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트

라이트

다른 표기 언어 Frank Lloyd Wright
요약 테이블
출생 1867. 6. 8, 미국 위스콘신 리클랜드센터
사망 1959. 4. 9, 애리조나 피닉스
국적 미국

요약 미국 건축에서 창조성을 가장 풍부하게 발휘한 천재로, 라이트의 ‘프레리 양식’은 20세기 주택설계의 기본이 되었다. 건축설계사무소에서 일하다가 1893년 시카고에 개인 사무실을 연 라이트는 새롭고 고유한 미국 중서부 건축을 연구했다. 이러한 생각을 가진 건축가들이 늘어나면서 이 흐름은 프레리 학파로 알려지게 되었고, 라이트는 이 흐름을 주도했다.
주요작품으로는 버팔로의 라킨빌딩, 펜실베이니아 밀런에 있는 주택인 ‘낙수장’, 뉴욕 시의 구겐하임 미술관 등이 있다. 새로운 재료와 기술을 도입, 기능과 아름다움을 고려해 건축, 현대 건축의 선구자적 역할을 했다. 저술가로도 활동한 그는 <자서전>, <유기적 건축>, <미국 건축> 등 많은 글을 썼다.

목차

접기
  1. 개요
  2. 초기생애
  3. 시카고에서 보낸 시절
  4. 유럽과 일본에서
  5. 1920년대와 1930년대
  6. 세계적 성공과 갈채
라이트(Frank Lloyd Wright)
라이트(Frank Lloyd Wright)

개요

미국 건축에서 창조성을 가장 풍부하게 발휘한 천재로, 그의 '프레리 양식'은 20세기 주택설계의 기본이 되었다.

주요작품으로는 버팔로의 라킨빌딩(1904), 펜실베이니아 밀런에 있는 주택인 '낙수장'(1936), 뉴욕 시의 구겐하임 미술관(1943 설계) 등이 있다. 저술가로도 활동한 그는 〈자서전 An Autobiography〉(1932, 개정판 1943)·〈유기적 건축 An Organic Architecture〉(1939)·〈미국 건축 An American Architecture〉(1955)·〈서약 A Testament〉(1957) 등 많은 글을 썼다.

초기생애

라이트는 〈자서전〉에서 자신의 어린시절은 정상적인 환경이 아니었다고 술회한다.

어머니 애나 로이드 존스는 웨일스에서 태어나 위스콘신 주 스프링그린 근처의 농장에서 자랐다. 교사였던 그녀는 24세 때 코네티컷 주 하트퍼드 출신의 윌리엄 C. 라이트라는 41세의 떠돌이 악사, 전도사인 홀아비와 결혼했다. 라이트 부부는 1869년 어린 아들인 프랭크 로이드와 함께 아이오와 주로 이사했고 그해 첫 딸을 낳았다. 2년 뒤 그들은 로드아일랜드로 가서 2년을 살았고 다시 매사추세츠의 웨이머스로 옮겨 4년 가까이 살면서 둘째 딸을 낳았다. 윌리엄 라이트는 가는 곳마다 사람들과 잘 지냈지만 안정된 생계를 꾸리는 일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1878년 가족은 외가의 농장으로 돌아왔고 어린 프랭크는 외삼촌들에게 열심히, 그리고 오랫동안 계속해서 일하는 자세를 배웠다.

1879년 부모가 근처에 있는 매디슨으로 이사한 뒤에도 그는 여름마다 농장에 돌아와 곡식과 가축들을 돌보았다. 그때문인지 나중에 그는 "흙 그 자체의 신선함 …… 인생에서 본질적인 그 무엇"이라고 예찬하기도 했다. 이 경험은 그에게 바흐나 베토벤의 음악, 건축이론가인 존 러스킨의 건축개념을 접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그에게 또하나의 중요한 경험은 9세 때인 1876년 그의 어머니가 필라델피아 100주년 박람회에서 보고 구해다준 독일의 교육개혁가 프리드리히 프뢰벨의 유치원 '장난감 나무토막들'을 가지고 놀았던 것이다.

나중에 그는 매디슨에서 한 친구와 함께 지하실을 빌어 인쇄소를 운영하면서 재료를 결합하거나, 범위 안에서 짜맞추기, 도안의 한 부분인 빈칸을 치수에 맞추는 일들을 배웠는데 이 모든 능력은 그가 선택하게 될, 3차원을 다루는 건축에 필요한 것이었다.

그의 나이 18세도 채 안 되었을 때 부모가 이혼했다. 그결과 그는 전문적 훈련을 받고 더 많은 사람들과 교류해야 할 나이에 무거운 짐을 떠맡게 되었다. 1885~86년 2학기 동안 특별학생으로 매디슨의 위스콘신대학교에 다녔는데, 건축과정이 없었기 때문에 공학과정을 밟으면서 문학과 어학 강의를 들었다.

가족들의 생계비에 보태기 위해 공과대학장의 일을 거들기도 했으나 그를 둘러싼 진부한 건축도, 그가 처한 상황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는 유례없는 구조적 독창성을 지닌 거대한 건물들이 세워지고 있는 시카고로 가고 싶어했다. 또한 시카고에는 유니테리언파(派)의 유명한 전도사인 외삼촌 젠킨 로이드 존스가 살고 있었다.

시카고에서 보낸 시절

라이트는 1887년초 외삼촌과 어머니의 충고를 뿌리치고 매디슨을 떠나 시카고로 향했다.

그곳에서 J. L. 실즈비의 건축 설계사무소에서 건축 상세도(詳細圖)를 그리는 일자리를 얻었고 스케치를 훌륭하게 잘하는 실즈비에게서 영감을 얻어 유연한 선(線)과 강조점을 능숙하게 표현할 수 있었다. 그는 야망에 불타고 있었으며 한편으로는 매디슨을 떠나 그와 합류한 어머니와 누이들의 살림을 도와주고 싶어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애들러-설리번 건축설계사무소'에서 더욱 보람있는 일자리를 얻었다.

당시 이 사무소는 근대건축의 지표가 된 인상적인 오디토리움 블럭을 건립하는 중이었다. 라이트는 곧 루이스 설리번의 수석 보조원이 되었고, 1889년 6월 캐서린 토빈과 결혼했다. 고용주에게 돈을 빌려 일리노이 주 오크파크 근교의 작은 택지를 사들인 뒤 한쪽 끝에 어머니와 누이 동생이 살 작은 집을 지었다.

대부분 상업용 건물을 설계하는 사무실에서 그는 주로 주택설계를 맡았기 때문에 자신이 살 쾌적하고 수수한 집을 세우는 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이 새로운 일을 위해 집에서도 많은 시간 일했고 이런 버릇으로 자기만의 개인고객을 상대하기 시작했다. 이때문에 설리번과의 사이에 위기가 닥쳤다. 설리번이 마음이 상해 어떤 변명도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이다. 1893년 라이트는 시카고에 사무실을 열었다. 그는 낮시간에는 사무실에 있었지만 거의 집에서 도면작업을 했다.

그의 사무실이 10명의 보조원을 고용할 정도로 성장하는 동안 그의 집도 6명의 아이들이 지낼 수 있을 만큼 증축되었다.

새 사무실에서 처음 맡았던 일은 W. H. 윈슬로 저택으로, 당시 시카고에서 가장 영향력 있던 건축가 다니엘 버넘의 주목을 끌 정도로 능숙함을 발휘한 놀라운 작품이었다. 버넘은 라이트를 자기 회사의 수석 설계사로 만들기 위해 유럽에 유학가기를 원한다면 몇 년 간 라이트와 가족을 재정적으로 돌봐주겠다고 제의했다.

이것은 대단한 기회였으나 라이트는 이 제의를 거절했다. 어렵게 이런 결정을 내린 뒤, 그는 새롭고 고유한 미국 중서부 건축을 연구하려는 결심을 더욱 굳게 다졌다.

같은 생각을 가진 젊은 건축가들이 늘어나면서 이 흐름은 프레리 학파(Prairie school)로 알려지게 되었다. 1900년 무렵 프레리 건축은 점차 성숙해졌는데, 주로 혼자 힘으로 연구한 33세의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가 이 흐름을 주도했다.

프레리 학파는 현대적 주택건설에 급진적으로 접근함으로써 곧 널리 인정받았다. 이들은 대부분 상업건물용으로 개발된 대량생산 자재와 장비를 사용하여 복잡한 구획과 상세부 처리를 폐기하여 두껍고 널찍한 벽체, 여유있는 거실공간으로 대체하고 광택있는 공간 밑에 난방장치를 설치했다. 돈을 적게 들이고도 안락하고 편리하며 넓은 공간을 누릴 수 있는 집을 짓게 되었고 1900~10년에는 라이트 혼자서 50여 채의 프레리 주택을 지었다. 라이트는 여러 번 강연을 했고, 1901년에는 그의 가장 유명한 강연 〈기계의 예술과 공예 The Art and Craft of the Machine〉를 책으로 펴냈다.

그의 작품은 1894~1902년에 걸쳐 지방을 돌며 전시되었다. 1902년에는 프레리 학파의 첫번째 걸작인 W. W. 윌리체스 주택을 지었고, 1905년 일본을 여행했다.

이무렵 그는 아파트, 집단주거, 레크리에이션 센터까지 작업의 범위를 넓혀갔다.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사무실 건물과 교회이다. 1904년 버팔로의 우편주문회사인 라킨회사 사옥을 완공했다. 이 건물은 철로에 인접해 있기 때문에 내화(耐火) 재료를 써서 밀폐시켰으며, 여과식으로 조절되는 기계식 환기장치와 금속으로된 책상, 의자, 보관함, 넓은 방음표면, 자연광과 인공광으로 조화를 이룬 조명장치를 설치했다.

2년 뒤에는 오크파크의 유니태리언파 교회인 유니티 사원을 지었는데, 이 건물은 1971년 미국의 사적(史跡)으로 등록되었다. 이 작은 예배당과 부속건물은 최소의 예산으로 지어져 시대를 초월한 기념물로 평가된 것이다. 예배당은 도시 소음을 차단하기 위해 안쪽을 향해 배치되어 있으며, 정6면체 공간 내부의 꼭대기 천창(天窓)에서 쏟아지는 자연조명 아래 아늑한 분위기에서 집회를 가질 수 있다.

1904년 라이트는 오크파크에 E. H. 체니 부부를 위한 단층주택을 설계했다.

그러는 가운데 체니의 부인 마마와 라이트는 서로에게 마음이 끌려 1908년에는 결혼하고자 했다. 마마의 남편 체니는 이혼에 동의했지만 라이트의 부인 캐서린은 달가워하지 않고 1년만 기다려 달라고 라이트를 설득했다. 라이트는 아내에게서 마음이 멀어지듯 평소 가졌던 교회에 대한 관심에서, 또 건축운동으로 쌓아온 지위에서 멀어져가는 것을 느끼기 시작했다. 작업은 갈수록 부담스러웠고 심지어는 2건의 중요한 주택설계 의뢰도 이행하지 못했다.

유럽과 일본에서

1909년 라이트는 웨일스의 음유시인의 이름을 따서 붙인 위스콘신 주 스프링그린 근처의 주택인 탤리에신에서 일하기 시작했으나 그해 9월 갑자기 유럽으로 떠났다.

그를 찬양하던 2명, 즉 독일에서 활동하면서 영국의 공예미술운동을 이끌던 C. R. 애슈비와 하버드에서 독일문화를 강의하던 쿠노 프랑케 덕분에 해외에서도 그의 명성이 높았다. 2명을 통해 베를린 바즈무트사의 관심을 끌었고, 이 회사는 그의 작품을 방대한 전문서적으로 출판하겠다고 제의했다.

개인 문제로 상처를 입었던 라이트는 곧 마마와 함께 베를린으로 이주하여 그곳에서 법적인 부부처럼 생활했다. 캐서린의 솔직한 진술은 시카고 신문 지면의 선정적 기사들을 더욱 부채질했을 뿐이다.

해외에서 라이트는 2권의 책을 쓰기 시작했다. 이 책은 모두 독일에서 처음 출간되어 유명해졌는데, 한권은 그가 직접 서문을 실은 초대형 〈건축·설계 도면집 Ausgeführte Bauten und Entwürfe〉(1910)이었고, 다른 하나는 애슈비가 서문을 쓴 것으로 작지만 완전한 사진기록인 〈건축 도면집 Ausgeführte Bauten〉(1911)이었다.

2권 모두 유럽과 일본에서 재판되었으나 미국에서는 몇 년 동안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그는 베를린에 머물고 있는 마마 곁을 떠나 피렌체 교외 피에솔레에 있는 작은 주택에서 지냈다. 테일러 윌리라는 제도사와 큰아들 로이드 라이트와 함께 시카고·오크파크·위스콘신에서 보내온 작품 도면을 다시 그렸고, 수많은 훌륭한 도면들을 작품집으로 출판했다.

때때로 베를린에 가서 출판업자와 상담하거나 마마를 만나기도 했다. 이 작업이 끝나자 제도사는 미국으로 돌아갔고 마마는 이탈리아로 와서 라이트와 휴가를 보냈다. 그런 다음 그들은 다시금 무성한 소문에 싸여 지냈다. 1911년말까지도 라이트가 정식으로 이혼하지 않았기 때문에 결혼하지 못한 채 탤리에신에서 함께 살았다. 라이트는 애버리 쿤리스 같은 훌륭한 고객을 몇 명 만났다. 그는 이미 1908년 시카고 서쪽 근교에 있는 쿤리스의 부지에 프레리 양식으로 걸작을 설계해 준 적이 있었으며, 1911년과 1912년에는 이 주택을 훌륭하게 증축했다(탤리에신 앤드 탤리에신 웨스트). 1912년 보기 드물게 얇은 콘크리트 슬래브를 사용한 마천루를 설계했으나 건축되지는 않았다.

이무렵 일본에서는 일본을 방문한 사람들이 공무를 수행하면서 안락하게 지낼 서구식의 새로운 호텔을 도쿄에 짓기로 하고, 이를 설계할 건축가로 라이트를 지목했다.

그리하여 1913년초 마마와 그는 일본에서 몇 달을 보냈다. 이듬해에는 시카고에서 식당, 클럽, 음악을 연주하는 야외식당을 포함한 복합건물 미드웨이 가든스 설계에 몰두했다. 평면상 대칭을 이루는 이 건물은 추상 또는 추상에 가까운 예술작품과 장식으로 이채를 띠었다. 이 건물은 처음에는 대단한 호평을 받았으나 얼마 후 금주법(禁酒法)이 제정되어 이곳을 드나드는 사람이 급격히 줄어들었다.

미드웨이 가든스가 개장되기 직전 그는 커다란 재앙을 만났다. 탤리에신에 온 마마와 마마의 아이들, 그밖에도 4명이 미치광이에게 살해당하고 집은 불타 폐허로 변해버린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이 비극적인 일로 그는 충격을 받았으나 집을 재건하기 시작했고 곧 조각가 미리엄 노얼과 결합했다. 그녀는 전부터 그를 돕고 싶어했으며 비록 결혼은 하지 않더라도 그와 함께 살고자 했었다. 라이트는 탤리에신 재건, 도쿄 호텔 작업 말고도 조립식 목재를 이용한 구조법을 연구하기 시작했는데, 이 구조법은 몇 채의 주택과 아파트 단지 건설에 사용되었다.

1916년말 그는 미리엄과 일본에 갔고 일본 사람들이 제공한 집에서 5년 넘게 살면서 때때로 미국으로 여행을 다녔다. 임피리얼 호텔은 안락하고 웅장한 공간, 새로운 구조로 지어진 중요한 작품이었으나 엄청난 예산을 들였을 뿐만 아니라 라이트를 혹사시켰다. 그러나 완공된 지 꼭 1년 뒤에 일어난 도쿄 역사상 최악의 지진에도 끄떡없자 모든 노력과 위험, 비용이 헛되지 않았음이 증명되었다.

이 작품이야말로 라이트의 예술에서 최대 걸작이라고 할 수 있다.

1920년대와 1930년대

태평양을 넘나드는 여행을 하던 중 그는 캘리포니아에서 앨런 반즈돌이라는 부유하고 까다로운 고객을 만났다.

이 고객은 1920년경 라이트에게 올리브힐이라 부르는 자기 땅의 정원 한가운데에 주거와 스튜디오를 겸한 건물을 설계하도록 의뢰했다. 이 건물은 현재 할리우드 시립미술관으로 쓰이고 있다. 1923~24년 캘리포니아에 신선한 감각을 주는 무늬를 넣은 콘크리트 블럭 주택 4채를 지었다.

1922년말 마침내 라이트는 캐서린과 이혼했고 이듬해 2월에는 어머니를 여의었다.

그는 미리엄과 관계를 다지려고 그녀와 결혼했으나 그녀는 6개월 뒤 떠나갔다. 1925년 탤리에신은 벼락을 맞아 다시 불타버렸고 라이트는 또다시 그 집을 재건했다. 같은 해 네덜란드의 벤딩겐출판사는 라이트의 새 작품들을 모두 모아 유럽인들의 호평과 루이스 설리번이 생전에 쓴 찬사를 함께 실어 훌륭한 책으로 내놓았다. 1924년말 그는 몬테네그로인인 올기반나 힌젠베르크를 만나 곧 같이 살았고 1928년 결혼했다. 그러나 그의 재정은 파산상태였다.

1926~27년에 귀중한 소장품인 일본판화들을 팔았지만 은행에 저당잡힌 탤리에신을 되찾을 수는 없었다. 더욱이 그의 개인적인 고난과 재정궁핍이 신문 지면에 오르내렸다. 이런 곤경 속에서도 1927~28년 사이 여러 건축논문을 발표했을 뿐 아니라 〈자서전〉을 쓰기 시작했다. 결국 라이트를 찬미하는 몇몇 사람들이 그의 재능과 재산, 빚까지 맡아 회사를 세워서 라이트를 실질적으로 보호해주었다.

1929년 라이트는 뉴욕 시에 콘크리트를 지주로 하는 캔틸레버 구조법을 쓴 스튜디오 탑을 설계했다. 이 계획안은 여러번 변경을 거치면서 아주 훌륭한 계획으로 탈바꿈했다. 이 세인트마크스 타워 계획안은 마침내 1956년 오클라호마 주 바틀즈빌의 프라이스 타워로 실현되었다.

1929년 주가폭락으로 모든 건축활동이 마비되었다.

운좋게도 라이트는 이듬해부터 프린스턴, 시카고, 뉴욕 시에서 강의를 맡았다. 1931년 그는 다음 번에 열릴 시카고 세계박람회에 대비해 분주하게 몇 가지 계획에 착수했지만 아무런 일을 맡지 못했다. 한편 그는 유럽과 미국을 돌며 건축전시회를 열었다. 1932년 〈자서전〉과 처음으로 도시문제를 다룬 책 〈사라져가는 도시 The Disappearing City〉를 출판했으며, 뉴욕 시에 새로 지은 현대미술관에서 열린 중요한 건축전에 참여했다.

또한 그해에 탤리에신에 살면서 작업하던 건축가들과 관련 미술가를 위한 교육 프로그램으로 탤리에신 장학재단을 만들었다. 이들은 탤리에신 건물들 뿐 아니라 직접 짓고 개축한 학교 건물까지 운영했다. 해마다 20~60명의 견습생들이 라이트와 함께 일했으며 몇 명은 수십년간 계속 남아 그의 사무실 간부로 일했다.

그해 겨울 라이트와 동료들은 짐을 꾸려 애리조나로 가서 곧 바로 '탤리에신 웨스트'를 세웠다. 이때 저렴한 비용으로 집을 짓는 효과적인 구조법을 발전시켰고, 여러 해에 걸쳐 이 방법으로 많은 주택을 지었다. 이러한 '유소니언' 주택들은 프레리 주택과는 달리 편평한 지붕이며 난방장치를 한 콘크리트 바닥 기초 위에 마루를 깔았다. 라이트의 걸작 중 몇몇이 이런 구조로 되어 있는데, 매디슨 근처의 위스콘신 주 웨스트멀런드 제이콥스 주택과 미시간 주 오크머스에 있는 윈클러 괴트슈 주택이 이에 해당하는 보기이다.

세계적 성공과 갈채

라이트는 다시금 지도적 건축가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미국 경제가 나아지자 2건의 설계 의뢰가 들어왔고, 그는 웅장한 건물을 설계해 이 기회를 훌륭히 활용했다. 첫번째는 피츠버그 부근의 앨러게니 산맥의 한 산장인 낙수장이다. 1936년부터 지금까지 널리 명성을 누리는 낙수장은 단순하고도 대담하게 폭포 위에 팔처럼 뻗어 있다. 아마 그가 가장 마음에 들어했을 이 작품은 나중에 주 정부에 기증되어 관광객들에게 개방되었다. 2번째는 위스콘신 주 러신에 있는 왁스 공장 주인 S. C. 존슨을 위해 지은 회사 사옥이다.

여기에서 그는 꼭대기에서 빛이 쏟아지며 페쇄된 곡면이 반복되는 천장공간과 원통형 버섯 모양의 기발한 기둥을 결합시켜 자신의 능력을 과시했다. 그결과로 높이 솟은 실내 공간은 근대건축에서 가장 인간미 넘치는 작업실이 되었다.

그뒤로 세계 여러 나라에서 여러 종류의 건축 설계 의뢰가 들어왔다. 10년간 그는 외국 정부와 연구기관으로부터 감사장을 받았고 소련과 영국에 초청받기도 했다. 레이크랜드에 있는 플로리다 서던대학 캠퍼스와 건물을 짓기 시작했고 샌프란시스코의 V. C. 모리스 상회를 완성했다.

실제로 지어진 건물과 시공되지 못한 작품을 통틀어 후기의 많은 설계 중에서 뉴욕 시의 구겐하임 미술관과 샌프란시스코 근처의 마린 군(郡) 청사가 대표적이다.

그는 위대한 창작자였지만 일본 고대건축과 마야 및 지중해 연안의 전통건축에서 자극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그는 미국의 잠재성을 실현시킨 작품들을 통해 외국의 전통 수준에 도달하고 이를 뛰어넘으려 애썼다. 그는 자신을 둘러싼 사회의 변화에 대해 항상 목표를 묻고 그 흐름을 정확하게 측정하면서 반응했으며 "우리 생활수준이 가장 큰 규모라고 해서 마치 가장 높은 생활수준을 누리는 것처럼 으시대고 있다"고 꼬집기도 했다.

1943년에는 "확신을 가지고 여러분께 말한다. 바로 다음 세대는 아닐지라도 그다음 세대들은 그들 자신이 교육받았던 위선(僞善)을 뒤집어 엎을 것이다"라고 썼다. 말년의 그는 자기본위를 정당화시킬 만큼 깊은 인식과 풍부한 건축과 천재성을 지닌 매력있고 기지에 넘치는 논객(論客)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