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시 프랑스

비시 프랑스

다른 표기 언어 Vichy France

요약 제2차 세계대전이 벌어지고 있던 1940년 7월 프랑스가 나치 독일에 패한 뒤부터 1944년 9월 연합군에 의해 파리가 해방될 때까지 필리프 페탱원수가 통치하던 괴뢰정권(페탱).
공식 명칭은 대체이미지tat FranÇais.

1940년 6월 22일 프랑스·독일의 휴전으로 프랑스는 두 지역으로 나누어져, 일부는 독일군의 점령하에 들어갔고 나머지는 적어도 명목상 완전한 자치지역으로 남겨졌다.

비점령지역은 제네바 근처의 스위스 국경으로부터 투르 동쪽 19㎞ 지점까지와 여기서부터 비스케 만의 남서쪽으로 48㎞ 떨어진 스페인 국경까지로 타결되었는데, 이는 프랑스 남동부의 2/5가량에 해당하는 지역이었다.

휴전조약 당시의 정부요인은 아니었지만 피에르 라발은 협정이 체결된 이튿날로 정부에 합류하여 비시 프랑스의 핵심적인 인물이 되었다. 라발은 1940년 7월 10일 휴전조약 비준을 위하여 비시에 의회를 소집한 후 필리프 페탱 원수에게 새로운 헌법을 공포할 권한을 부여하도록 대의원들을 설득했는데 결과는 찬성 569명, 반대 80명, 기권 18명이었다.

그렇게 해서 페탱은 괴뢰정부에서 완전한 입법적·행정적 권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되었다. 실제로 비시 프랑스는 신헌법의 개정 없이 4년 동안이나 유지되었으며 그들의 정책은 전쟁의 추이에 따라 변경되었다. 독일과의 친밀한 협조체제가 이루어지지 않자 비시 프랑스의 각료들은 1940년 라발을 실각시켰다. 그후 총리직은 짧은 기간 동안 피에르에티엔 플랑댕에 의해, 그 다음에는 장 다를랑 제독에 의해 승계되었다.

당시 샤를 모라스가 비시에서 펴낸 〈악시옹 프랑세즈 L'Action fran이미지aise〉에 따르면 페탱과 다를랑은 대독관계에 있어 기회주의 정책을 편 시기의 인물로 분류된다. 비시 프랑스는 적어도 외면적으로는 일종의 법인형 국가형식을 띠었고 공화주의자들의 '자유·평등·우애'라는 구호가 '노동·가족·조국'으로 대체되었다.

노동헌장이 통과되었으며, 그 과정에서 페탱주의 '국가혁명'에 관한 많은 논의가 있었다.

1942년 4월 라발은 다시 권력을 장악하고 독일인들에게 자신이 보다 적극적인 프랑스의 협력을 제공할 수 있다는 확신을 심어주려고 노력했다. 독일은 마침내 소련·미국과 대대적인 전쟁에 돌입하게 되면서 서부전선의 안전이 더더욱 필요하게 되었다. 그러나 6개월이 지났을 때 비시 프랑스의 토대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미군과 영국군이 북아프리카에 상륙하고 프랑스 함대의 주력부대가 툴롱에서 연합군의 공격을 받아 침몰했던 것이다. 1942년 11월 11일 독일은 프랑스 전역을 점령하고, 비시 프랑스의 '정전군'을 해산시켰다. 그 이후로 비시 프랑스는 페탱에 대한 충성심(여전히 국내와 국외에는 휴전에 찬성하는 많은 프랑스인이 있었음)과 라발의 약삭빠름을 제외한다면 독일과의 관계에 있어 지켜야 할 약속은 하나도 없었다. 비시 프랑스는 점점 독일 정책의 도구로 전락해갔으며 1944년 1월에는 국가사회주의자 마르셀 데아 같은 극단적인 동조자가 생겨났다.

1942년 12월에는 다를랑이 알제리에서 암살되었다. 그러는 동안 많은 젊은이들이 강제노동령을 피해 시골과 구릉지대로 피신하면서 국내의 레지스탕스 운동은 빠른 속도로 힘과 의미를 갖게 되었다. 그들은 지하의 법외자로서 시골 주민들의 도움과 영국으로부터 공수된 보급물자에 의지하여 활동을 강화했으며 영국과 미국의 상륙작전에 대비하여 독일의 통신·수송망을 교란시켰다. 연합군의 상륙작전 개시일보다 6개월 앞서 프랑스에서는 반독 유격대원들과 비시 민병대의 도움을 받는 독일 비밀경찰들 사이에 교전이 벌어졌다.

연합군의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성공한 이후 샤를 드골의 임시정부는 프랑스 본토로 옮겨왔고 거의 완전한 붕괴상태에 있던 파시스트 정권으로부터 통치권을 이양받았다(드골). 1944년 9월 파리가 해방되자 신정부는 페탱의 비시 프랑스와 그에 따르는 모든 법률을 폐지한다고 선언했다.

라발은 독일과 오스트리아 등지로 피신했으나 결국 체포되어 프랑스로 송환되었고 1945년 사형에 처해졌다.

페탱은 독일로 납치되었다가 자진해서 프랑스로 돌아와 재판을 받고 유죄를 선고받았다. 그러나 페탱에 대한 사형판결은 드골 장군에 의해 독방감금형으로 감형되었으며 1951년 감옥에서 죽었다.

비시 프랑스(Vichy France)
비시 프랑스(Vichy Franc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