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덧널무덤

돌덧널무덤

다른 표기 언어 동의어 석곽묘, 石槨墓

요약 깬돌 또는 모난돌을 사용하거나 깬돌과 판돌을 섞어서 네 벽을 쌓아 만든 무덤.

석곽묘라고도 한다. 이 무덤에는 널길[羨道]이 없으며, 그 속에 주검을 직접 넣는 무덤방[墓室] 양식과 주검을 나무널[木棺]이나 나무덧널[木槨]에 넣은 다음 돌덧널[石槨] 속에 안치하는 경우가 있다. 돌덧널의 평면 모습은 거의가 긴네모꼴이며, 뚜껑으로는 판돌이나 나무를 사용했다. 돌덧널은 선사시대의 무덤에서 아직까지 뚜렷하게 발견된 것은 없으나 바둑판 고인돌이나 구덩식 고인돌의 무덤방에서는 흔히 볼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늦은 청동기시대부터 하나의 독립된 무덤양식으로 나타나기 시작하는데 껴묻거리[副葬品]로 보아 랴오닝[遼寧] 지역에서 발견된 돌덧널무덤과 밀접한 관련성을 갖고 있으며 초기국가 단계를 거쳐 삼국시대에 이르러 널리 만들어졌다.

이른 시기의 돌덧널무덤 유적으로는 대전 괴정동, 아산 남성리, 부여 연화리, 예산 동서리 등을 들 수 있다. 이들 유적은 대부분 금강 유역에 있다는 점이 주목되며 껴묻거리로는 정교하게 만들어진 청동기가 나오고 있어 많은 관심을 끌고 있는데, 청동기 생산과 관련이 있는 사람이 묻힌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삼한시대의 울주 삼광리유적에서는 낮은 구릉지대에 막돌로 쌓아서 만든 구덩식[竪穴式]의 작은 돌덧널이 여러 기(基)씩 모여 있는 상태로 발견되었는데, 이러한 양식의 무덤은 가야시대에 이르면 보다 발전된 형태로 나타난다.

가야에서는 구덩식 돌덧널무덤의 모습이 점차 커지면서 자연스럽게 앞트기식 돌덧널무덤[橫口式石槨墓]으로 변해가는데 낙동강 서쪽의 함안·김해 등에서는 앞의 것이, 동쪽에서는 뒤의 것이 보다 널리 나타나고 있어 무덤에 관한 보수성과 전통성을 이해하는 데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대표적인 고령 지산동 44호 무덤은 둘레돌[護石]로 돌려진 지름 25~27m, 높이 2~6m 되는 봉토 안에 3기의 으뜸덧널[主槨]과 32기의 딸린덧널[副槨]이 발견되어 가야의 역사와 문화를 알 수 있게 해준다(→ 지산동고분군).

삼국시대의 것은 신라의 경주지역에서 두드러지게 발견되었다. 가장 오래된 것은 미추왕릉 지구에서 발견되며 좁은 지역에 여러 기의 무덤이 만들어졌는데 크기는 비교적 작으며(약 2×1×0.6m), 냇돌을 가지고 벽을 쌓은 다음 천장에는 여러 장의 판석을 덮었고 봉토 언저리에는 둘레돌을 돌려 놓았다(→ 미추왕릉지구고분군).

돌덧널무덤
돌덧널무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