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가리타

마르가리타

다른 표기 언어 Margarita de Navarra 동의어 Marguerite de Valois/de Frace/Reine Margot
요약 테이블
출생 1492. 4. 11, 프랑스 앙굴렘
사망 1549. 12. 21, 오도비고르
국적 나바라

요약 종교개혁자들과 인문주의자들의 후원자이자 작가로서 르네상스 시대에 가장 뛰어난 사람들 중 한 사람이었다. 앙굴렘 백작인 발루아 오를레앙의 샤를과 사보이의 루이즈 사이에 태어났으며 동생은 프랑수아 1세로서 프랑스의 왕위를 계승했다. 프랑수아 라블레, 클레망 마로, 보나방튀르 데 페리에르, 에티엔 돌레 등을 후원했으나 이들에 대한 왕의 박해가 심해지면서 데 페리에르, 돌레, 마로를 구해주지 못했다. 대표작인 〈엡타메롱〉은 보카치오의 〈데카메론〉과 비슷한 내용으로 피레네 온천에서 돌아오다 홍수를 만나 발이 묶인 여행자들이 나눈 72가지의 이야기이다. 이를 통해 미덕·명예·재치의 승리와 악·위선의 패배를 예로 들면서 방탕하고 욕심 많은 수사와 성직자들을 신랄하게 풍자하고 있다.

인문주의자와 종교개혁자들의 후원자로, 그리고 작가로서 프랑스 르네상스에서 가장 뛰어난 인물 중 한 사람이었다.

앙굴렘 백작인 발루아 오를레앙의 샤를과 사보이의 루이즈 사이에 태어난 그녀는 1515년 동생이 프랑수아 1세로 왕위를 계승하자 어머니 다음으로 프랑스에서 가장 영향력있는 여성이 되었다. 1525년 첫번째 남편인 알랑송 공작 샤를이 죽자 나바라의 엔리케 2세와 결혼해서 딸 잔(나중에 프랑스 앙리 4세의 어머니가 됨)을 낳았지만 이들 부부는 곧 사이가 멀어졌다. 다른 한편으로 마르가리타는 언제나 동생에게 헌신적이었다.

1525년 프랑수아 1세가 이탈리아 원정에서 실패하고 파비아에서 포로가 된 뒤 마드리드 감옥에서 병으로 위독할 때 그녀가 구해준 것으로 전해진다.

그녀는 예술과 학문 분야의 재능있는 사람들과 교회의 교리 및 종규(宗規) 개혁을 주장하는 사람들을 후원했다. 그녀는 프랑수아 라블레, 클레망 마로, 보나방튀르 데 페리에르, 에티엔 돌레 등을 후원했다. 그녀 자신의 종교적 성향은 신비주의적인 경건파였으나 인문주의자 자크 르페브르 데타플의 영향을 받았고, 성 바울로의 〈사도행전〉을 그리스도교 교리의 원천으로 생각하는 기욤 브리송의 영향도 받았다.

그녀는 가톨릭 교회의 개혁을 지지하긴 했지만 칼뱅주의자는 아니었기 때문에 칼뱅주의를 옹호하는 딸과의 관계가 좋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는 개혁가들을 보호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고 프랑수아 1세를 설득해 가능한 한 편협한 종교적 조치를 취하지 못하도록 했다. 그러나 결국 왕의 박해가 심해지면서 그녀의 힘으로는 데 페리에르, 돌레, 마로를 구할 수 없었다.

그녀가 쓴 가장 중요한 문학작품으로는 〈엡타메롱 Heptaméron〉(1558~59, 사후 출판)으로 이 책의 구성은 보카치오의 〈데카메론〉과 비슷하며 내용은 피레네 온천에서 돌아오다가 홍수를 만나 발이 묶인 여행자들이 나눈 72가지의 이야기로, 미덕·명예·재치의 승리와 악·위선의 패배를 예로 들면서 방탕하고 욕심 많은 수사와 성직자들을 신랄하게 풍자하고 있다.

1531년 출간된 시집 〈죄 있는 영혼의 거울 Miroir de l'âme pécheresse〉을 비롯해 생전에 몇 권의 시집이 나왔지만 〈배 Le Navire〉 등의 가장 훌륭한 작품은 1896년에야 〈후기 시집 Les Dernières Poésies〉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