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메데오 모딜리아니

아메데오 모딜리아니

다른 표기 언어 Amedeo Modigliani
요약 테이블
출생 1884년 7월12일, 이탈리아 리보르노
사망 1920년 1월 24일, 프랑스 파리
국적 이탈리아

요약 20세기 이탈리아 화가이자 조각가로 주요 작품은 <침대 의자에 앉아 있는 누드>. 이탈리아에서 태어나 어렸을 때부터 병약했지만 화가를 꿈꾸며 화가 구글리엘모 미켈리에게 미술을 배웠다. 초기 작품은 이 시기의 공부를 바탕으로 제작됐다. 계속된 건강 악화에도 불구하고 이탈리아 각지를 여행하며 고전 예술을 접하고 감명을 받았다. 이후 피렌체에서 조각을 공부했고 파리로 이주해 아방가르드 예술가들과 교류하기 시작했다. 조각은 길고 좁은 타원 형태의 두상이 대부분이었으며, 특유의 스타일로 이어졌다. 생이 마감할 때까지 성공을 누리지 못했으나 그 어떤 형식과도 같지 않은 독자적인 스타일을 완성하면서 죽은 후 회고전을 계기로 재평가를 받았다.

모딜리아니(Amedeo Modigliani)
모딜리아니(Amedeo Modigliani)

비대칭 구도와 길쭉하게 잡아늘인 인물 및 단순하면서도 대담한 윤곽선을 특징으로 하는 그의 초상화와 누드화는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작품에 속한다.

또한 이 작품들은 지극히 개인적인 분위기를 띠고 있는 것으로 인기를 끌었다. 화가와 모델 사이의 말없는 공감이 보는 사람을 끌어들인다.

모딜리아니는 소매상을 하는 유대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는 1895, 1898년에 늑막염과 티푸스를 앓은 뒤 통상적인 교육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고, 그때부터 그림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1902년 피렌체에 잠시 머문 뒤 베네치아로 가서 1906년 겨울까지 미술공부를 계속하다가 파리로 갔다.

그는 일찍부터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의 그림(특히 시에나 유파의 그림)을 존경했고, 평생 동안 이 존경심을 잃지 않았다. 파리에서 모딜리아니는 폴 세잔의 그림에 압도당했으며, 이것은 그의 초기 작품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가 초기에 교제한 주요인물들은 앙드레 살몽, 막스 자코브 등의 시인과 파블로 피카소, 그리고 1907년에 만난 폴 알렉상드르였다. 알렉상드르는 전위 미술가들의 친구로서, 모딜리아니에게 관심을 갖고 작품을 사준 최초의 인물이었다.

1908년 모딜리아니는 앵데팡당 미술전에 5, 6점의 그림을 출품했다. 그는 또한 루마니아의 조각가 콘스탄틴 브랑쿠시를 만나 그의 작품에서 깊은 인상을 받았으며, 그의 충고에 따라 아프리카 조각을 진지하게 연구했다. 그리고 조각가가 될 준비를 하기 위해 열심히 소묘를 했다. 또한 그는 회화적으로 모델링되어 있고 빛의 작용에 민감한 오귀스트 로댕의 조각을 가짜 인상주의라 하여 싫어했다.

그는 드로잉에서 윤곽선으로 덩어리를 제한하거나 둘러싸려고 했다. 1912년 그는 가을 살롱 전에 돌로 만든 8점의 두상을 출품했는데, 그 길쭉하고 단순화한 형태는 아프리카 조각의 영향을 반영하고 있다.

모딜리아니는 곧 그림으로 돌아왔지만, 조각을 해본 경험은 그의 화풍에 근본적으로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모딜리아니의 두상 조각이 갖고 있는 특징들, 즉 기다란 목과 코, 단순화한 이목구비와 긴 타원형의 얼굴 윤곽은 곧 그의 그림의 특징이 되었다. 그는 명암의 점진적인 변화를 이용하여 3차원적 입체 효과를 내는 명암법(chiaroscuro)을 제한하거나 거의 쓰지 않고 힘찬 윤곽선과 강렬한 색면들을 통하여 평면적인 형상에 조각과 비슷한 입체감을 주었다.

1914년 전쟁이 일어나자 모딜리아니의 생활은 더욱 어려워졌다. 알렉상드르를 비롯한 여러 친구들은 전선에 나가 있었다. 그림은 팔리지 않았고, 이미 약해져 있던 건강은 가난과 과로, 술과 약물 남용 때문에 더욱 나빠지고 있었다. 그러나 1914~16년의 2년 동안 영국 시인 비어트리스 헤이스팅스와 함께 살면서 복잡한 연애관계의 소용돌이 속에 빠져 있었다.

그러나 미술상 폴 기욤이 그를 도와주었고, 특히 폴란드 시인 레오폴트 즈보로프스키의 도움이 컸다. 그들은 몇 점의 그림과 드로잉을 사주거나 남에게 팔도록 도와주었다.

모딜리아니는 초상화 전문은 아니었다. 그에게 있어서 초상화는 확고하고 표현력이 풍부한 윤곽선으로 그린 드로잉을 통하여 인물을 조각처럼 표현해낼 수 있는 기회에 불과했다. 그는 파리 미술계와 문단의 유명인사인 친구들을 주로 그렸지만 모델이나 하인, 또는 이웃에 사는 소녀들처럼 평범한 사람들도 그렸다.

1917년 그는 커다란 여성 누드화 연작을 그리기 시작했는데, 따뜻하고 선명한 색채와 둥그스름하고 관능적인 형태의 이 누드화들은 그의 걸작에 속한다. 그해 12월 베르트 베유가 자신의 화랑에서 그의 개인전을 열어주었지만, 경찰은 이 누드화들이 미풍양속을 해친다고 판단하여 그림을 치우게 했다. 그의 마지막 연애사건은 같은 해인 1917년에 시작되었다. 이번 상대는 젊은 화가인 잔 에뷔테른이었는데, 그는 잔과 함께 지중해 연안의 코트다쥐르로 가서 살았다.

그들 사이에 딸 잔이 태어난 것은 1918년 11월이었다. 이무렵 그의 그림도 활짝 꽃피었다. 그의 윤곽선은 점점 더 세련되게 다듬어졌고, 색채는 더욱 섬세해졌다. 그러나 지중해 연안의 평온한 생활과 날씨도 쇠약해진 화가의 건강을 회복시켜주지는 못했다. 그는 1919년 5월 파리로 돌아온 뒤 1920년 1월에 앓아누웠고, 10일 뒤 결핵성 뇌막염으로 죽었다.

임신중이던 잔 에뷔테른도 이튿날 창문에서 뛰어내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파리의 전위 예술계 외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모딜리아니는 살롱 전에 거의 참여하지 않았기 때문에 1917년 베르트 베유의 화랑에서 열었던 전시회가 그의 유일한 개인전이었다. 죽은 뒤인 1922년 베른하임 죈 화랑에서 열린 전시회와 시인 앙드레 살몽이 쓴 논문을 통하여, 모딜리아니는 마침내 명성을 얻었다.

대부분 사암으로 만든 그의 독창적인 조각은 모두 합해 25점에 이른다.

드로잉의 수는 확정할 수 없다. 그의 그림은 약 30점의 여성 누드화 대작들(1916~19)과 4점의 풍경화(1919)를 제외하고는 거의 모두 친척·화가·작가·음악가·배우·미술상 및 미술품 수집가, 누구인지 확인할 수 없는 수많은 사람들의 초상화이다. 초상화의 모델이 된 콘스탄틴 브랑쿠시, 디에고 리베라, 앙리 로랑스, 파블로 피카소, 샤임 수틴, 후안 그리스, 막스 자코브, 장 콕토, 자크 립시츠 등을 보면 모딜리아니가 자주 드나들던 몽파르나스의 분위기를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파블로 피카소
파블로 피카소

몇몇 사람들, 예를 들면 폴 기욤, 한카 즈보로프스키, 레오폴트 즈보로프스키, 비어트리스 헤이스팅스, 잔 에뷔테른 등은 여러 번 그려지기도 했다. 그러나 자화상은 죽기 직전인 1919년에 그린 단 1점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