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민공동회

만민공동회

다른 표기 언어 萬民共同會

요약 독립협회의 정치 활동 중 하나로 도시소상인·소수공업자·빈민과 일부 지식인층이 주도했다. 초기에는 독립협회와 연계 아래 전개되었으나 점차 그 영향에서 벗어났다.
최초의 만민공동회는 독립협회 주최로 1898년 3월 10일 종로에서 약 1만 명의 서울 시민이 참여하여 개최되었다. 만민 공동회는 자유롭게 정치적 소견을 발표했고, 민권신장이 그 주요내용을 이루는 ‘헌의 6조’를 결의함으로써 독자적인 민중 운동으로 성장해 갔다. 만민 공동회 운동이 강력해지자 정부는 주요 인사를 체포했다. 이에 반발하여 만민공동회가 시위운동을 전개하자 정부는 보부상들을 이용하여 이들을 무력으로 해산시켰다.
만민공동회의 운동은 비록 실패했지만, 자발적으로 참여하여 반제의식을 불어넣은 대중정치투쟁이었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가 있다.

초기에는 독립협회와 일정한 연계 아래 전개되었으나, 점차 그 영향에서 벗어났다.

최초의 만민공동회는 독립협회 주최로 1898년 3월 10일 종로에서 약 1만 명의 서울 시민이 참여하여 개최되었다. 이 대회에서 쌀장수 현덕호가 회장으로 추대되었고, 백목전 다락 위에서 여러 시민들이 주로 당시 러시아의 침략정책을 규탄하는 성토연설을 하면서 러시아의 군사교관과 재정고문의 철수를 요구했다. 이는 대한제국 정부의 러시아 고문단 철수와 한러은행의 철폐조치에 일정한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독립협회의 강력한 영향으로 그 운동은 반러 수준에 머물고 있었다.

그후 거의 날마다 열린 대중집회는 시민의 자발적 참여로 다루어지는 안건마다 그를 담당하는 총대위원이나 대표위원을 직접 뽑아 회의 결의사항을 집행하는 직접 대표제와 같은 민주적 운영방식으로 더욱 활발해졌으며, 점차 독립협회의 영향력을 배제하며 독자적인 민중운동으로 성장해갔다. 그 결정적인 계기를 이루었던 것은 1898년 10월 29일이었다. 이 날의 개막연설은 해방된 천민인 백정 박성춘이 했고, 누구든지 자발적으로 자유롭게 자신의 정치적 소견을 발표했다.

이 집회에서 '헌의 6조'를 결의하여 정부에 강력히 요구했다. 첫째, 외국에 의존하지 말고 전제왕권을 공고히 할 것, 둘째, 이권양여와 차관도입, 외국군대의 지원, 외국과의 조약을 각부 대신과 중추원 의장이 합동으로 서명하여 시행하게 할 것, 셋째, 전국의 재정은 모두 탁지부에서 관할하고 예산과 결산은 인민에게 공포할 것, 넷째, 중죄인은 공판에 회부하되 자복한 후에 재판할 것, 다섯째, 칙임관은 황제가 정부의 과반수 동의를 받아 임명할 것, 여섯째, 장정(법률)을 시행할 것 등으로 민권신장이 그 주요내용을 이루고 있다.

이는 독립협회의 주장과 유사하나, 만민공동회는 민권신장의 방법으로서 하원 설치를 요구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근본적인 차이를 보이고 있다. 이렇게 만민공동회 운동이 강력하게 전개되자, 대한제국 정부는 요구를 들어주는 척하면서 한편으로는 탄압을 했다. 그리하여 독립협회의 정권장악 기도를 빌미로 삼아 독립협회와 더불어 만민공동회의 주요인사를 체포했다. 이에 반발하여 만민공동회가 시위운동을 전개하자 정부는 보부상들을 이용하여 이들을 무력으로 해산시켰다.

만민공동회의 운동은 비록 정부의 탄압을 받아 실패하고 말았지만, 신분해방의 생생한 현장으로서 대중성을 고양시킬 수 있었고 제국주의 경제침탈로 인해 직접 피해를 입고 있었던 도시소상인·소수공업자·빈민과 일부 지식인층이 자발적으로 참여하여 반제의식을 불어넣은 대중정치투쟁이었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를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소시민의 정치적 역량의 미숙으로 인해 외세의존적이며 민중적 기반을 갖추지 못했던 독립협회의 영향권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는 한계를 보였고, 그결과 당시 농민운동과도 결합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