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니얼 디포

대니얼 디포

다른 표기 언어 Daniel Defoe
요약 테이블
출생 1660, 런던
사망 1731. 4. 24, 런던
국적 영국

요약 〈로빈슨 크루소〉(1719~22)와 〈몰 플랜더스〉(1722)로 유명하다. 장로교 목사가 되려고 했다가 결심을 바꾸어 1683년경에 상인이 되었다. 장사를 '사랑스런 일거리'라고 했으며 일생 동안 계속 관심을 가졌다. 많은 상품을 거래하면서 고국과 외국의 많은 곳을 여행하여 예리하고 총명할 뿐 아니라 여러 면에서 시대에 앞선 경제이론가가 되었다. 또한 정치에도 관심을 가졌고, 많은 보고서를 썼으며, 정기간행물을 발행하기도 했다. 대니얼 디포가 명성을 얻게 된 것은 1719년 재능을 소설 쪽으로 돌려 알렉산더 셀커크 등의 여행객이나 부랑아의 회고담들을 부분적으로 취재한 〈로빈슨 크루소〉를 내놓으면서였다. 이 책은 매우 많이 번역·모방·번안되었을 뿐 아니라, 독자가 어떤 식으로든 자신과 동일시하게 되는 주인공과 상황을 창조했다는 점에서 거의 신비한 힘까지 가졌기 때문에, 독일의 한 비평가는 그것을 '세계적인 책'이라고까지 했다. 여기에서는 1722년에 같이 발표한 〈몰 플랜더스〉·〈역병의 해 일지〉·〈잭 대령〉 등의 소설에서와 마찬가지로, 소설가로서의 디포의 가장 훌륭한 재능인 인간의 본성을 꿰뚫는 통찰력이 돋보인다. 건강의 약화에도 불구하고 말년까지 활동적이고 의욕적인 작가로 활동했으며, 주요작으로 꼽히는 소설 〈록사나〉를 1724년 마지막으로 발표했다.

목차

접기
  1. 개요
  2. 초기생애
  3. 장년기와 작품활동
  4. 말년과 후기작품
  5. 디포에 대한 평가
다니엘 데포(Daniel Defoe)
다니엘 데포(Daniel Defoe)

개요

대니얼 디포는 〈로빈슨 크루소 Robinson Crusoe〉(1719~22)와 〈몰 플랜더스 Moll Flanders〉(1722)로 유명하다.

초기생애

아버지 제임스 포는 플랑드르 출신으로 꽤 번창한 수지(獸脂) 양초 제조상(나중에 푸주한이 된 듯함)이었다.

아들 포는 30대 중반에 원래의 성(姓)을 변형한 듯한 '디포'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비국교도였던 아버지는 아들을 옥스퍼드대학교나 케임브리지대학교에 보낼 수 없어서 찰스 모턴(Charles Morton) 경이 운영하는 뉴잉턴그린의 유명한 학교에 보냈다. 여기서 디포는 영국 대학에서보다 더 폭넓고 훌륭한 여러 가지 교육을 받았다.

훗날 하버드대학의 첫 부총장이 된 모턴은 훌륭한 선생이었고, 그의 명료하고 단순하며 쉬운 문체는 대니얼 디포의 문체를 형성하는 데 도움을 준 듯하다. 이밖에도 디포는 성경과 버니언의 작품, 당시의 웅변적인 설교의 영향도 받았다.

대니얼 디포는 장로교 목사가 되려고 했다가 결심을 바꾸어 1683년경에 상인이 되었다. 장사를 '사랑스런 일거리'(beloved subject)라고 했으며 일생 동안 계속 관심을 가졌다. 많은 상품을 거래하면서 고국과 외국의 많은 곳을 여행하여 예리하고 총명할 뿐 아니라 여러 면에서 시대에 앞선 경제이론가가 되었다.

그러나 여러 가지 불행한 일들이 잇달아 일어났고, 대니얼 디포는 자신에 대해 다음과 같이 쓰기도 했다.

"아무도 운명의 부침(浮沈)을 더 맛보지는 않았으리/나는 13번이나 부자가 되었다가 가난해졌으니."

이 말은 사실이었다.

대니얼 디포는 한때 성공했으나 1692년에 1만 7,000파운드를 잃고 파산했다. 몰락의 이유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한데, 자신도 인정했듯이 디포는 성급한 투기나 계획에 쉽게 빠지는 경향이 있었다. 항상 치밀하지는 못했던 것으로 보이며, 디포는 후에 자신을 가리켜 "자기의 원칙에 위배되는 그러나 부끄럽지 않은 일을 한" 상인라고 말했다. 그러나 파산의 주요원인은 프랑스와의 전쟁 동안 배를 보험계약하여 입은 손해이며, 디포는 1692년에 파산한 19명의 "상인 보험업자" 가운데 1명이었다. 이 일에서 디포는 신중하지는 못했지만 부도덕한 사람은 아니어서 10년 내에 채권자들에게 5,000파운드에 달하는 빚을 갚았다.

틸베리 근처에서 번성하던 벽돌과 타일 사업도 정치적인 문제로 투옥된 동안 실패하여 1703년 큰 손해를 보았고, 그뒤로는 사업에 적극적으로 뛰어들지 않았다. 1684년 사업을 시작한 직후에 부유한 비국교도 상인의 딸 메리 터플리와 결혼했다. 그녀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 없고 대니얼 디포도 글 속에서 거의 언급하지 않았지만, 충실하고 수완이 있으며 헌신적인 아내였던 것 같다. 8명의 아이를 낳았는데 6명만 장성했으며, 디포가 죽은 것은 결혼한 지 47년 만이었다.

장년기와 작품활동

장사에 대한 대니얼 디포의 관심은 정치로 이어졌다.

1683년 많은 정치적 팜플렛을 처음 선보였으며 그뒤로 팜플렛을 썼다. 로마 가톨릭교도인 제임스 2세가 1685년 왕위에 올랐을 때, 성미가 급한 대니얼 디포는 확고한 비국교도로서 몬머스 공작의 반란에 가담했다가 세지무어 전투에서 참패한 뒤 간신히 피신했다. 3년 뒤 제임스가 프랑스로 도망간 뒤, 디포는 오렌지 공(公) 윌리엄의 군대를 환영하러 달려나가 "영화롭고, 위대하며, 선하고, 친애하신 윌리엄"이라고 찬양했다.

윌리엄의 재위 때 그를 충성스럽게 떠받들면서 왕 편에 선 대표적인 팜플렛 작가가 되었다. 1701년 '외국인' 왕에 대한 공격에 답하여 힘있고 재치있는 시 〈순종(純種) 영국인 The True-Born Englishman〉을 내놓았는데, 매우 큰 인기를 얻었으며, 오늘날까지도 읽을 만한 작품으로 인종(민족)차별적 편견의 폭로라는 견지에서 여전히 시사성을 갖는다.

대니얼 디포는 외국의 정치에도 관심을 가졌다.

레이스베이크 조약(1697)이 체결된 뒤에 자식이 없는 스페인 왕이 죽자 실제로 세계 전쟁이 일어날 가능성이 커졌다. 1701년 켄트 출신의 젠트리 5명이 하원(당시는 토리당이 지배)에 전쟁에 대한 대비를 주장하는 청원서를 냈다가 불법으로 투옥되었다. 다음날 아침 대니얼 디포는 16명 가량의 지체높은 젠트리의 보호를 받으면서 하원 대변인 로버트 할리에게 '다수(多數)의 건의서'(Legion's Memorial)를 제출했는데, 여기에서는 "영국 국민들은 왕의 노예도, 의회의 노예도 아니다"는 점을 하원에 명백하게 밝혔다.

이 글이 효과가 있어 켄트 출신 젠트리들은 석방되고 디포는 런던 시민의 환대를 받았다. 이것은 용기있는 행동이었고 대니얼 디포는 이를 두고두고 자랑스러워했다. 그러나 토리당 사람들에게는 제거해야 할 위험인물로 낙인찍혔다.

이무렵 종교와 정치를 구별하기란 어려운 일이지만, 불과 1년 후쯤에 대니얼 디포가 다시 몰락하여 인생의 새로운 단계에 접어들게 된 것은 종교적 문제 때문이었다. 비국교도와 저교회파(低敎會派 Low Church)는 주로 휘그당원이었는데, 야심이 많은 고교회파(高敎會派 High Church) 토리당원들은 이들 휘그당의 동맹을 약화시키기 위해 '특별한 경우의 국교 신봉'(비국교도들이 경우에 따라 국교에서 시행하는 성례를 받아들임으로써 공직 수행 자격을 얻는)을 금지하고자 했다.

토리당원들이 권력을 잡자 비국교도에 대한 탄압은 더 거세졌고, 헨리 서셰버럴 박사를 비롯해 민중을 선동하는 급진주의자들은 비국교도들에 대해 맹렬한 공격을 했다. 대니얼 디포는 이에 대응해 그의 팜플렛 가운데 가장 유명하고 탁월한 〈비국교도를 없애는 지름길 The Shortest Way with the Dissenters〉(1702)을 썼다.

이 팜플렛에서는 야심이 많은 토리당원들을 공격하기 위해, 그들의 관점을 취하되 주장을 불합리하게 하는 아이러니 기법을 썼다. 이것은 엄청나게 팔렸지만 대니얼 디포 자신에게는 난처한 일이 닥쳤다. 즉 비국교도와 토리당원들은 각기 다른 이유로 이 글을 심각하게 받아들였고, 디포의 글이 교묘한 속임수였음이 폭로되었을 때 몹시 화를 내었다. 디포는 반란을 선동한 혐의로 기소되었다가 1703년 5월에 체포되었다. 디포를 잡으면 현상금을 주겠다는 광고문이 디포라는 인물을 묘사한 글로서 유일하게 남아 있는데, 별로 호의적이지 않은 이 묘사는 그를 무척 화나게 만들었다.

즉 "보통 키에 야윈 편이고, 40세 가량으로 갈색 피부와 흑갈색 머리카락에 가발을 썼으며, 매부리코, 뾰족한 턱, 회색 눈을 가졌고 입 언저리에 큰 사마귀가 있다"는 내용이다. 대니얼 디포는 유죄를 시인한 뒤 법관의 사면재량권에 호소하라는 충고를 받아들였으나, 결국 거친 대우를 받았으며 벌금형 외에도 형틀을 3번이나 쓰는 판결을 받았다. 이러한 박해에는 몇몇 휘그당 지도자들을 배신하도록 강요하려는 정치적인 요인도 있었으나 디포는 굽히지 않았다.

형벌을 두려워했지만 용기를 잃지 않았으며, 형을 앞두고는 과감한 〈형틀 찬가 Hymn To The Pillory〉(1703)를 썼다. 이를 계기로 형틀에는 화환이 걸리고, 사람들은 대니얼 디포의 건강을 위해 건배했으며, 이 시가 길거리에서 팔리는 등 승리감을 맛보게 되었다.

그러나 어쨌든 대니얼 디포는 뉴게이트 감옥에 갇혔고, 수감되어 있는 동안 틸베리의 사업은 실패했다. 식구들에 대한 걱정으로 로버트 할리에게 여러 번 간청한 끝에 팜플렛을 써주고 업무를 돕겠다는 조건으로 마침내 석방되었다.

대니얼 디포는 여기저기를 둘러보고 보고서와 세밀한 조언, 팜플렛을 써주면서 열성을 다해 할리를 도왔다. 특히 1707년에 연합법(Act of Union)이 체결될 때는 할리에게 여론이 어떤지 알려주려고 스코틀랜드를 수차례 방문했다. 이 여행은 20년 뒤에 다른 방면에서 결실을 맺어, 1724~26년에 〈영국 여행 Tour Thro' the whole Island of Great Britain〉이 3권으로 출판되었다.

훌륭하고 유익한 이 책은 앞서 관찰했던 많은 내용을 기초자료로 했다. 그러나 앤 여왕 당시에 대니얼 디포가 이룩한 가장 큰 업적은 정기간행물 〈리뷰 The Review〉의 창간이다. 1704~13년까지 디포는 강력하고 진지하며 수명이 긴 이 잡지를 거의 혼자서 만들었다. 처음에는 주간으로 나왔으나 1705년에는 1주에 3회나 나왔고, 정치적 적들이 여러 가지 구실로 다시 디포를 투옥시키려 한 1713년에도 계속 발행되었다.

실제로 이것은 중요한 정부 기관지가 되었고, 때에 따라 독자적인 입장을 취하기도 했지만 정치노선은 온건한 토리당과 일치했다. 그러나 정치적인 내용 외에도 일반적인 현안과 종교·무역·관습·도덕 등을 논의했으며, 뒤에 나온 리처드 스틸과 조지프 애디슨의 〈태틀러 The Tatler〉·〈스펙테이터 The Spectator〉 등의 평론식 정기 간행물과 신문의 발달에 상당한 영향을 주었다.

말년과 후기작품

조지 1세의 즉위와 함께 토리당은 실각했다.

반면에 기회를 잡은 휘그당은 대니얼 디포의 가치를 인정했기 때문에 그는 정부를 옹호하는 글을 계속 쓰면서 정부편의 기밀 업무를 처리했다. 이무렵에 심한 병에 걸려서 쓰게 된 〈가족의 지도자 The Family Instructor〉(1715)는 디포의 교훈서 중 가장 인기있는 작품이었다. 그러나 지금까지 언급한 작품들을 모두 합친다 하더라도 디포는 문학가로서 불후의 명성을 얻지는 못했을 것이다. 디포가 명성을 얻게 된 것은 1719년 재능을 소설 쪽으로 돌려 알렉산더 셀커크 등의 여행객이나 부랑아의 회고담들을 부분적으로 취재한 〈로빈슨 크루소 Robinson Crusoe〉를 내놓으면서였다.

이 책은 매우 많이 번역·모방·번안되었을 뿐 아니라, 독자가 어떤 식으로든 자신과 동일시하게 되는 주인공과 상황을 창조했다는 점에서 거의 신비한 힘까지 가졌기 때문에, 독일의 한 비평가는 그것을 '세계적인 책'(world-book)이라고까지 했다.

로빈슨 크루소(Robinson Crusoe)
로빈슨 크루소(Robinson Crusoe)

여기에서는 1722년에 같이 발표한 〈몰 플랜더스〉·〈역병의 해 일지 A Journal of the Plague Year〉·〈잭 대령 Colonel Jack〉 등의 소설에서와 마찬가지로, 소설가로서의 대니얼 디포의 가장 훌륭한 재능인 인간의 본성을 꿰뚫는 통찰력이 돋보인다.

작품에 등장하는 남녀는 모두 특별한 상황에 놓이며 어떤 식으로든 외롭다. 이들은 끊임없는 생존경쟁이 벌어지는 인생을 살면서 각기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투쟁하며 모두 어느 정도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있다. 그러나 그들은 평범한 인간으로 대니얼 디포는 항상 1인칭으로 서술하면서 그들의 마음 속으로 들어가 동기를 분석한다. 사실적인 문체와 생생하고 구체적인 묘사 덕분에 소설은 사실로 느껴진다. 세부묘사는 별다른 의도가 없는 것처럼 보이면서도 독특하고 제한된 세계의 재현을 돕는다.

대니얼 디포의 소설의 가장 큰 결함은 구성이 허술하며, 지나치게 도덕적이고 어리숙하다는 점이다. 디포의 작품은 그 영역이 제한되었지만 그 안에서 그는 상당한 능력을 가진 작가이며, 거의 모든 작품에서 보이는 쉽고 직설적인 문체는 독자의 관심을 사로잡는다. 건강의 약화에도 불구하고 말년까지 활동적이고 의욕적인 작가로 활동했으며, 주요작으로 꼽히는 소설 〈록사나 Roxana〉를 1724년 마지막으로 발표했다.

디포에 대한 평가

디포는 다재다능한 인물이었으며 드물게 보는 폭넓고 많은 작품을 쓴 작가로서, 영국 소설과 현대 저널리즘의 아버지로 불린다. 1701년에 나온 정치시 〈순종 영국인〉은 그때까지 영국에서 출판된 시 가운데 가장 많이 팔린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는 많은 점에서 수수께끼 같은 인물이다. 적이 많았기 때문에 "표리부동하고 정직하지 못하며 애매한 행동을 하거나 돈에 팔린다"는 비난도 받았다. 정치적으로는 교대로 토리당과 휘그당 편을 들었던 것이 사실이다.

처음에는 토리당의 첩보원으로 일하다가 뒤에 급진적인 토리당 잡지에 침투하여 논조를 약화시켜 휘그당의 편을 들었다. 그러나 디포는 항상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시킨다고 주장했으며, 그의 입장을 호의적으로 본다면 자신의 주장대로 확고한 중용주의자로서 사람들에게 중간노선을 취하도록 충고하고 지지하며 능숙하게 일을 도와준 것 같다. 격렬한 파벌이 있던 시대에 살면서 글과 행동을 통해 심한 당파와 종교적 분쟁을 완화시키려 했다.

59세에 새로운 방향을 택해 〈로빈슨 크루소〉를 썼고, 그뒤 약 5년 동안 온갖 힘을 다해 소설과 창작물을 썼다. 그러면서 그는 저널리스트로서의 뛰어난 재능과 평생 동안 바쁘게 활동하면서 쌓은 경험을 결합하여 비범하고 생생한 힘을 갖는 작품들을 만들어냈다.

인간과 작가로서 디포를 형성하는 데는 비국교도라는 배경과, 30대 초반부터 빚에서 벗어난 적이 없다는 사실이 매우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영국교회를 신봉하지 않는다는 것은 항상 '국외자'로 취급되며 18세기 문학의 고상한 세계에 소속되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풍자가 조너선 스위프트는 그의 이름조차 생각나지 않는다는 듯 '형틀을 쓴 자'라 불렀으며, 알렉산더 포프는 개인적으로 작가로서의 디포를 칭찬했으면서도 풍자시 〈던시아드 The Dunciad〉에서는 풍자의 대상 중 하나로 삼았다.

불만족한 채권자들이 있었기 때문에 그의 적들이 항상 그를 공격할 무기를 갖고 있었으며, 정치적인 우두머리들은 그가 보호를 원한다는 것을 빌미로 자기편의 노선이 계속 유지되도록 하는 데 이용했다. 디포의 말년은 한 세대 전에 지불되지 않은 것으로 추정되는 채무에 대한 법적 논쟁으로 얼룩졌으며, 그는 채권자들을 피해 숨어 있다가 죽은 듯하다. 뉴게이트 감옥에서 태어난 작중인물 몰 플랜더스는 가난을 '무시무시한 귀신'이라고 말하는데 이것은 그의 작품의 대표적인 주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