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인구원설

만인구원설

다른 표기 언어 Universalism , 萬人救援說 동의어 보편구원론, 普遍救援論

요약 모든 인간은 구원받는다는 신념.
보편구원론이라고도 함.

만인구원설은 그리스도교 역사에서 여러 번 등장했으나 그중에서도 특히 3세기 알렉산드리아의 오리게네스의 저술에서 뚜렷하게 나타나며, 조직화된 운동으로는 18세기 중엽 미국에서 시작되었다.

칼뱅주의 신학의 엄격한 측면들을 완화시켜 만인구원의 교리가 다시 등장할 수 있는 길을 예비해준 데에는 계몽주의의 영향이 컸다. 만인구원주의자들은 사랑이 많은 하느님이 인류의 일부만을 선택하여 구원하고 나머지는 영원한 형벌을 받을 운명으로 창조했을 리가 없으며, 내생의 일정 기간 동안만 형벌을 받아서 영혼이 정화되고 하느님과 함께 영원히 거하기를 준비하게 된다고 주장했다.

미국의 만인구원설 선구자는 조르주 드 벤네뷰(1703~93)로서 그는 1741년 유럽에서 펜실베이니아로 이주해 와 이곳에 사는 유럽인과 인디언을 대상으로 설교와 의료활동을 폈다.

초기의 만인구원설 운동에 가장 큰 추진력이 된 것은 존 머리(1741~1815)의 설교였는데, 그는 1770년 영국에서 식민지 아메리카로 이주해와서 식민지 전역에 이 교리를 전파했으며, 만인구원설이 사람들을 부도덕하게 만든다고 믿었던 정통 그리스도교인의 거센 반대에 부딪혔다. 존 머리의 만인구원설은 일종의 수정된 칼뱅주의였으나, 18세기말 만인구원주의자들은 칼뱅주의 교리를 거부하고 호세아 벌루를 추종했다.

벌루는 유니테리언주의의 신(神) 개념을 도입해 그리스도의 속죄를 재해석했다. 즉, 예수의 죽음은 인류의 죄를 대신 속죄하기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자신의 자녀에 대한 하느님의 무한하고 변함없는 사랑을 드러내주는 사건으로 보았고 종교에서 이성의 역할을 크게 강조했다.

19세기초부터 만인구원주의자들은 많은 견해와 관습이 유니테리언주의와 같았기 때문에 친밀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이 두 교파의 전국 조직체인 미국 만인구원주의자 교회와 미국 유니테리언 연합을 합하려는 노력이 여러 면에서 이루어졌고, 그것은 1960년 유니테리언 만인구원론자협회를 창설해 1961년에 공식적으로 두 단체를 병합함으로써 결실을 맺었다. 만인구원주의자 교회는 교회행정면에서 회중교회의 성격을 띠었다. 각 교회는 교회의 일을 스스로 처리했고, 그밖의 구역교회나 지역단체들과도 제휴했다.

유니테리언 만인구원론자협회는 각 지역교회와 구역의 대표자들로 구성되어 만인구원주의 운동에 미국 전체의 입장을 드러내려 했다. 회중교회 정책에 따라 각 만인구원주의 교회는 그 나름대로의 예배형태를 자유로이 선택했다. 단순하고 비의식적인 예배형태가 가장 보편적이며 설교에 큰 비중을 두었다.

만인구원주의자들은 운동을 시작할 때부터 신앙의 내용 면에서 상당히 견해가 다양했다.

신앙 고백문을 작성하기 위해 여러 모로 노력했으나 1935년말 겨우 부분적인 성공을 거두었을 뿐이었다. 자유주의, 개인적 해석의 자유, 다양성의 용인, 신학 및 교회문제 접근방식의 일치, 인간본연의 존엄성에 대한 믿음 등이 만인구원설 운동을 하나로 지속시킨 강력한 요소가 되어왔다. 일반적으로 만인구원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종교에서 이성의 역할을 강조하며, 과학적 발견에 비추어 신앙을 수정할 것을 역설한다. 따라서 그들은 전통 그리스도교의 기적의 요소들을 현대 지식과 양립할 수 없는 것으로 생각하여 배척했다.

예수를 한 위대한 교사이며 본받을 만한 모범으로 간주할 뿐 신적인 존재로는 보지 않았다. 20세기에는 좀더 폭넓은 만인구원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만인구원주의자들은 그리스도교 전통과의 유대를 강조하기는 하지만 종교의 보편적 요소들을 추구하면서 그리스도교 이외의 타 종교들과 밀접한 관계를 모색하고 있다.→유니테리언주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