랑케

랑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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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795. 12. 21, 작센 튀링겐 비에
사망 1886. 5. 23, 베를린
국적 독일

요약 새로운 학문적 방법과 교수법으로 서유럽의 역사서술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1865년 '폰'이란 칭호와 함께 귀족작위를 받았다.
랑케의 역사서술에서 보이는 두드러진 특징은 보편성에 대한 관심과 특정 시기 역사에 관한 연구이다.
1824년에 처녀작 <1494년부터 1514년까지의 라틴족과 게르만족 역사>를 발표했다. 부록으로 덧붙인 논문 <근세역사가들에 대한 비판>에서는 전통에 대한 비평적 분석은 역사가들의 기본임무이며 매우 중요한 작업이라고 밝히고 있다. 이 책이 발표되자마자 학계의 관심을 받아 1825년 베를린대학교 부교수로 초빙되었다. 19세기 후반에는 당대 살아 있는 역사가 가운데 가장 탁월한 역사가로서 최고의 명성을 얻었다. 82세의 고령에는 스스로 자신의 역작이라 말했던 <세계사>(9권, 1881~88)의 집필을 시작하여 젊은 시절 설정했던 과업인 '통사' 쓰는 일을 마무리했다.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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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개요
  2. 교육
  3. 초기연구
  4. 객관성의 추구
  5. 랑케에 대한 평가
레오폴트 폰 랑케(Leopold von Ranke)
레오폴트 폰 랑케(Leopold von Ranke)

개요

새로운 학문적 방법과 교수법(처음으로 역사 세미나 방식을 확립했음)으로 서유럽의 역사서술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역사학). 1865년 '폰'(von)이란 칭호와 함께 귀족작위를 받았다.

교육

그는 루터파 목사와 법률가를 많이 배출한 독실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슐프포르타에 있는 유명한 프로테스탄트 기숙학교를 다닌 뒤 라이프치히대학교에 입학해 신학과 고전을 공부했고, 특히 문헌학과 고전의 번역·해석에 전념했다. 그는 나중에 이런 접근법을 매우 영향력있는 문헌학(文獻學) 및 역사 원전(原典) 비평으로 발전시켰다. 그가 역사를 좋아하게 된 것은 그가 고전작가들에 관해 연구했다는 점, 라이프치히에서 여전히 유행하던 합리주의적 신학에 무관심했다는 점, 역사적 인물로서 루터에 대단한 관심을 가졌다는 점 때문이었다.

그러나 본격적으로 역사를 공부하기로 결심한 것은 1818~25년 중등학교 교사를 지냈던 프랑크푸르트안데어오데르에서였다. 이런 결정을 내리는 데 영향을 준 요인들은 독일 역사에 대한 그 시대의 애국적 열정을 비롯해 독일 낭만주의 시(詩), 역사를 인류발전의 연대기로 여긴 철학자 요한 고트프리트 폰 헤르더, 근대적이고 과학적인 역사연구 방법을 도입한 바르톨트 게오르크 니부어의 로마사, 중세의 역사가들, 월터 스콧 경의 역사소설 등을 꼽을 수 있다.

그러나 그가 역사를 연구하게 된 가장 큰 동기는 종교적인 것이었다. 프리드리히 셸링의 철학에 영향받고 있던 그는 역사에 나타난 신(神)의 행위를 이해하고자 했다(→ 역사철학). 역사가로서 랑케는 신은 어디에나 있으며, '위대한 역사적 사건들의 흐름에서' 스스로를 나타낸다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성직자이자 교사가 된 것이다.

초기연구

랑케의 역사서술에서 보이는 두드러진 특징은 보편성에 대한 관심과 특정 시기 역사에 관한 연구이다.

1824년에 처녀작 〈1494년부터 1514년까지의 라틴족과 게르만족 역사 Geschichte der romanischen und germanischen Völker von 1494 bis 1514〉를 발표했다. 여기서 그는 프랑스와 합스부르크가(家)가 이탈리아를 놓고 벌인 싸움을 새로운 시대의 예고라는 측면에서 다루고 있다. 부록으로 덧붙인 논문 〈근세역사가들에 대한 비판 Zur Kritik neuerer Geschichtsschreiber〉에서는 전통에 대한 비평적 분석은 역사가들의 기본임무이며 매우 중요한 작업이라고 밝히고 있다.

이 책이 발표되자마자 학계의 관심을 불러일으켜 1825년 베를린대학교 부교수로 초빙되었고, 1834년 정교수가 되어 1871년까지 강의했다. 이때 그의 유명한 역사 세미나 시간에 참석했던 많은 학생들이 뒤에 뛰어난 역사가로 성장하여 여러 대학에서 랑케의 연구와 교수방법을 따랐다. 랑케가 그다음 낸 책은 베네치아 대사(大使)들의 아주 중요한 보고서들을 참고하여 쓴 것으로, 지중해에서 오스만 제국과 스페인의 경쟁관계를 다루고 있는 〈16~17세기 남유럽의 영주들과 민중 Fürsten und Völker von Süd-Europa im sechzehnten und siebzehnten Jahrhundert〉이다.

1834~36년에는 오늘날까지도 역사서술의 걸작으로 꼽히고 있는 〈16~17세기의 로마 교황, 그 교회와 국가 Die römischen Päpste, ihre Kirche und ihr Staat im sechzehnten und siebzehnten Jahrhundert〉를 펴냈다(이 책은 나중에 〈지난 4세기 동안의 로마 교황 Die römischen Päpste in den letzen vier Jahrhunderten〉이라는 제목으로 다시 나왔음). 그는 이 책에서 종교적인 당파성을 초월하여 교황을 단지 하나의 교회기구로서가 아니라 세속적 권력으로서 기술하고 있다.

랑케는 이 책이 나오기 전에 잠시 당시의 역사와 정치학에 관심을 가졌다.

그러나 곧 환멸을 느껴 몇몇 짤막한 글을 써서 그의 주요저서에서보다 훨씬 솔직하게 자신의 학문적·정치적 신념을 표현했다. 그는 자신의 참재능을 접어두고서 〈역사·정치지 Historischpolitische Zeitschrift〉라는 잡지를 냈다. 여기에서 그는 1830년 프랑스 7월혁명으로 한층 불붙은 그 시대 정치분쟁에 대해 잘못 판단내려 자유적·민주적 사고를 거부하는 프로이센의 정책을 옹호했다.

이 잡지는 1832~36년에 단 2권이 나왔을 뿐이며 대부분의 기사는 랑케 자신이 쓴 것이었다. 그는 이 잡지를 통해 당시에 일어난 분쟁들을 역사적인 관점, 즉 공정한 관점으로 설명하려 하면서도, 본질적으로는 프랑스의 혁명적 발전이 독일에서 되풀이될 수 없으며 되풀이되어서도 안 된다는 점을 설명하려 했다.

랑케는 역사란 개인·민족·국가가 개별적으로 발전하는 과정에서 진화하는 것이며, 그것들이 함께 문화과정을 만들어나간다고 믿었다. 15세기 이래의 유럽 역사가 하나의 문화적 전통을 가진 여러 민족들이 나름대로 국가에 대한 개념을 자유로이 발전시켜온 과정이라는 사실은 자신의 이론을 확인시켜주는 듯 보였다. 그는 사회와 민족의 질서확립에 추상적이고 보편타당한 원칙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았고 사회적·정치적인 원칙들은 민족성에 따라 달라야 한다고 여겼다.

그에게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독자적 실재(實在)는 국가였다. 국가는 "정신적 실재이자 인간 심성이 독창적으로 만들어낸 것, 아니 오히려 '신의 착상'"이었다. 국가의 본질적 임무는 독립적으로 진화하는 것이며, 그 과정에서 각 시대에 알맞는 제도들을 탄생시키는 것이었다.

이런 측면에서 랑케의 생각은 현실적인 것은 또한 이성적인 것이라는 철학자 G.W.F. 헤겔의 논리와 부합된다.

그러나 랑케의 관점에서는 현실적인 것을 판가름하는 것은 이성이 아니라 역사적 연속성이었다. 이 연속성은 문화발전의 필요조건인 동시에 역사적 실재를 이해하는 필요조건이다. 그러므로 역사는 각각의 사건을 결정하지만 정당화하지는 않는다는 '역사주의'(historicism)의 본질을 이해하는 것이 역사가의 임무이다. 그러나 랑케는 현실적으로 그 시대의 정치·사회 질서, 즉 유럽의 국가체제 및 수많은 군주들이 있는 독일연방을 비롯해 강력한 군주제·관료제와 고도로 발달한 교육제도를 가지고 있으며 자유와 민주의 흐름을 거부하던 1848년 혁명 이전의 프로이센을 옹호했다.

그는 당시의 정치·사회 질서가 유럽의 문화적 과정의 일부이며 이제 민주혁명에 의해 무너질 위험에 처해 있다고 생각했다.

객관성의 추구

랑케는 아무도 만족시키지 못했다.

자유주의자들에게는 지나치게 국가에 충성하는 것으로 보였고, 보수주의자들에게는 독단적이지 못한 것으로 여겨졌다. 그렇게 되자 랑케는 이제 역사서술 작업으로 돌아왔고 이 일을 하면서 객관성이라는 자신의 이상을 더욱 성공적으로 이룰 수 있으리라 믿었다. 1839~47년에 종교개혁 시기를 최초로 학술적으로 다룬 〈종교개혁 시대의 독일사 Deutsche Geschichte im Zeitalter der Reformation〉(1845~47 영역)를 펴냈다. 이어서 1847~48년 〈프로이센 역사 9권 Neun Büuher preussischer Geschichte〉(나중에 12권으로 보완)을 썼다.

1852~61년 〈16~17세기 프랑스사 Französische Geschichte, vornehmlich im sechzehnten und siebzehnten Jahrhundert〉, 1869년에는 〈16~17세기 영국사 Englische Geschichte, vornehmlich im sechzehnten und siebzehnten Jahrhundert〉가 나왔다. 이 〈프랑스사〉·〈영국사〉는 나중의 연구에 비추어 뒤떨어진 면이 있으나 기술방법이 뛰어나 오늘날에도 읽을 만한 가치가 있다.

이 책에서 랑케는 유럽 체제 안에서 결정적인 발전단계에 있던 유럽의 주도적 국가들을 다루고 있다. 그는 문화발전의 주역으로서 라틴족과 게르만족만을 꼽고 16세기부터는 그들 민족이 이룬 국가 가운데 프로테스탄트 국가들이 점차로 지도력을 확보해왔다고 보고 있다. 그리고 주로 국가 사이의 외교관계와 통치 및 행정제도 같은 정치사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왜냐하면 그가 사용한 자료에는 경제적·사회적 요소는 조금밖에 드러나 있지 않으며, 하나의 '세력'이나 '경향'으로서 역사의 뒷면에서만 어렴풋하게 나타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랑케는 이제 막 사회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한 당시의 시대를 이해하기가 점점 어려워진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18세기말과 19세기초를 다룬 저서 〈독일 권력과 군주동맹 Die deutschen Mächte und der Fürstenbund〉(1871~72)·〈1791년과 1792년 혁명 전쟁의 기원과 시작 Ursprung und Beginn der Revolutionskriege 1791 und 1792〉(1875)·〈하르덴베르크와 1793~1813년의 프로이센 정치사 Hardenberg und die Geschichte des preussischen Staates von 1793 bis 1813〉(1877) 등은 복잡한 정치사건을 자세히 다루고 있으나 전환기의 주요문제에 관해서는 간접적으로 이야기하고 있을 뿐이다.

이 책들은 〈영국사〉에서처럼 정치와 사회변화, 특히 급진적 운동의 등장에 대해 어떤 편견을 보여주고 있다. 그는 강의시간에도 종종 당시의 역사를 다루었으나 개념이나 강조점은 책에서 다룬 것과 그리 다르지 않았다. 그는 역사란 '역사적 삶'의 복잡한 과정이며 이 역사적 삶은 위대한 국가와 그들 국가가 체험한 긴장상태에서 가장 인상적이고 진정한 정신적 형태를 취한다고 했다. 또한 역사가는 본질을 추출하면서도 전체를 염두에 두고서, 가능한 한 객관적으로 '있는 그대로'를 기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랑케는 분석가라기보다는 '눈으로 보는' 역사서술가였다. 그는 모든 역사가들이 시간·장소의 제약을 받는다는 점을 인정하고, 자신을 어떤 '당파'가 아닌 국가 자체와 동일시함으로써 최대한의 객관성을 얻으려 애썼다. 그러나 그의 저서들은 그의 지적 신조가 자신의 정치적 견해에 영향을 끼쳤음을 보여주고 있다.

랑케는 19세기 후반에 접어들어 당대 살아 있는 역사가 가운데 가장 탁월한 역사가로서 최고의 명성을 얻었다. 1865년 귀족이 되었으며 1882년 추밀원(樞密院) 의원이 되었다.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가 정신병 증세를 보이기 시작한 1857년에 랑케는 마침내 정치에서 손을 뗐고 1871년 아내가 죽은 뒤에는 사회생활에서도 물러났다.

비록 자유민주적 민족주의를 거부했고, 독일 역사의 연속성을 위협하고 민중운동과 협력한다는 이유로 오토 폰 비스마르크 총리의 정책을 불신했지만 1871년 독일제국의 성립은 환영했다.

한편 그는 시력이 나빠져 조수에게 의지해야 하는 고독한 학자로 변해갔다. 그러나 이런 결점을 극복하고 82세의 고령에, 스스로 자신의 가장 위대한 작품이라 말한 〈세계사 Weltgeschichte〉(9권, 1881~88)를 집필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랑케는 젊은 시절 설정했던 과업, 즉 '통사'(通史)를 쓰는 일을 마무리지었다. 15세기까지의 역사를 다룬 이 책은 비평적 연구서도 아니고 역사적·철학적인 고찰을 담고 있지도 않다. 이 책은 그리스부터 라틴-게르만 민족에 이르는 문화의 진보를 광범위하게 설명한 것으로, 유럽 이외의 세계는 부분적으로만 다룬, 사실상 유럽사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이 책에서 평화로운 문화적 진보는 분명 혁명의 위협에서 보호될 것이며 민중의 주권과 군주제 사이의 갈등은 결국 군주제의 승리로 끝났다는 확신을 보여주었다.

랑케에 대한 평가

랑케의 역사관과 역사저술은 제1차 세계대전과 그뒤까지 독일 역사서술을 지배했고, 독일에서 공부한 많은 저명한 외국 역사가들에게도 영향을 주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랑케의 제자들 중 많은 사람들은 랑케의 개념에 의미를 부여한 견해의 보편성은 간과하고 그것들이 가진 모든 한계점만을 이어받고 신성시함으로써 그의 개념들이 가진 가치를 깎아내렸다. 그렇지만 랑케 자신의 업적은 여전히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는 역사서술의 발전에 지대한 공을 세웠다. 그의 역사서술은 방법에 있어 옳다는 것이 시간이 갈수록 더욱 인정되고 있으며, 세계를 역사적으로 이해하려는 광범위한 요구(역사주의)를 과학적 탐구에 기반을 둔 과거해석으로 전환할 수 있음을 증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