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발

라발

다른 표기 언어 Pierre Lav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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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883. 6. 28, 프랑스 샤텔동
사망 1945. 10. 15, 파리
국적 프랑스

요약 프랑스의 정치가.

제2차 세계대전 때 비시 프랑스를 이끌어 독일에 협조했으며, 이로 말미암아 반역자로 처형되었다(→ 비시 프랑스).

1903년부터 사회당에 속했던 라발은 1909년 파리에서 변호사가 되었고 곧이어 좌파와 노동조합운동가들을 변호함으로써 명성을 얻었다. 1914년 오베르빌리에에서 하원의원으로 선출되었으며 제1차 세계대전을 종식시키기 위해 평화협상에 임할 것을 촉구했다. 1919년 선거에서 패배한 뒤 이듬해 사회당을 떠났고 1923~44년 오베르빌리에의 시장을 지냈다. 1924년 하원에 복귀했으며 1927년에는 상원에 진출했다. 건설장관(1925)·국무차관(1925)·법무장관(1926)·노동장관(1930) 등을 역임하며 경험을 쌓았고 사회보험법이 양원을 통과할 수 있도록 힘쓴 뒤 1931년에 총리가 되었다.

라발은 취임 초기부터 장관들을 무시하는 거친 행동을 보여 비난을 샀지만 외교분야에서는 역량이 두드러졌다. 1932년 선거에서 패배한 뒤 식민장관으로 있다가 가스통 두메르그(1934) 및 피에르 플랑댕 내각에서 외무장관으로 일했다. 1935년 다시 총리에 취임한 라발은 외무장관직을 겸했다. 유럽의 안정에 주안하여 프랑스-이탈리아 우호관계 확립을 뚜렷한 정책기조로 삼았으나 양국의 관계는 에티오피아 사태(1936)를 계기로 교착상태에 빠졌고 국내적으로는 프랑화(貨)를 평가절하하는 대신 지출을 삭감함으로써 재정위기를 초래했다.

라발 내각은 1936년 선거에서 인민전선이 승리를 거두기 직전 붕괴되었다. 1940년 페탱을 수반으로 하는 비시 정부에 국무장관으로 합류했던 그는, 독일과 유리한 조건으로 협상을 벌이고 궁극적으로 평화조약을 체결하려면 합법적인 정부가 파리에 존속하면서 정전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는 또한 의회의 해산을 설득함으로써 1940년 7월 10일 제3공화정을 해체시켰으며 헌법개정작업도 그의 주도 아래 이루어졌다. 결국에는 독일이 승리할 것으로 믿고서 장차 프랑스가 강력한 역할을 수행하려면 독일에 협조하는 것이 최선의 길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라발은 솔선하여 협상을 시작했는데, 이때문에 동료 장관들로부터 불신을 받게 되었고 1940년 12월 페탱에 의해 해임되었다(→ 프랑스-독일 휴전협정). 1942년 그가 다시 정부 수반으로 복귀했을 때, 프랑스는 더이상 독일의 협조자가 되는 것을 원하지 않고 독립된 국가로서 존속하기 위하여 투쟁하고 있었다.

라발은 프랑스의 선의를 확신시키기 위하여 독일에 노동자를 제공하기로 합의했으며 1942년 6월 독일을 위해 노동자로 자원해줄 것을 종용하는 한 연설에서 자신은 독일의 승리를 열망하고 있다고 발표했다. 그의 의도는 히틀러와의 협상에서 양해와 타협을 이끌어냄으로써 프랑스의 이익을 보호하려는 것이었다. 레지스탕스 운동과 마르셀 데아와 같은 극단적인 대(對) 독일 협조자들의 공격으로 말미암아 라발의 통치력은 약화되어갔다.

독일이 패망한 뒤 스페인으로 피신한 라발은 그곳에서 자신의 변론을 준비하여 1945년 7월 프랑스로 돌아왔다. 반역죄로 재판을 받는 동안, 법정은 적대적이었고 배심원들은 야유를 퍼부었으며 그에 대한 변호는 끊임없이 중단되었다. 음독자살을 시도했으나 미수에 그치고 1945년 10월 15일 처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