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퐁스 도데

알퐁스 도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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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840. 5. 13, 프랑스 님
사망 1897. 12. 16, 파리(?)
국적 프랑스

요약 프랑스의 작가. 주로 프랑스 남부 지방의 인물과 생활을 익살스럽고 정감있게 묘사한 것으로 사람들의 기억에 남아 있다.

도데(Alphonse Daudet)
도데(Alphonse Daudet)

그의 장편소설 〈동생 프로몽과 형 리슬레르 Fromont jeune et Risler aîné〉(1874)는 아카데미 프랑세즈 상을 받았다.

도데는 견직물 제조업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1849년에 아버지는 공장을 팔고 리옹으로 이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리옹에 간 알퐁스는 처음에는 그 습기찬 공기에 불쾌감을 느꼈지만, 곧 엉뚱한 짓과 론 강의 생활에서 위안을 찾았다. 그는 14세 때 처음으로 시와 소설을 썼다.

1857년 아버지의 사업이 망하는 바람에 도데는 대학 진학의 꿈을 버려야 했다. 그는 알레스에 있는 한 학교에서 사환으로 일했는데, 이 불행한 생활은 6개월 만에 결국 해고당하는 것으로 끝났지만, 그의 반(半)자서전적 소설인 〈꼬마 Le Petit Chose〉(1868)에 주제를 제공해주었다. 이 소설은 그때의 경험에 살을 붙이거나 생략하여 재미있게 꾸민 것이다. 1857년말에 그는 형 에르네스트가 있는 파리로 갔다.

그후 도데는 글쓰는 일에 몰두하는 한편 보헤미안 문단과 사교계 문단을 모두 드나들기 시작했다.

젊고 잘생긴 그는 모델인 마리 리외와 관계를 맺고, 유일한 시집인 〈연인들 Les Amoureuses〉(1858)을 리외에게 헌정했다. 그는 리외와 오랫동안 골치아픈 관계를 계속했는데, 이 관계는 훨씬 나중에 〈사포 Sapho〉(1884)라는 반자서전적 소설에 반영되었다. 그는 또한 신문, 특히 〈피가로 Le Figaro〉지에 자주 작품을 기고했다. 1860년에 그는 19세기 프로방스어 문학부흥운동의 지도자 프레데리크 미스트랄을 만나, 남프랑스의 생활에 열중하게 되었다.

남프랑스의 생활은 북부의 윤리적이고 지적인 엄격성과는 반대로 열정적이고 예술적이며 관능적인 것으로 간주되었다. 같은 해 그는 모르니 공작의 비서로 일자리를 얻었다.

그의 건강은 가난과 그리고 결국은 그의 목숨을 앗아간 성병에 서서히 침식당하고 있었다. 도데는 1861년에서 1862년으로 넘어가는 겨울을 알제리에서 보냈다. 이 여행에서 얻은 성과 가운데 하나가 〈사자 사냥꾼 샤파탱 Chapatin le tueur de lions〉(1863)으로, 이 소설의 주인공인 사자 사냥꾼은 도데의 미래의 주인공 타르타랭의 첫번째 스케치라고 할 수 있다.

도데가 처음으로 쓴 희곡 〈마지막 우상 La Dernière Idole〉은 1862년에 파리의 오데옹 극장에서 초연되었고 커다란 반향을 얻었다. 〈방앗간 소식 Lettres de mon moulin〉(1869)에서 그는 1862년말 코르시카에서 보낸 겨울을 회상하고 있다. 1863~65년(모르니 공작이 죽을 때까지)에 겪은 풍부한 사회생활은 그가 〈르 나바브 Le Nabab〉(1877)에서 무자비하게 분석한 자료를 그에게 제공해주었다.

1867년 1월에 그는 재능있는 작가인 쥘리아 알라르와 결혼했는데, 그는 그녀를 깊이 사랑했고, 그녀는 그의 이후 작품에 큰 도움을 주었다. 그들은 레옹과 뤼시앵이라는 두 아들과 에드메라는 딸 하나를 낳았다.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은 그의 2번째 단편집 〈월요일 이야기 Les Contes du lundi〉(1873)를 보아도 알 수 있듯이, 그의 글에 깊은 영향을 주었다. 전쟁 때 도데는 군에 입대했지만, 1871년 파리 코뮌의 공포정치 때 파리를 탈출했다.

그의 〈타라스콩의 타르타랭이 겪은 놀라운 모험 Les Aventures prodigieuses de Tartarin de Tarascon〉(1872)은 별로 호평을 받지 못했지만, 모험을 좋아하는 이 소설의 주인공은 천진함과 허풍스러움을 풍자한 인물로서 유명하다. 〈아를의 여인 L'Arlésienne〉이라는 희곡도 역시 실패했으나 1885년에 재공연되었을 때는 박수갈채를 받았다. 그의 다음 소설인 〈동생 프로몽과 형 리슬레르〉는 아카데미 프랑세즈 상을 받고 성공을 거두었으며, 그후 몇 년 동안(적대적인 비평이 전혀 없지는 않았음) 그는 부귀와 명성을 누렸다.

말년에 도데는 성병이 척수까지 번져 심한 고통을 겪었다.

〈고통 La Doulou〉(1931년까지 출판되지 않았음)은 고통을 연구함으로써 완화하려는 노력을 보여준다. 그는 감탄할 만한 자제심으로 온갖 종류의 책을 써서 파리의 문단과 음악계를 계속 즐겁게 해주었다. 그는 젊은 작가들(예를 들면 마르셀 프루스트)의 친절한 후원자였다. 1895년에 그는 런던과 베네치아를 방문했다. 그리고 2년 뒤에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도데에 대한 평가

심리학적으로 볼 때, 도데는 상충하는 요소들의 통합을 보여준다. 모든 사회계층에서, 그리고 여행하는 과정에서 실제로 겪은 체험은 그가 타고난 재능을 개발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남프랑스 사람이었던 도데는 정념에 대한 이해와 지중해적인 세계관을 결합했고, 인간행동의 세부에 대한 관심을 늦추지 않으면서도 상상의 나래를 마음껏 펼칠 수 있었다.

그는 평생 동안 다른 사람들을 관찰한 내용을 작은 공책들에 기록했고, 이 공책들을 영감의 보고로 이용했다. 소설은 "어떤 역사도 갖지 못할 사람들의 역사"이어야 한다고 그는 주장했다. 그러나 그의 접근 방식은 냉정한 객관성과는 거리가 먼 것으로, 그는 줄곧 감상적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선입관에서 자유로웠던 그는 동료 자연주의자들과는 달리, 세계의 추악한 면에만 관심을 쏟는 소설가들은 세계의 다양성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한다고 믿었다.

그는 겉으로 드러난 세부적인 면에 객관적인 관심을 갖고 있었지만, 그의 글에는 이런 관심과 동시에 유난히 동정심이 많은 인간성과 사물 및 개인의 신비에 대한 외경심도 표현되어 있다. 그의 세계에 있는 모든 것은 내적인 진실성을 갖고 있으며, 그는 물질적 현상을 묘사할 때처럼 충실하게 이 진실성을 재현했다. 나아가, 그는 정념에는 운명의 힘과도 같은 무엇이 있다고 생각했으며, 이러한 생각은 그의 많은 글에서 열매를 맺어 그의 풍자는 동정심으로 부드러워지곤 한다. 이런 점에서 그는 모파상뿐 아니라 영국의 찰스 디킨스와도 유사점을 갖는다.

도데의 작품은 전체적으로 볼 때 하나의 계통을 따라 계속 발전했다기보다는 오히려 다양한 문학적 경향이 서로 동떨어진 삽화들처럼 잇따라 나타난 일련의 과정이었다. 그래도 〈타라스콩의 타르타랭이 겪은 놀라운 모험〉에 나타난 반낭만주의적 풍자는 〈방앗간 소식〉에서는 점묘파나 인상파 화가들과 비슷한 사실주의로 바뀌었고, 이것은 다시 남프랑스의 특성을 조롱한 초기작품을 수정하기 위해 쓴 〈아를의 여인〉의 비극적 색조로 이어졌다. 또한 〈꼬마〉와 〈월요일 이야기〉에는 풍자보다 오히려 동정과 염려가 더 많이 담겨 있다.

도데는 나이가 들수록 인간관계의 갈등에 점점 더 몰두하게 되었다. 〈자크 Jack〉(1876)는 육체적 사랑과 모성애 사이에서 갈등을 겪는 한 여인을 묘사하고 있고, 〈뉘마 루메스탕 Numa Roumestan〉(1881)은 남자와 여자의 북부적 성격과 남부적 성격 사이의 적개심을 묘사하고 있으며, 〈전도사 L'Évangéliste〉(1883)는 종교적 광신과 싸우는 아들의 애정을, 〈작은 교구 La Petite Paroisse〉(1884)는 질투심의 모순을 다루고 있다.

〈사포〉에서 제기하는 도덕적 문제는 자신이 버리고 떠나는 소녀에 대한 동정심과 자유 사이에서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연인의 해묵은 고민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한 세대 전체의 청년들에 대한 도데의 평가가 그 밑바탕을 이루고 있다. 〈아를라탕의 보물 Le Trésor d'Arlatan〉(1897)과 〈삶에 대한 단상 Notes sur la vie〉 및 〈새로운 단상 Nouvelles notes〉은 프로이트보다 앞서서 억압된 잠재 의식을 분석한 대담한 심리학자 도데의 모습을 보여준다.

도데의 걸작에는 서로 대립하는 요소들, 즉 진실과 환상, 무자비한 묘사와 시, 명석한 진지함과 유머 감각, 아이러니와 연민 등 인간의 존엄성을 이루는 요소들이 조화를 이루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