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넬리크 2세

메넬리크 2세

다른 표기 언어 Menelik I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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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844. 8. 17, 에티오피아 셰와 앙코버
사망 1913. 12. 12, 아디스아바바
국적 에티오피아

요약 셰와의 왕(1865~89 재위)이며 에티오피아의 황제(1889~1913 재위).
본명은 Sahle Miriam. Sahl대체이미지 Mariam이라고도 씀.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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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개요
  2. 초기생애
  3. 셰와의 왕
  4. 아도와에서 이탈리아에 거둔 승리
메넬리크 2세(Menelik II)
메넬리크 2세(Menelik II)

개요

에티오피아의 가장 위대한 통치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제국을 거의 오늘날의 경계까지 넓혔고, 1896년에는 이탈리아의 침략을 물리쳤으며, 근대화를 위해 폭넓은 개혁을 시행했다.

초기생애

메넬리크의 아버지는 뒷날 셰와의 왕(negus)이 된 하일레 말라코트였다.

그의 어머니는 궁정 시녀 출신으로 그가 태어나고 얼마 안 되어 하일레 말라코트와 결혼했다. 그의 조상들은 17세기 이래로 셰와의 핵심지역인 멘츠의 통치자였다. 그리고 그들은 더 거슬러 올라가 1268~1854년(또는 1270~1855)에 에티오피아를 지배했던 솔로몬가의 황제들과 혈연관계가 있었다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메넬리크 2세라는 왕명은 의미심장하다. 메넬리크 1세는 솔로몬과 시바의 여왕 사이에서 태어난 전설적인 왕이기 때문이다.

1855년에 에티오피아 황제였던 원기왕성한 테오드로스 2세는 그당시 거의 반은 독립적이었던 셰와 왕국을 침략했다.

하일레 말라코트는 곧 일어난 전투에서 전사했고, 메넬리크는 포로가 되어 에티오피아 황제의 산악요새인 암바막델라로 붙잡혀갔다. 거의 10년 동안 포로로 잡혀 있는 가운데 그는 테오드로스가 제국을 통합하고 근대화시키는 데 도와주려고 애를 썼으나 강압적이고 종종 폭력적인 방법을 사용함으로써 실패하고, 결국 자신도 자살하게 되는 과정을 지켜보았다.

셰와의 왕

그는 1865년 막델라에서 용케 도망쳐 셰와로 돌아왔다.

당시 셰와에서는 여전히 테오드로스에 맞서 종종 소요와 반란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는 21세밖에 되지 않았지만 테오드로스가 1859년에 지배자로 지명했던 베제베를 몰아내고, 뒤이어 스스로를 그 지역의 왕으로 선포했다. 메넬리크는 180㎝가량의 키에 검은 얼굴과 새하얀 치아를 갖고 있었으나, 얼굴에 천연두 자국이 있었다. 궁정을 방문한 많은 외교사절들에게 좋은 인상을 심어준 그는 그들의 도움을 받아 꾸준히 총포류를 수입하여, 군대와 수비대 및 수비대를 따라 정착한 사람들을 훌륭하게 무장시켰다.

1868년 테오드로스가 죽자 그는 에티오피아의 황제자리를 탐냈다.

그러나 그외에 황제에 오르려는 사람들이 있어 황제 자리는 처음에는 테클 지오로지스(1868~72), 다음에는 요한네스 4세(1872~89)에게 넘어갔다. 요한네스는 메넬리크로 하여금 그의 야심을 주로 남쪽과 동쪽으로 펴나가도록 강요했다. 이에 메넬리크는 아루시·하레르(하라르)·지마·케파(카파) 등과 남부 에티오피아의 여러 왕국들을 복속시켰다. 이렇게 하여 요한네스가 1889년 죽을 무렵에 그는 에티오피아에서 가장 강력한 인물로 등장해 있었고, 그토록 오래 기다려왔던 황제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다.

메넬리크는 황제 요한네스 4세와 그의 아들 멩게샤를 상대로 경쟁을 벌이던 시기에 이탈리아인과 우호관계를 맺고 있었지만, 그후에는 서로 싸우게 되었다.

이탈리아인들은 메넬리크와 1889년에 맺은 우치알리 조약의 제17항을 이탈리아가 에티오피아를 보호령으로 삼도록 보장하는 것으로 해석했다. 오랜 역사를 지닌 나라가 보호령이 되는 것에 메넬리크가 동의했으리라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그는 이탈리아인이 그 조항을 어떻게 해석하고 있는가를 알았을 때 유럽에서 어느 정도 받아들여지고 있었던 그 해석을 즉각 부정했고, 1893년에는 조약을 통째로 파기했다.

아도와에서 이탈리아에 거둔 승리

이탈리아인들은 홍해 연안을 따라 자리잡고 있었고, 이탈리아의 에리트레아 식민지를 다스리던 총독은 여러 차례 음모를 꾸미고 소규모의 전투를 치른 끝에 정면대결을 결행했다.

그러나 그가 거느린 군대는 1896년 3월 1일 아프리카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전투 가운데 하나인 아도와 전투에서 에티오피아 군대에게 패하고 말았다. 그 전투가 끝난 뒤에 맺어진 협정으로 우치알리 조약이 무효가 되고 에티오피아의 완전한 주권과 독립이 인정되었으나, 이탈리아는 에리트레아를 계속 보유할 수 있었다.

아도와 전투 이후 유럽 열강들은 에티오피아를 실질적인 정치세력으로 받아들였다.

에티오피아가 유럽 군대를 결정적으로 패배시키자 메넬리크의 명성은 국제적으로 높아졌고, 외국인 조언자, 외교관, 사절, 개척자들이 에티오피아로 몰려들었다. 그후 메넬리크가 황제로서 이룬 치적으로는, 장관직을 새로 만들고 근대교육을 시작했으며, 전화망과 전보망을 건설하고, 아덴 만(灣)의 지부티에서 셰와 고원에 있는 황제의 새로운 수도인 아디스아바바까지 철도를 놓은 것 등을 들 수 있다. 1906년(또는 1907)부터 메넬리크는 중풍으로 여러 차례 쓰러졌고, 권력은 그의 아내인 황후 타이투, 섭정 라스 테셈마, 황태자인 손자 리즈 이야수에게 차례로 넘어갔다.

황제는 병에 시달리다가 1913년에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