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니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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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미국 남북전쟁(1861~65) 때 북군이 남부연합군을 봉쇄하기 위해 수심이 얕은 항만과 강에서 사용할 수 있도록 설계한 철갑선(→ 장갑함).

모니터(monitor)
모니터(monitor)

스웨덴 태생의 공학자 존 에릭슨이 미국 해군을 위해 만든 이런 형태의 최초의 배 이름이 '모니터'였다. 놀랄 만큼 정교하게 설계된 이 배에는 기본특허를 받았던 40가지 이상의 발명품이 내장되어 있었다. 이 배의 설계에서 가장 중요한 특징으로는 적의 포탄을 맞지 않도록 수면 위로 드러나는 부분을 최소화한 것과, 선체에 12㎝ 두께의 강철판을 씌우고 갑판에는 2.5㎝ 두께의 강철판을 덮어서 적의 포격으로부터 배를 보호한 것을 들 수 있다.

항구 안에 있는 경우처럼 배를 재빨리 조종할 수 없을 때, 대포를 조준해야 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회전식 포탑이 개발되었다. 증기의 힘으로 회전하는 모니터호(號)의 포탑에는 11in(인치) 포 2문이 설치되어 있었고, 포탑 자체는 20㎝ 두께의 강철판으로 덮여 있었다.

1862년 3월 9일 모니터호는 남군의 철갑선인 버지니아호(원래 이름은 메리맥호)와 극적인 전투를 벌였다. 이 전투는 전쟁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지는 못했지만 세계적인 관심을 끌었고, 미국 해군은 이것과 비슷한 배들을 많이 만들게 되었다. 그러나 최초의 모니터호는 항해에 적합하지 못했다.

이 유명한 전투를 치르기 위해 뉴욕에서 체서피크 만까지 가는 동안 이 배는 2번이나 침몰할 뻔했다. 1862년 12월 다시 바다로 나간 이 배는 해터러스 곶 앞바다에서 가라앉아 장교 4명과 사병 12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남북전쟁 동안 북군은 개량한 모니터 함(艦)을 많이 만들어 사용함으로써 다양한 전과를 올렸다. 이들 장갑함은 다른 배들과 싸울 때 매우 효과적이어서 봉쇄를 유지하는 일에서는 중요한 역할을 했지만, 요새화한 항구를 공격할 때는 별로 위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오랫동안 미국 해군은 남북전쟁 때와 같은 유형의 모니터 함을 보유했다. 1890년대에는 각각 2개의 회전식 포탑을 가진 모니터 함 6척이 만들어졌다.

1902, 1903년에 취역한 4척의 모니터 함은 각각 12in 포 2문을 탑재하고 있었는데, 이것이 미국 해군의 마지막 모니터 함이 되었다. 이 배들은 제1차 세계대전 때 잠수함을 위한 보급선으로 이용된 뒤 1922년에 해체되었다. 영국 해군도 모니터 함을 채택했다. 1915, 1916년에는 15in 포와 18in 포를 탑재한 대형 모니터 함을 만들어 벨기에 해안, 다르다넬스 해협, 수에즈 운하, 아드리아 해 등에서 사용했다. 제2차 세계대전 때 영국 해군은 15in 포 2문을 탑재한 모니터 함을 만들었다. 소련과 루마니아 해군은 흘수(吃水)가 얕고 선체가 작은 모니터 함을 만들어 강에서 싸우는 포함(砲艦)으로 이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