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터 리드

월터 리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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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851. 9. 13, 미국 버지니아 벨로이
사망 1902. 11. 22, 워싱턴 D. C.
국적 미국

요약 미국 육군에서 활약한 병리학자·세균학자.

황열병모기에 의해 전염된다는 사실을 입증한 실험을 지휘했다.

워싱턴 D. C.에 있는 월터 리드 병원은 그를 기념하여 이름 붙인 것이다.

그는 감리교 목사인 리무얼 서턴 리드와 그의 첫번째 부인인 파라바 화이트 사이의 다섯 자녀 가운데 막내로 태어났다. 1866년 그의 가족은 샬러츠빌로 이사를 했는데 그곳 버지니아대학교에서 고전학을 공부하기로 작정했다. 그뒤 같은 대학교의 의과대학으로 편입하여 9개월 만에 과정을 수료, 1869년 여름 18세의 나이로 의학사학위를 받고 졸업했다.

임상 경험을 더 늘리기 위해 뉴욕의 벨레뷰의과대학에 입학하여 1년 뒤 2번째 의학사학위를 받았다. 그뒤 몇몇 병원에서 인턴으로 일하기도 했고 뉴욕에서 지방 의사로도 활동했다. 그는 개업을 포기하고 군대를 택하여 1875년 2월 군의관 자격시험에 합격하여 육군중위로 임관했다.

1876년 4월 에밀리 로렌스와 결혼을 한 뒤 애리조나 주의 포트로얼로 임지를 옮기고 부인과 살림을 합쳤다.

다음 18년 동안 수비대에 근무하면서 거의 해마다 임지를 옮겼는데 가끔은 전방으로 나가기도 하였다. 그의 편지에는 변경지방 생활의 어려움이 생생히 묘사되어 있다. 1889년 수행 군의관 겸 볼티모어 지역군 신체검사관으로 임명되었고 동시에 존스 홉킨스 병원에서 일할 수 있는 허락을 받아 그곳에서 병리학과 세균학 과정을 이수했다. 1893년 워싱턴에 있는 육군 의학박물관의 관리관 겸 육군 의학교의 세균학 및 임상현미경학 교수로 임명되었다.

1898년 미국-스페인 전쟁 동안 군대 병영에 만연한 장티푸스를 조사하기 위한 위원회의 책임자로 임명되었다. 위원회의 보고서(1904년까지는 공개되지 않았음)는 장티푸스에 관한 새로운 사실들을 밝히고 있다. 1899년 위원회의 작업이 다 끝나자 곧 워싱턴의 원래 자리로 되돌아왔다. 그 즉시 황열병 문제에 관여하게 되었으며 그 일을 통해 역학 분야에서 뛰어난 연구 업적을 쌓게 되었다.

거의 19세기 내내 황열병이 어떤 매개물들을 통해 전파된다고 생각해왔다.

즉 황열병 환자가 사용한 침대보나 의복 등을 통해 그 병이 전파된다는 것이었다. 1898년까지도 미국의 공식보고서는 그러한 매개물을 통해 황열병이 퍼진다고 보고하고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 황열병이 다른 방법으로 전파될 수도 있다는 생각도 있었다. 즉 1881년 쿠바의 의사이며 역학자인 카를로스 후안 핀라이는 곤충매개설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그뒤 몇 해에 걸쳐서 핀라이는 자신의 이론을 주장하고 발전시켰지만 그것을 입증할 수가 없었다. 1896년 이탈리아의 세균학자인 주제페 사나렐리는 자신의 황열병 환자에게서 병원체를 분리했다고 주장했는데, 그는 그것을 바실루스 익테로이데스라고 명명했다. 당시 미육군은 리드와 역시 군의관이었던 제임스 캐롤에게 사나렐리가 분리했다는 바실루스를 조사할 것을 명령했다. 미육군은 또한 군의관 아리스티데스 아그라몬테를 쿠바로 파견하여 그곳의 황열병 환자들을 조사하도록 했다.

아그라몬테는 황열병 환자의 1/3에서는 물론 다른 병에 걸린 사람들에게서도 사나렐리의 바실루스를 분리했다. 리드와 캐롤은 1899년 4월 첫번째 보고서를 출간했으며 1900년 2월에는 출판을 위해 완성된 보고서를 군당국에 제출했다. 그 보고서에 의하면 사나렐리의 바실루스는 돼지 콜레라 바실루스 그룹에 속하며 황열병에서는 2차 감염 병원체였다.

이 보고서가 실제로 출판되기 전에 아바나에 주둔하고 있던 미군 수비대에서 황열병이 유행되었으며 그에 따라 조사위원회가 구성되었다.

위원장으로는 리드가 선임되었고 그밖에 캐롤, 아그라몬테 그리고 세균학자인 제시 W. 라지어가 위원으로 임명되었다. 1900년 여름, 위원회는 아바나에서 300㎞ 떨어진 막사에서 말라리아로 진단되었던 전염병 유행을 조사했는데, 리드는 그 병이 사실은 황열병이었음을 발견했다. 그곳 감방에 수용되어 있던 죄수 9명 가운데 1명이 황열병에 걸렸는데 나머지 8명은 그 병에 걸리지 않았다.

리드와 나머지 위원들은 그 환자만이 어떤 곤충에 물렸을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에 따라 리드는 위원회의 주된 과업은 중간숙주인 그 곤충의 역할을 밝히는 것이라고 판단했다.

1900년 8월 27일 감염된 모기가 캐롤을 물도록 하는 실험을 했는데 곧 심한 황열병에 걸렸다. 잠시 뒤 레지어에게도 같은 실험을 했는데 그는 황열병에 걸려 죽었다. 1900년 11월 임시 막사를 지어 그곳에서 자원자를 대상으로 통제된 실험을 수행했다. 리드는 황열병이 이집트숲모기(Stegomyia fasciata:지금의 Aedes aegypti)라는 감염된 모기에 물려 발병한다는 사실을 입증했다.

또한 황열병에 걸린 환자에게서 뽑은 혈액을 자원자에게 수혈했을 때도 똑같은 결과가 생긴다는 사실도 밝혔다. 리드는 황열병이 침대보나 의복 등을 통해서 옮겨진다는 증거는 찾지 못했고 감염된 모기에 의해서만 감염된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1901년 2월 쿠바에서는 리드의 발견을 기초로 하여 W. C. 고거스 소령의 지휘로 미군 공병대가 토목사업을 벌였다.

그결과 90일이 지나지 않아 아바나에서는 황열병이 완전히 사라졌다. 리드는 1901년 2월 워싱턴으로 귀환하여 육군 의학교에서 교수생활을 다시 시작했다. 다음해 충수염(맹장염) 수술을 받고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