때 러크나우를 점령했다. 다른 아프가니스탄 부족들은 비하르를 차지한 이브라힘 술탄의 형제 마흐무드 로디 밑에 집결했다. 그리고 찬데리의 통치자를 비롯한 라지푸트의 수장들은 여전히 바부르에게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1528년 1월 찬데리 요새를 점령한 후 바부르는 동쪽으로 향했다. 그는 갠지스 강을 건너 러크나우를 점령한 아프가니스탄군을 벵골로 쫓아냈다. 그 다음으로 마흐무드 로디를 공격해 1529년 5월 6일 가가라 강이 갠지스 강과 합류하는 지점에서 그들을 괴멸시켰다.

이는 바부르의 3번째 대승리였다. 이때에도 역시 포병대 역할이 결정적이었고 보트를 능숙하게 다루는 솜씨 또한 승리에 크게 기여했다.

무굴 제국

이제 바부르는 칸다하르에서부터 라지푸트 사막과 란탐보르·괄리오르·찬데리 요새들로 남쪽 한계선을 그어 벵골 국경선까지 미치는 영토를 확보했다.

그러나 이러한 방대한 지역에 걸쳐 행정이 정착된 것은 아니며, 단지 서로 싸우는 수장의 집단만이 있을 뿐이었다. 제국의 형체가 갖추어지긴 했지만 여전히 평정과 조직화가 필요했다. 바부르는 이와 같이 불완전한 유산을 아들 후마윤에게 물려주었다.

1530년 후마윤이 병들어 목숨이 위태롭게 되자 바부르는 아들의 침상을 7번 돌면서 후마윤 목숨 대신 자신의 생명을 바치겠다는 맹세를 했다고 한다.

그때부터 후마윤은 회복되었지만 반대로 바부르는 쇠약해져서 그해에 죽었다.

바부르에 대한 평가

무굴 제국을 굳건히 한 사람은 바부르의 손자 악바르였지만 바부르가 인도 무굴 제국의 창건자임에는 틀림없다. 나아가 그는 마력적인 지도력을 심어놓아 다음 2세대 동안 지속되게 했다. 바부르는 천재적인 군사모험가였고 제국의 창건자였으며 또한 매력적인 인물이었다.

정치적인 경력과는 별개로 그는 탁월한 재능을 가진 투르크의 시인이기도 했다. 그는 가는 곳마다 정원을 조성하고 연회를 열어 아름다운 그곳을 더욱 아름답게 만들었던 자연 애호가였다. 그의 산문 회고록 〈바부르나메 Bābur-nāmeh〉는 마침내 자서전의 세계적 고전이 되었다.

이 책은 악바르 재위 때 투르크어에서 페르시아어로 번역되었고(1589), 1921~22년에는 영어로 번역되었다. 나이에 비해 놀라울 정도로 관대하고 교양·재치·정다움·우정과 진취적인 기상을 지녔으며 자연의 아름다움에 대한 높은 감수성으로 가득찬 한 통치자의 모습이 이 회고록에 잘 담겨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