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아키노 로시니

조아키노 로시니

다른 표기 언어 Gioacchino Rossini
요약 테이블
출생 1792. 2. 29, 교황령 페사로
사망 1868. 11. 13, 파리 근처 파시
국적 이탈리아

요약 조아키노 로시니는 다수의 오페라를 비롯하여 칸타타, 피아노곡, 관현악곡, 실내악곡 등 여러 방면의 작품들을 작곡했으며 특히 <세비야의 이발사>(1816), <신데렐라>(1817), <세미라미데>(1823) 등 희가극이 유명하다. 만년에는 <기욤 텔>(1829) 등 대규모의 오페라를 작곡했다. 부모가 모두 예술인이었던 로시니는 어린시절을 주로 공연장에서 보냈다. 14세 때 볼로냐의 음악협회에 들어갔다. 로시니는 당시 인기를 누리던 장르인 이탈리아의 희가극 오페라 부파에 몰두하여 첫 오페라 부파 <결혼 어음>은 베네치아에서 공연되어 성공을 거두었다. 로마에 초대받은 로시니는 <세비야의 이발사>를 공연하여 유례없는 대성공을 거두었다. 마지막 오페라 〈기욤 텔〉(1829)은 민족주의와 자유라는 고상한 주제와 고상한 음악을 사용한 작품으로 파리 청중들과 파리 평론가들의 호평을 받았다.

목차

접기
  1. 개요
  2. 초기생애
  3. 이탈리아 시대
  4. 파리 시절
로시니(Gioacchino (Antonio) Rossini)
로시니(Gioacchino (Antonio) Rossini)

개요

조아키노 로시니는 특히 〈세비야의 이발사 Il barbiere di Siviglia〉(1816)·〈신데렐라 Cinderella〉(1817)·〈세미라미데 Semiramide〉(1823) 등 희가극이 유명하다.

만년에는 〈기욤 텔 Guillaume Tell〉(1829) 등 대규모의 오페라를 작곡했다.

초기생애

아버지 주세페 로시니는 악대·관현악단 등에서 연주활동을 한 가난한 트럼펫 연주자였고, 어머니 안나 구이다리니는 2류 가수였다.

이런 환경으로 인해 조아키노 로시니는 어린시절을 주로 공연장에서 보냈다. 어린 로시니는 게으른 학생이었지만, 노래와 연극에 재능을 보였다. 14세 때 볼로냐의 음악협회(Liceo Filarmonico:G.B. 마르티니 국립음악원의 전신)에 들어갔고, 몸벨리 가수 가족을 위해 첫 오페라 〈도메트리오와 폴리비오 Dometrio e Polibio〉(1806, 초연 1812)를 작곡했다. 15세 때 바이올린·호른·하프시코드를 배웠고 돈을 벌기 위해 청중 앞에서 노래도 자주 불렀으며, 극장 무대에 서기도 했다.

목소리가 상해서 더이상 노래를 부를 수 없게 되자 처음에는 반주자로, 나중에는 지휘자로 일했다. 조아키노 로시니는 이미 독일 음악 악파의 중요성, 특히 하이든과 모차르트에 의해 풍부하게 된 새로운 음악요소들의 중요성을 깨닫고 있었는데, 음악협회에서 작곡한 초기 칸타타(1808 공연)에 이러한 영향이 보인다. 1808년 이후 20년 동안 게으른 성품에도 불구하고 40편이 넘는 오페라를 작곡했다.

이탈리아 시대

조아키노 로시니가 당시 인기를 누리던 장르인 오페라 부파(opera buffa:이탈리아의 희가극)에 몰두한 것은 처음엔 기질이 맞아서였지만, 얼마 안 가서부터는 청중들의 열렬한 요구 때문이기도 했다.

조아키노 로시니의 첫 오페라 부파 〈결혼 어음 La cambiale di matrimonio〉(1810)은 이례적인 관현악 편성으로 인해 가수들의 역겨움을 사기는 했으나, 베네치아에서 공연되어 성공을 거두었다. 볼로냐로 다시 돌아온 로시니는 일찍이 자신을 많이 도와주었던 몸벨리 가족을 위해 칸타타 〈디도의 죽음 La morte di Didone〉(1811)을 작곡했으며, 2막으로 된 오페라 부파 〈터무니없는 오해 L'equivoca stravagante〉(1811)로 성공을 거두었고, 이듬해에는 베네치아에서 희가극 2곡을 더 작곡했다.

조아키노 로시니는 이미 오페라 부파의 전통적인 형식을 깼다.

선율을 장식하거나(로시니는 이탈리아의 현란한 가창 양식인 벨칸토 창법을 새롭게 재창조했음) 앙상블과 앙상블 피날레(앙상블에 의해 모든 등장인물이 무대에 나와 노래부르는 음악으로, 한 막의 끝에 위치함)에 이례적인 리듬을 사용함으로써 생기를 불어넣었다. 또한 관현악이 원래 맡던 역할을 회복시켜서 음악이 가수를 돕는 것이 아니라 가수가 음악을 돕도록 만들었다. 1812년 오라토리오 〈바빌로니아의 키루스 Ciro in Babilonia〉, 희가극 〈비단 사다리 La scala di seta〉를 작곡했다.

마리에타 마르콜리니는 이전에 로시니 오페라들에서 노래를 부른 적이 있었을 뿐 아니라 이 젊은 작곡가를 눈여겨보던 터에, 1812년 조아키노 로시니를 밀라노의 라 스칼라 극장에 추천해주었다.

조아키노 로시니는 라 스칼라 극장과의 계약으로 〈시금석 La pietra del paragone〉(1812)을 작곡했는데, 이 작품은 피어나기 시작한 그의 천재성을 드러낸 진정한 '시금석'이었다. 이 오페라의 피날레 장면에서 로시니 오페라의 중요한 특징이 되는 크레셴도 효과를 처음 사용했다(이 기법은 이후 작품들에 계속 사용되며, 너무 분별없이 자주 사용했다는 비판을 받기도 함).

이무렵 조아키노 로시니는 7편의 오페라와 몇 편의 칸타타를 작곡했으며, 극장과의 긴밀한 접촉으로 상당한 전문적 지식을 갖췄다.

가수들도 더이상 조아키노 로시니를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고, 창작의 꽃을 본격적으로 피우게 되었다. 첫번째 기회는 이탈리아의 가장 세련된 도시였던 베네치아에서 찾아왔다. 테아트로 산 모이세 극장을 위해 희가극 〈브루스키노 씨 Il signor Bruschino〉(1813)를 작곡한 로시니는 이어서 라 페니체 극장을 위해 첫 정가극 〈탄크레디 Tancredi〉(1813)를 작곡했으며, 18세기의 관습에 젖은 정가극의 개혁을 시도했다.

이 작품은 생생하고 선율이 유려해 곧 성공을 거두었는데, 베네치아 전역에서 작품 속의 유명한 노래 〈Di tanti palpiti〉를 들을 수 있을 정도였다. 이어서 성공을 거둔 〈알제리의 이탈리아 소녀 L'Italiana in Algeri〉(1813)는 오페라 부파의 개혁을 시도한 작품으로 더욱 세련된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 두 성공작들로 조아키노 로시니는 라 스칼라 극장에 들어설 수 있었다. 〈팔미라의 아우렐리아노 Aureliano in Palmira〉(1814)는 성공작은 아니었지만, 아리아의 장식음들을 일일이 기보함으로써 가수에게 자신의 권위를 세우는 데에 성공했다. 〈알제리의 이탈리아 소녀〉 이후 로시니는 밀라노 사람들을 위해 〈이탈리아의 터키인 Il Turco in Italia〉(1814)을 작곡해주었고, 공주 벨조이오소(프랑스의 소설가 스탕달은 그녀를 '아주 호감 가는 후원인'이라 묘사했음)를 위해 칸타타를 1곡 작곡했다.

다음 작품인 〈시지스문도 Sigismundo〉는 실패작이었다.

조아키노 로시니의 명성은 곧 나폴리로 퍼졌다. 이곳에서 활동하던 흥행주 도메니코 바바리아는 찻집의 웨이터로 일하다가 도박장을 운영하고 실제 도박도 하면서 부를 축적해서, 나폴리에서 2개의 커다란 극장을 소유한 대흥행주가 되었다.

바바리아는 조아키노 로시니의 명성이 점차 커져가고 있음을 알고, 볼로냐로 그를 만나러 와서 계약을 권고했다. 비교적 안전하고 1년에 2편의 오페라만 작곡하면 되는 등 계약조건이 워낙 좋았을 뿐 아니라, 당사자 바바리아가 재정이 빈약한 대개의 흥행주가 아닌 백만장자였기 때문에 로시니는 계약을 기꺼이 수락했다. 더군다나 바바리아는 당대에 이름을 날리던 여가수 이사벨라 콜브란을 고용하고 있어서 로시니의 관심을 더욱 끌었다. 그녀가 공연한 로시니의 첫 오페라는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Elisabetta, regina d'Inghilterra〉(1815)로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다.

조아키노 로시니는 콜브란을 아주 숭배했고, 얼마 안 가서 그녀를 사랑하게 되었다.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의 엄청난 성공으로 로시니는 로마에 초대받아 그곳에서 1816년 사육제 시즌을 보내게 되었다. 로마에서 작곡한 첫 오페라에 이어 2번째 오페라 〈알마비바 Almaviva〉도 처음엔 성공적이지 못했다. 이 오페라가 발표되던 당시 로마인들은 이미 동일한 보마르셰의 연극을 가지고 조반니 파이지엘로가 만든 오페라를 아주 좋아하던 상태였고, 로시니의 새로운 작품이 발표되자 반감을 보였다.

그러나 다른 지역에서 〈세비야의 이발사〉로 이름을 바꾸어 공연하면서부터는 유례없는 대성공을 거두었다. 이 오페라는 16일 만에 작곡된 것으로, 천재적인 창조성으로 이후 수많은 오페라 애호가들의 사랑을 받았다. 이어서 발표된 〈신데렐라〉도 〈세비야의 이발사〉와 마찬가지로 여자 주인공 역을 콘트랄토(contralto:여성 최저음역)가 맡았고(이후 소프라노가 대신 부르는 경우도 많음),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다.

이 두 희가극 사이에 작곡된 〈오텔로 Otello〉(1816, 로마)는 셰익스피어의 원작에 붙인 오페라로, 같은 제목의 베르디 오페라가 발표되기 전까지 사랑을 받았다. 〈도둑 까치 La gazza ladra〉(1817)는 어느 정도 진지한 성격의 희가극으로 밀라노에서 성공을 거두었다.

1817년 초연된 〈아르미다 Armida〉는 테너 3중창과 드라마틱 소프라노(콜브란 초연)에 의한 그랑 오페라로, 콜브란에 더불어 테너 마누엘 가르시아, 베이스 필리포 갈리(이탈리아 최고의 아름다운 목소리를 지님), 알토 베네데타 피사로니(기교가 뛰어남) 등 적합한 가수들을 찾는 기회를 얻었다.

이들은 이후 로시니 오페라에 자주 등장하면서, 특히 로시니 특유의 벨칸토 기법을 빛내주었다.

〈호수 위의 여자 La donna del lago〉(월터 스콧 경의 동명시에 바탕을 둠)는 1819년 초연에서는 실패했지만 곧 인기를 얻게 되었다. 조아키노 로시니는 이후 몇 차례의 작품을 성공시킨 후 나폴리를 떠나 콜브란과 결혼하고 곧 함께 빈으로 갔다.

조아키노 로시니가 빈으로 간 것은 베토벤을 만나기 위해서였는데, 〈피델리오 Fidelio〉의 작곡가 베토벤이 처한 경제적 궁핍함에 실망한 그는 다시 베네치아로 돌아와 〈세미라미데 Semiramide〉를 작곡했다. 이 오페라는 로시니의 작품 중 가장 길이가 길고 야심에 찬 이탈리아 시기 로시니의 최고 걸작이었으나, 보수적인 베네치아인들은 이 놀라운 작품의 진가를 알아주지 않았다. 로시니는 조국 이탈리아 사람들을 위해서 다시는 작품을 쓰지 않으리라 결심했고, 아울러 조국을 떠나리라 생각했다.

파리 시절

부유하고 불안정스러울 뿐 아니라 천성적으로 쾌락주의자이던 조아키노 로시니는 여행을 떠나고 싶어했다.

1823년 11월 파리에 도착한 조아키노 로시니는 그곳에서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파리 아카데미 사람들이 진심으로 로시니를 환영했고, 모든 파리 시민들이 그의 환심을 사기 위해 소란을 피웠다. 그해 겨울 로시니는 런던을 방문해서 지휘를 하거나 아내와 듀엣 공연을 하기도 했으며, 조지 4세도 만났다. 로시니가 파리로 오자 나이 든 음악가들은 당황했다. 파리의 음악 출판업자이던 에스퀴디에 형제는 다음과 같은 편지를 썼다.

"로시니는 당시 31세였고, 최고의 명성을 날리고 있었다.

그의 용모는 고상하고 표정이 온화했다. 세밀하고 재빠른 그의 눈길은 무엇이든 꿰뚫는 듯하여, 앞에 있는 사람을 사로잡았다. 웃음은 자비심이 넘쳐흐르면서도 신랄한 구석이 있어서 그의 성격을 잘 나타내주었다. 매부리코의 또렷한 선, 나이에 걸맞지 않게 머리가 벗겨져 튀어나온 넓은 이마, 둥근 얼굴을 둘러싼 새까만 구레나룻, 이 모든 것들이 남성적인 매력을 풍기고 있었다. 그의 손은 아주 멋있게 생겼는데, 셔츠 소맷부리에서 요염하게 내밀고 있었다. 옷은 우아한 차림 대신 간단한 차림을 하여 이제 금방 외지에서 도시로 돌아온 사람 같은 모습이었다."

파리는 당시 서양의 중심이었고 조아키노 로시니도 이를 잘 알고 있었다.

몇몇 오페라들을 무대에 올린 뒤 조아키노 로시니는 샤를 10세의 대관식을 기려 즉흥적으로 칸타타 〈랭스 여행 Il viaggio a Reims〉을 작곡했다. 오랫동안 로시니는 자신의 양식을 고치고 싶어했다. 로시니는 현란한 콜로라투라의 차가운 기교, 인위성 대신 낭송조의 고상한 노래, 진지함, 내적 강도를 원했다. 이를 위해 관현악을 개혁해야 했고, 또 합창을 더 중요하게 다루어야 했으며, 그결과 오페라 〈코린트의 포위 Le Siège de Corinthe〉(1826)가 작곡되었다.

이 오페라는 이전의 〈마오메트 2세 MaomettoⅡ〉의 개정판으로, 당시 인기있던 작곡가 엑토르 베를리오즈에게 찬사를 받았다. 〈마오메트 2세〉 다음에 〈모세와 파라오 Moïse et Pharaon〉(1827)·〈오리 백작 Le Comte Ory〉(1828)이 작곡되었고, 〈오리 백작〉은 프랑스 오페라를 오페라 부파 양식으로 바꾼 것이다.

마지막 오페라 〈기욤 텔〉(1829)은 민족주의와 자유라는 고상한 주제를 가지고 만든 작품으로, 고상한 주제에 맞는 음악을 사용하고 있다.

파리 청중들은 조아키노 로시니에게 커다란 갈채를 보냈으며, 로시니는 이 한 작품으로 파리 평론가들의 요구를 가장 우아한 방법으로 만족시킬 수 있었다. 37세의 로시니는 이후 더이상 극음악을 작곡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한편 〈기욤 텔〉은 파리 오페라 극장의 개관기념 오페라 5곡 중 첫번째 오페라가 될 예정이었으나, 1830년 혁명 뒤 새로운 정부는 로시니와의 계약을 번복시켰다.

조아키노 로시니가 갑자기 음악활동을 그만두게 된 데는 여러 가지 추측만 무성할 뿐 정확한 이유는 밝혀지지 않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타고난 게으른 성품이 원인이라 보고, 또다른 사람들은 조아키노 로시니의 작품에 대한 파리인들의 적대적 태도와 이에 대한 로시니의 서운함이 원인이라 보기도 하며, 또다른 사람들은 오페라 작곡가 자코모 마이어베어가 파리에서 성공을 거두는 데 대한 로시니의 질투심이 원인이라 보기도 한다.

1845년 콜브란이 죽자 1847년 조아키노 로시니는 올랭프 펠리시에르와 재혼했다.

극음악에서 은퇴한 조아키노 로시니는 초년에 열정을 쏟았던 종교음악에 심취하게 되어 〈성모 애가 Stabat Mater〉(1832)·〈작은 장엄미사 Petite messe solennelle〉(1864) 외에 몇 곡의 노래와 피아노 소품을 작곡했다. 이 작품들은 세련된 감각으로 로시니의 명성을 굳히는 데 기여했지만, 로시니는 이 곡들의 출판을 거부했다. 이탈리아에서 몇 년을 지낸 뒤 1855년 다시 파리로 돌아온 로시니는 계속 그곳에서 살았다. 부모는 세상을 떠나고 새로운 아내에게도 전만큼 매력을 못 느낀 로시니는 은퇴한 상태에서도 생계를 꾸릴 정도로 충분히 부자였으므로 사교장에서 몇 마디 재담으로 사람들을 즐겁게 하는 등 인생의 안락을 추구하게 되었다.

조아키노 로시니의 재담은 신랄한 위트와 짙은 농담으로 당시 사교계에서도 아주 유명했다. 파리의 개인 저택과 나중에 와서는 파시의 별장에서 19세기 중반 당대의 수많은 음악가·문인들을 초대하여 대규모 만찬을 베풀곤 했다. 1860년대 독일의 유명한 작곡가 바그너가 그를 방문하여 나눈 대화는 바그너의 수필 〈로시니 회고 Eine Erinnerung an Rossini〉에 기록되어 있다.

오랫동안 조아키노 로시니는 오페라 〈세비야의 이발사〉와 가끔 연주되는 〈기욤 텔〉로 기억될 뿐이었지만, 1950년대 이후 점점 많은 그의 오페라들이 다시 공연되었고, 특히 음악 축제 등에서 청중과 비평가의 사랑을 받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