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메트

라메트

다른 표기 언어 Alexandre (-Theodore-Victor), comte de Lameth
요약 테이블
출생 1760. 10. 28, 프랑스 파리
사망 1829. 3. 18, 파리
국적 프랑스

요약 프랑스의 귀족.

1789년 프랑스 혁명 초기에 입헌군주정치를 주장했다.

그의 형제 샤를, 테오도르와 함께 미국 독립혁명(1775~83) 때 식민지 편에 서서 싸웠으며, 프랑스로 돌아온 뒤 1785년에 기병대 대령이 되었다. 1789년 5월 5일 소집된 삼부회에 귀족 대표로 선출되었으나 6월 25일 이미 혁명적인 국민의회를 선포한 비특권계급인 제3신분회에 가담했다.

그는 국민의회가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1789. 8) 초안을 마련하는 일에 참여했고, 봉건제 폐지와 루이 16세의 절대왕권을 제한하는 조처들을 지지했다. 그해 9월 '3인조'로 불렸던 라메트, 앙투안 바르나브, 아드리엥 뒤포르는 귀족계급이 독자적인 의회를 설립하기 위한 법을 제정하려 하자 이를 저지했다.

그러나 1791년 봄 무렵 이들 3인조는 혁명이 계속되면 군주제와 사유재산제가 위협받으리라 생각하고 비밀리에 그들의 〈로고그라프〉지를 후원하던 왕실의 자문 역할을 했다. 그러나 1791년 6월에 루이 16세가 프랑스를 빠져나가려다 들키자 입헌군주제라는 새로운 정치제도는 불신받기 시작했다. 이렇게 되자 그들은 세력을 모으기 위해 자코뱅 클럽을 탈퇴하고 푀양 클럽을 만들었다. 이 3명은 1791년 10월 1일 소집된 입법의회에 참석할 자격은 없었지만 의회 내의 푀양 클럽 회원들을 조정해 자코뱅 클럽에 맞섰으나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지 못했다.

1792년 4월 오스트리아와 전쟁이 벌어지자 북부군대의 장교가 되었지만 1792년 8월 10일 프랑스 왕정이 무너진 뒤 라파예트 후작과 함께 외국으로 탈출했다. 3년 남짓 오스트리아에 억류되어 있다가 1796년 함부르크에 자리잡았다. 나폴레옹이 프랑스에서 집권한 뒤에는 프랑스로 돌아갔으며(1800), 1802~15년에는 주지사(préfet)로 일했다. 루이 18세와 샤를 10세 때에는 자유주의 야당 의원으로 활동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