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하비라

마하비라

다른 표기 언어 Mahavira 동의어 바르다마나, Vardhamāna
요약 테이블
출생 BC 599, 인도 크샤트리아쿵다그라마
사망 BC 527, 파바푸리
국적 인도

요약 자이나교를 일으킨 24명의 티르탕카라(Tῑrthaṅkara:완전히 깨달은 스승) 가운데 마지막 인물, 자이나교 승가의 개혁자.
본명은 Vardhamāna.

목차

접기
  1. 개요
  2. 생애
  3. 마하비라의 가르침
마하비라(Mahavira)
마하비라(Mahavira)

개요

자이나교의 양대 종파인 백의파(白衣派)와 공의파(空衣派)의 공통된 전승에 따르면, 마하비라는 출가하여 극도의 금욕적인 삶을 실천함으로써 최상의 지혜(kevalajñāna)를 얻었다.

마하비라는 금욕의 가르침을 펴면서 비폭력과 채식을 옹호했고, 불살생·불망어(不妄淫)·불투도(不偸盜)·불사음(不邪淫)·무소유 등 출가 5계를 엄수할 것을 권했다.

생애

전통적으로 마하비라는 BC 599년에 태어났다고 받아들여지고 있지만, 학자들은 그가 석가모니와 동시대의 사람으로서 석가모니보다 나이가 어렸다고 추정하면서 그의 출생 연대를 40년 정도 후대로 보고 있다.

마하비라는 무사 계급인 크샤트리아 가문에서 태어나서 자이나교와 불교의 발상지인 바이샬리(지금의 비하르 주 바사르 지방)의 교외에 있는 크샤트리아쿵다그라마라는 마을에서 자라났다. 아버지 싯다르타는 나타(Nata/Jñātṛ) 부족의 왕이었다. 자이나교의 한 전승에 따르면 그의 어머니는 사제 계급인 브라만 가문 출신이었고 이름은 데바난다였다고 한다.

다른 전승에 따르면 크샤트리아 가문 출신으로 이름은 트리살랴 또는 비데하딘나, 프리야카리니였다고 한다.

인도에서 BC 6세기는 철학적·종교적·사회적으로 대격동의 시기였으며, 크샤트리아 계급의 일부 사람들이 최고의 계급으로 군림하던 브라만 계급의 문화적 지배에 대항한 시기였다.

특히 많은 동물을 죽여 제사지내는 베다의 희생제(yajña)에 대해서 반대 의식이 고조되고 있었다. 당시에 사람이 나고 죽고 환생하는 과정에서 동물로도 전생(轉生)한다는 윤회관이 널리 확산되면서 많은 지성인들이 불필요한 살육을 부당한 것으로 보게 되었다. 비폭력의 가르침이 확산된 데에는 경제적인 요소도 작용했을 것이다. 이러한 브라만 반대파의 지도자들은 이단으로 간주되기에 이르렀다. 마하비라와 석가모니는 이러한 운동의 대표적인 두 지도자였다.

마하비라의 생애에 대한 전승은 자이나교의 양대 종파인 백의파와 공의파가 서로 다소 다르다. 그러나 마하비라가 맏아들이 아니어서 통치권을 상속받을 수는 없었지만 사치스러운 생활을 누리며 자란 것은 분명하다. 그는 크샤트리아 출신의 여자와 결혼하여 딸 하나를 낳고 30세가 되었을 때 출가하여 수도의 길에 들어섰다. 전설에 따르면 그의 부모는 그 전에 단식(sallekhana:자발적인 단식)을 행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처럼 마하비라는 부모가 속해 있었던 파르슈바나타의 금욕적 교단에 입문할 때 이미 자기 부정에 익숙해 있었다.

파르슈바나타 교단에 입문함으로써 수도생활에 들어선 마하비라는 처음에는 1년 이상 1벌의 옷만을 걸치다가 나중에는 나체로 이곳저곳을 다녔고 공양을 받거나 물을 마시기 위한 그릇마저 포기함으로써 철저한 무소유의 삶을 실천했다.

그는 해충들이 자신의 몸 위를 기어다니거나 물어뜯게 놔두고 인내를 가지고 아픔을 견디었다. 사람들은 종종 그의 몸이 추하고 꼴사납다고 하며 욕설을 퍼붓고 매질을 했다. 밤낮으로 명상하며 화장터나 묘지 또는 나무 밑에서 생활했다. 죄가 되는 행동은 무엇이든지 피하려고 애쓰고 특히 어떤 생명체에게도 피해를 주는 것을 반대하면서 아힘사(ahiṃsā), 즉 비폭력의 교의를 발전시켰다. 수차에 걸쳐 단식을 했고 자신을 위해 특별히 마련된 음식은 아무 것도 먹지 않았다.

거의 1년 내내 이곳저곳을 돌아다녔지만 우기의 4개월 동안은 마을과 도시에서 보냈다. 거리를 지날 때 욕설을 듣고 육체적 상해를 입었지만 결코 인내심과 평정을 잃지 않았다.

마하비라의 가르침

12년간의 고행을 거쳐 그는 최상의 지혜를 얻었다.

당시 파르슈바나타파는 이미 호소력을 잃고 있었다. 마하비라는 자이나의 가르침을 되살리고 그 종교적 공동체인 승가를 재정비함으로써 자이나교의 창시자로까지 불리게 되었다. 전승에 의하면 마하비라는 BC 9세기 베나레스(지금의 우타르프라데시 주의 바라나시) 출신의 제23대 티르탕카라인 파르슈바나타의 가르침을 근간으로 삼아 형이상학적·신학적·우주적 믿음 등 자이나교의 기존 교의를 체계화하였고, 또한 승가에 속하는 비구, 비구니, 남·여 재가신자가 지켜야 할 규범과 지침을 세웠다.

마하비라는 사람들에게 모든 생명체에 대하여 비폭력을 실천하고 철저한 금욕생활을 통해 물질의 오염으로부터 자신의 영혼을 구원할 수 있다고 가르쳤다. 그가 비폭력을 주장했기 때문에 그의 추종자들은 채식주의를 강력하게 지지했고 그결과 인도 의례에서 동물을 죽여서 바치는 제사는 차츰 사라지게 되었다. 추종자들은 구원을 추구할 때 마하비라가 세웠다고 하는 '5대 서원' 즉 생명체를 죽이지 말 것, 진리가 아닌 것을 말하지 말 것, 탐욕을 내지 말 것, 성적 쾌락을 추구하지 말 것, 살아 있는 것에나 살아 있지 않은 것에 대하여 애착하지 말 것을 받아들였다.

마하비라 바로 전대의 티르탕카라였던 파르슈바는 '4대 서원'만을 가르쳤다고 한다.

애착이나 탐욕과 같은 적들의 정복자라는 의미에서 지나(jina)라고도 불렸던 마하비라는 전승에 의하면 BC 527년 비하르 주의 파바에서 죽었다고 한다. 그 뒤 그의 추종자들은 비폭력을 실천함으로써 계속해서 인도 문화에 영향을 주었고 오늘날에도 여러 개혁가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