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로

마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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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496(?), 프랑스 카오르
사망 1544, 사부아 토리노
국적 프랑스

요약 프랑스 르네상스 시대의 가장 위대한 시인 가운데 한 사람.

라틴 시의 형식과 수사적 표현법을 이용한 것은 후계자들의 문체에 뚜렷한 영향을 주었다.

그의 아버지도 시인으로서 안 드 브르타뉴의 궁정에서 일하다가, 나중에는 프랑수아 1세를 모셨다. 1514년에 마로는 빌루아의 영주이며 왕의 비서인 니콜라 드 뇌프빌의 시동이 되었다. 아버지처럼 궁정 시인이 되고 싶었던 마로는 프랑수아 1세의 누이이며 나중에 나바라의 왕비가 된 앙굴렘의 마르그리트를 모시기 시작했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그는 프랑수아 1세의 시종이 되었으며, 잠시 망명해 있던 기간(1534~36)을 제외하고는 1542년까지 그 자리를 지켰다.

그는 술과 고기를 금하는 사순절의 규제를 무시했다는 이유로 1526년에 체포되었으며, 이런 행동 때문에 루터파 교도라는 의심을 받게 되었다.

그는 이 짧은 감옥 생활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몇몇 작품에 대한 영감을 얻었는데, 특히 정의를 우의적으로 풍자한 〈지옥 L' Enfer〉과 친구인 '리옹 자메에게 보낸 편지'(1526)가 유명하다. 1527년에 그는 감옥의 경비원을 공격하여 죄수 1명을 풀어주었다는 이유로 다시 투옥되었다. 그러나 왕에게 석방을 탄원하는 편지를 쓴 결과, 얼마 후에 석방되었다. 1531년 사순절 기간에 고기를 먹었다는 이유로 다시 체포되었지만 이번에는 투옥을 면했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 속에서도 마로의 명성은 1530년까지 이미 확고하게 확립되어 있었고, 그가 쓴 많은 시들은 널리 유포되어 있었던 것 같다. 가톨릭 미사를 반대하는 포스터가 주요도시는 물론 왕의 침실문에까지 나붙은 벽보사건(1534)이 일어난 뒤, 마로는 나바라로 달아나 마르그리트의 보호를 받았다. 교도에 대한 박해가 점점 심해지자, 그는 이번에는 이탈리아 페라라에 있는 르네 드 프랑스의 궁정으로 달아났다.

마로는 그후 프랑수아 1세가 박해를 멈춘 1537년에야 다시 파리로 돌아 왔다. 마로는 궁정시인으로서 프랑스 궁정의 공식 행사에 사용할 시를 의무적으로 써야 했지만, 이 의무에 종사하고 있지 않을 때에는 대부분의 시간을 〈구약성서〉의 〈시편〉을 번역하는데 바쳤다. 이 〈시편〉의 일부는 1539년에 처음 간행되었고, 〈다윗의 시편 3편 Trente Pseaulmes de Davíd〉은 1542년에 출판되었다.

이 번역은 차분하고 엄숙한 음악성으로 유명했다. 그러나 소르본 신학교가 이 번역을 비난했기 때문에 마로는 다시 망명길에 올랐다. 그러나 장 칼뱅은 이 번역을 높이 평가하고, 스위스 제네바에 마로를 위한 피난처를 마련해주었다. 그러나 그 엄격하고 근엄한 도시가 마로의 행동을 용납할 수 없게 되자, 그는 이탈리아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마로의 초기 시는 '압운파'(rhétoriqueurs)라고 불리는 중세 후기 시인들의 양식을 전적으로 따르고 있었지만, 그는 곧 이 유파의 기발한 착상과 현학적인 비유 및 복잡한 작시법만이 아니라 이 유파가 확립해놓은 기존의 장르도 버렸다.

그대신 그는 라틴 고전문학을 알게 되고 이탈리아 문학형식과 접촉하게 되었기 때문에, 고전문학의 양식과 주제를 모방하는 법을 배울 수 있었다. 그는 비가와 목가, 풍자시, 축혼시, 1연으로 이루어진 이탈리아의 풍자적 '스트람보토'(프랑스의 에스트라보에 해당함)를 프랑스 시에 도입했고, 프랑스 시인으로는 처음으로 페트라르카의 소네트 형식을 시도했다.

특히 그의 풍자시와 서간체 시(에피트르)는 재치와 지적인 세련미, 진실함과 자연스러움을 보여주고 있는데, 이는 그후 2세기 동안 프랑스의 이 문학 장르의 특성이 되었다. 그는 또한 왕을 찬양하는 노래의 대가 였으며, 발라드와 롱도(2개의 운을 가진 짧은 정형시)라는 낡은 형식에 호라티우스풍의 재치를 불어넣었다.

새로운 서정시 형식을 창조하거나 기존의 서정시 형식을 개선하려고 애쓴 마로는 가요와 성가를 짓고 대체로 여체(女體)의 일정한 부분들을 세세히 묘사하는 풍자시 '블라종'의 형식을 창조했다(1536). 블라종은 곧 인기를 끌었으며, 너무 많이 모방되었기 때문에 1555년에 시선집을 출판할 수 있을 정도였다.

마로는 고대 로마의 시인인 카툴루스와 베르길리우스 및 오비디우스를 번역하고, 프랑수아 비용의 작품과 〈장미 이야기 Roman de la rose〉를 편집했다. 그는 프랑스의 경박하고 익살스러운 시에 고상함과 우아함 및 인간적인 따뜻함을 더해주었다. 그의 업적은 대부분 그가 죽은 직후에 문학계를 지배한 '플레야드'(칠성시파)에 가려 일시적으로 빛을 보지 못했다. 그러나 마로의 영향은 영국의 엘리자베스 시대 사람들, 특히 에드먼드 스펜서한테서 뚜렷이 드러났고, 17세기에는 프랑스에서도 그의 영향력이 되살아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