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르나브

바르나브

다른 표기 언어 Antoine(-Pierre-Joseph-Marie) Barnave
요약 테이블
출생 1761. 10. 22, 프랑스 그르노블
사망 1793. 11. 29, 파리
국적 프랑스

요약 프랑스 혁명 초기의 유명한 정치가.

뛰어난 웅변술과 예리한 정치감각으로 국민의회 의원으로서는 최고의 존경을 받았다.

상류 부르주아 프로테스탄트 집안 출신으로 법학을 개인교수받았다. 그는 1789년 마지막으로 소집된 삼부회(三部會)에 도피네 의원으로 선출되었고 새로운 국민의회에서 벌어진 논쟁에서 미라보의 맞수로서 곧 명성을 얻었다. 1790년 한해 동안 국민의회의 법령·성명·결의안을 공식화하는 데 활발한 활동을 했고 마침내 국민의회 의장이 되었다. 한편 친구 아드리앙 뒤포르와 알렉상드르 드 라메트와 함께 자코뱅 클럽을 개편했다.

1790년 3월 식민지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었고 서인도제도에서 프랑스의 무역독점을 옹호하는 몇 가지 제안을 입안하면서, 이 조처가 프랑스에 반드시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자크 피에르 브리소를 중심으로 하는 정적들은 그의 정책을 격렬히 공격하고, 반노예제운동이 급진적인 자코뱅 모임에서 호응받게 됨에 따라 그의 영향력은 상당히 줄어들었다. 미라보의 죽음과 1791년 봄 파리 민중들의 폭동이 일어나자 그는 강력한 입헌군주제를 지지하면서 부유한 자산계급을 동원해야 할 위기상황이 왔다고 확신했다.

그해 6월 루이 16세가 프랑스를 탈출하려다 실패하자 그는 당시의 헌법을 받아들이도록 왕을 설득하는 일이 가능하며 이렇게 함으로써 정치적 무정부 상태에 빠지기 전에 혁명을 종결지을 수 있다고 믿었다. 그는 마리 앙투아네트 왕비와 서신왕래를 시작했으나 나중에 이 일로 정적들에게서 공격받았다.

1791년 7월 15일 그는 보수적인 입헌군주제로의 복귀를 주장하고 공화주의가 프랑스의 국익에 부적절한 이념이라 반대하며 혁명과 대격변의 종결을 호소하는 유명한 연설을 했다. 1791년 9월 국민의회가 해산하자 은퇴했으며 명목상 국민방위군 장교였을 뿐 도피네에 있는 집에서 편지를 쓰거나 집필활동을 했다. 그러나 1792년 1월부터 그의 왕정주의는 조목조목 공격받기 시작했다.

그해 8월 29일 마침내 체포당해 그르노블 감옥에 투옥되었고, 11월 3일 파리로 이송되어 재판을 받은(1793. 11. 28) 뒤 곧 처형당했다.

그르노블에 투옥당했을 때 쓴 〈프랑스 혁명 서설 Introduction à la révolution fran이미지aise〉은 대혁명의 중요한 기록으로 평가받고 있다. 사회는 불가피하게 부르주아의 지배를 향해 발전한다는 이른바 사회 발전의 '자연사'를 개괄하고 있는 이 글은 처음으로 프랑스 혁명을 정치사·법제사·사회사의 개괄적 체제로 설정하려는 노력을 보여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