묘지

묘지

다른 표기 언어 cemetery , 墓地 동의어 광지, 壙誌

요약 대부분의 문화에서 죽은 사람을 위한 장소를 마련하는 일은 가족의 기본적인 의무였다. 묘지의 위치는 무척 신중하게 선택되었는데, 한국에는 예로부터 지관이 있어서 상서로운 땅을 묘자리로 잡아주었다.
묘지의 위치 결정에는 위생적인 측면이 고려되었다. 로마와 유대인들은 로마와 예루살렘 성 밖에 묘지를 만들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인들은 위생적인 측면은 별로 고려하지 않아 지하 묘지를 집단 무덤과 예배장소로 겸해 사용하기도 했으며, 종교 자유가 허용된 후에도 교회와 교회 부속 묘지에 시신을 매장했다.
1860년부터 많은 나라에서 교회 부속 묘지들이 사라지게 되었고 사유지 안에 있는 단순한 묘지부터 점차 교회묘지, 공동묘지, 비석 대신에 평평한 금속 표지판으로 무덤을 표시하는 오늘날의 공동묘지로 형태가 변천해왔다.

죽은 사람을 어디에, 어떻게 묻을 것인가의 문제는 시대를 막론하고 모든 사회의 관심사였다.

묘지
묘지

지형, 종교, 사회적 태도, 미적인 요소와 위생적인 면 등을 고려해 매장 방법이 달라졌는데 이에 따라 묘지의 형태가 결정되었다. 중앙 아메리카와 남아메리카의 많은 농촌 지역에서 발견되는 묘지는 살아 있는 사람들의 공동체를 능가할 정도로 웅대하게 만들어졌으며 신성한 곳 또는 금기시 되는 지역으로 여겨졌다. 일본이나 멕시코 같은 나라에서 묘지는 죽은 사람을 특별한 날에 기리기 위해 마련한 축제 장소이다. 그밖에 대부분의 나라와 다른 종교집단에서 묘지는 그저 황량하고 필요한 경우가 아니면 가능한 한 피해다니는 곳일 뿐이다.

대부분의 문화에서 죽은 사람을 위해 장소를 마련하는 일은 죽음을 초월해서 혈통이 지속된다는 믿음으로 인해 가족의 기본적인 의무였다.

성서에 기록되어 있는, 헤스의 아들로부터 아브라함이 살았던 땅에는 아브라함 자신이 묻힐 수 있는 동굴이 있었다. 한 가문이 사용할 웅장한 무덤을 소유하는 것은 동서양에 모두 전해내려온 관습이다. 이때 묘지의 위치는 무척 신중하게 선택되었다. 중국에서는 풍수(風水)쟁이들이 바람이 잘 들고 물이 좋은 곳을 찾아내어 묘자리를 골라 주었다. 한국에는 예로부터 지관(地官)이 있어서 해로운 영령이 나타나는 지역을 피해 상서로운 땅을 묘자리로 잡아주었다.

특히 한국인들은 조상들과 일체감을 갖고자 하는 욕구가 무척 강했다. 의무감이 강한 동양의 자손들은 아무리 엄청난 비용이 들더라도 그들 양친의 시신을 고국으로 직접 모셔온다. 서양에서는 이와 달리 종종 그 시신을 고향으로 가는 비행기·기차·배 등으로 보낸다. 종족이나 지역 공동체에서 그 의무를 승계하는 경우에도 공동 묘지에 안장되는 것은 하나의 특권이다. 외지인들은 그 도시에서 거주할 수는 있었으나 공동 묘지에 안장될 수는 없었다. 고대의 유대인·로마인과 그밖의 종족들은 죄수, 외지인들,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묘지를 따로 마련했다.

유다가 죄책감으로 다시 내놓은 은 30냥은 외지인을 위한 무덤을 마련하는 데 사용되었다. 중세부터 19세기까지 유럽에서는 자살한 사람, 마녀로 선고받은 사람, 살인자는 무덤에 묻힐 수도 없었다.

묘지의 위치를 결정하는 데는 위생적인 측면이 고려되었다. 예를 들면 로마와 유대인들은 묘지를 위험한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로마와 예루살렘 성 밖에 묘지를 만들었다. 고대 이집트인과 중국인들도 마찬가지로 위생적인 측면을 중요하게 여겼다. 이에 반해 그리스도교인들은 묘지의 위생적인 측면은 별로 고려하지 않아 지하 묘지를 집단 무덤과 예배장소로 겸해 사용하기도 했으며, 종교에 대한 자유가 허용된 후에도 교회와 교회 부속 묘지에 죽은 사람들을 매장했다.

6세기 이후로 인구가 증가해 묘지의 과밀현상이 나타나게 되자 종교 외부의 세속 정치권력은 도시의 성곽 외부에만 매장을 허용하던 옛 로마의 관습으로 복귀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교회의 부지는 세속적인 위생법에 따르지 않아도 되었으며 이러한 문제는 중세와 르네상스 시대에 격렬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18세기 중반 무렵 교회 부속 묘지는 이미 수용한계를 넘어섰으며 시계(市界) 안에는 더이상 매장을 위한 적절한 공간이 남아 있지 않았다. 교회 지하에 있는 납골소는 물론 주변 공공용지의 작은 공간까지도 관으로 가득차게 되었고 납골소와 같이 시체를 안치해두는 건물들이 그곳을 자주 찾는 사람들에게 질병을 옮기는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관들이 불과 몇 피트의 거리를 사이에 두고 무덤 안에 층층이 쌓였으며 그로 인해 지면이 교회의 아래 창문까지 높아졌다. 교회 묘지기는 매장 공간을 좀더 신선하게 유지하기 위해 몰래 유골과 일부 부패한 유해들을 처분하기도 했으며 어떤 경우에는 인근에 있는 구덩이에 정기적으로 가져다 버리기도 했다. 무덤을 파는 사람들은 관의 판자·손잡이·못 등 고철로 팔리는 부분들을 모아서 빼돌리기도 했다. 이러한 폐단으로 교회 가까이에 사는 사람들은 대부분 건강이 좋지 않았으며 이러한 참을 수 없는 광경을 지켜봐야 했다.

모든 대도시에서는 이러한 관행이 크든 작든 널리 퍼져 있었다.

런던에는 거대한 인구가 모여 있어 사망자의 수도 많았으므로 그러한 폐단은 즉각적으로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게 되었다. 부분적으로 1~2개의 완화 조치가 통과된 이후 1855년 몇 가지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교회 부속 묘지를 법에 따라 폐쇄시켰다. 이전에 런던의 몇몇 묘지는 사기업에 의해 설치되기도 했으나 1855년에 제정된 매장법에 따라 영국과 아일랜드 전역에 걸쳐 공공묘지의 개발이 시작되었다. 도시와 읍내의 경계 안에 있는 묘지는 거의 다 폐쇄되었고 위생적인 안전장치가 갖춰진 경우에만 시내에 묘지를 만들 수 있도록 허용했다.

1860년부터 많은 나라에서 교회 부속 묘지들이 점차 사라지게 되었고 사유지 안에 있는 단순한 묘지로 부터 점차 교회묘지, 공동묘지, 관례적인 비석 대신에 평평한 금속 표지판으로 무덤을 표시하는 오늘날의 공동묘지로 그 형태가 변천해왔다.

19세기에 가장 크게 계획되었던 공동묘지는 런던공동묘지회사가 조성한 영국 잉글랜드의 부룩우드이다. 이 회사는 런던에 1개의 사유 철도역과 공동묘지 안에 2개의 역을 가지고 있었으며 자체의 전신용 주소 및 종교·국적·사회조직·직업에 따른 특별구역도 갖추고 있었다. 이런 유형의 회사들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이 캘리포니아의 포리스트론이다.

미국에서는 공동묘지, 협동묘지, 교회묘지, 대단위의 상호 소유 묘지 등이 계속해서 생겨났다. 각 주와 지방 행정 당국에서 직영하는 묘지 외에도 연방 정부는 군대 관계자들과 그들의 가족을 위해 국내 및 해외에 국립 공동묘지를 운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