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태우

노태우

다른 표기 언어 동의어 대한민국 제13대 대통령
요약 테이블
출생 1932. 12. 4, 경북 달성
사망 2021. 10. 26, 서울
국적 한국
직업 군인, 정치인, 대한민국 제13대 대통령
용당(龍黨)

요약 대한민국의 제13대 대통령. 1987년 개헌 이후 치러진 첫 대통령 직접선거에서 대통령으로 선출되었으며, 재임기간 북방정책을 펼쳐 중국, 러시아 등 그동안 외교관계가 없던 공산권 국가들과 수교하는 업적을 남겼다. 육군사관학교 생도 시절 전두환·정호용 등과 친분을 맺고, 하나회의 핵심 멤버로 활동했으며, 1979년 전두환과 함께 12·12 군사반란을 주도했다. 전두환 정권에서는 내무부 장관 등을 지냈으며, 퇴임 이후 1997년 비자금 사건과 형법상 내란죄로 징역 17년과 추징금 2,628억원을 선고받았다. 1997년 특별 사면되었고, 추징금은 2013년에 완납되었다. 오랫동안 지병으로 투병 생활을 했으며 2021년 10월 26일 타계했다.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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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정의
  2. 초기 생애
    1. 12·12 군사반란
  3. 정계 진출
  4. 6·29 선언
  5. 대통령 직선 개헌
  6. 제13대 대통령 당선
  7. 대통령 재임 시기
    1. 5공 청문회
    2. 북방정책
    3. 남북 유엔 동시 가입
    4. 공안정국 조성
    5. 3당 합당
    6. 보안사 민간인 사찰 기록 공개
    7. 범죄와의 전쟁
    8. 분신정국
    9. 민자당 탈당
  8. 퇴임과 말년
    1. 5·18 특별법 제정과 비자금 사건

정의

대한민국의 제13대 대통령. 군인, 정치가. 호는 용당(龍黨)이다.

노태우
노태우

초기 생애

노태우는 1932년 12월 4일 경상북도 달성군 공산면 신용리에서 공산면사무소 면서기를 지낸 아버지 노병수와 어머니 김태향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 노병수는 노태우의 8살때 교통사고로 사망해, 가계는 가난했다. 노태우는 숙부 노병삼의 도움으로 학업을 이어갔다.

노태우는 1939년 3월 대구 공산소학교에 입학했다. 집에서 6킬로나 떨어진 학교까지 걸어서 다녔다고 한다. 공산소학교를 졸업한 후 숙부의 도움으로 대구공업중학교와 경북고등보통학교에 진학해 의사의 꿈을 키웠다. 그러나 고등학교 3학년 때 한국전쟁이 발발하여 학도병으로 참전하게됐다. 학도병으로 있던 중 대구의 헌병학교에 입학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면서 육군사관학교에 편입해 정규 육사 1기생이 됐다.

사관생도 시절에 전두환, 정호용 등과 친분을 맺었으며 럭비부에서 선수로 활동했다. 노태우는 1955년 육사를 졸업하고 소대장으로 임관한 뒤 이듬해 봄에 육군 제5보병사단 소대장으로 발령받았다. 이때 보병사단의 사단장이 박정희였다. 박정희는 정규 육사 출신인 노태우를 각별하게 대했고 점심에 초대하거나 함께 오리사냥을 가자고 제의하기도 했다.

노태우는 육군 중위 재직중 친구인 김복동 중위의 본가를 자주 출입하다 김복동의 동생 김옥숙을 만났다. 1959년 5월 31일 노태우는 김옥숙과 결혼했다. 같은해 전두환 등 여타 장교들과 함께 6개월동안 미국 노스캐롤라이나 주 포트브랙기지로 군사유학을 가서 심리전 학교, 특수전학교 두 과정을 수료했다. 1960년 초에는 북극성회 회장을 맡기도 했다.

노태우는 1960년 대위로 진급해 군사정보대학 영어번역담당 장교가 됐다. 1961년 전두환 등과 학생군사교육단(ROTC) 창설요원이 되고 서울대 학군단 교관이 되어 전국 16개 대학에서 모인 장교후보생을 교육했다. 이때 박정희가 5.16 군사정변을 일으켰다. 노태우는 전두환과 함께 군사혁명 지지를 선언하고 '지지 행진'에 참가했다.

박정희는 그를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비서실 정보과에 배속시켰다. 노태우는 국군 방첩부대 정보장교를 거쳐 1966년에는 육군본부 정보과장과 방첩과장으로 민심과 정치동향을 수집했다. 1962년에는 하나회의 모태가 되는 북극성회 회장에 선출되기도 했다.

1967년에는 중령으로 진급하여 베트남 전쟁에 대대장으로 파견됐다. 노태우는 퀴논 전투에서 북베트남 군대를 전멸시킨 공로로 을지무공훈장을 받았다. 1968에 귀국한 뒤에는 육군대학을 수료하고 수도경비사단 대대장으로 복무했다. 1970년에 대령으로 진급하여 육군참모총장 수석부관장교가 됐다. 1971년에 보병연대장을 거쳐 1974년 1월 1일 육군 준장으로 진급하고 4년간 공수특전여단 여단장을 지냈다. 노태우는 김옥숙과 결혼해 1남 1녀를 뒀다.

노태우는 1976년 박종규, 차지철 등에 발탁되어 대통령 경호실 행정차장보로 임명됐다. 1978년 1월 육군 소장으로 진급, 그 해 전두환이 사단장으로 전출되면서 전두환 등의 후원 하에 대통령 경호실 작전차장보로 전격 발탁됐다.

노태우는 하나회의 모태가된 육사 11기 모임인 북극성회에서 1962년 회장을 맡기도 하는 등 전두환을 중심으로 조직된 하나회의 핵심 멤버였다. 그는 윤필용 사건으로 위기를 겪기도 했으나 1979년 3월 전두환이 재기에 성공하여 보안사령부 사령관으로 복직된 뒤 육군 제 9보병 사단장으로 전임됐다.

12·12 군사반란

1979년 3월 노태우는 청와대 근무를 마치고 보병 사단장이 되어 전방으로 발령났다. 같은해 10.26사태로 박정희 대통령이 피살되자, 12월 12일에 전두환, 정호용 등과 함께 군사반란을 도모하여 정승화 체포작전을 진행하였다. 12·12 군사반란 당시 노태우는 자신이 실패할 것에 대비해 김옥숙의 사촌동생 박철언에게 가족을 부탁하기도 했다.

12.12 반란에 성공한 후 노태우는 수도경비 사령관이 되었으며 이듬해 1980년 5.17 비상계엄 확대 조치에 동조해 핵심세력이 됐다. 국가보위입법위원회 상임위원이 되어 권력의 핵심으로 부상했고 1980년 8월 중장으로 진급, 전두환의 후임으로 보안사령관이 됐다 .1981년 7월 대장 진급 후 예편했다.

정계 진출

육군대장으로 예편한 노태우는 정계에 입문해 전두환의 후원에 힘입어 민주정의당 대표최고위원이 됐다. 1981년 7월 16일 정무 제2장관에 임명됬으며 같은해 11월에는 대통령 특사로 임명되어 유럽과 미국, 아프리카를 순방했다. 가톨릭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를 만나 한국 방문을 간청하여 성사시키기도 했다.

1982년 통일원에서 북한에 남북고위급 회담을 제의하자 같은해 2월 25일부터 정무2장관으로 1982년 남북한 고위급 회담 수석대표로 활동했다. 정무 2장관 당시 외교 안보 담당 특보를 겸해 1988년 올림픽 유치를 확정지었다.

1982년 3월 체육부 장관에 임명되고 같은해 4월 내무부장관으로 임명되었다. 1983년 1988 서울 올림픽 조직위원장으로 임명되었으며, 1984년에는 대한체육회 회장에 선출됐다. 1986년에는 서울 아시안게임 조직위원장으로 아시안게임을 주관했다.

1985년 2월에는 1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정의당 전국구 의원로 입후보해 번호 3번으로 당선됐다. 의원에 당선되고 곧바로 민정당 대표최고위원에 임명됐다. 1987년 6월 민정당 내 경쟁자였던 노신영과 정호용 등을 제치고 민정당 대통령 후보로 추대됐다. 노태우는 1987년 6월 10일 잠실체육관에서 열린 민정당 제4차 전당대회 및 대통령 후보 지명대회에서 대통령 후보로 선출됐다.

6·29 선언

전두환은 1987년 4월 13일 일체의 개헌논의를 금지하는 호헌조치를 발표했다. 이에 1985년 총선 이후 줄기차게 개헌을 주장해온 야권과 재야세력은 반발했다. 이 와중에 서울대학생 박종철이 경찰의 고문으로 사망한 사실이 알려지며 6월 민주항쟁이 시작됐다. 시위는 학생 뿐 아니라 교수, 회사원까지 참여하며 전국으로 확산됐다.

민정당 대표위원인 노태우는 6월 29일 기자회견을 열고 전두환에게 하는 건의 형식으로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하겠다는 선언을 했다. 이 선언에서 노태우는 △ 대통령 직선제 개헌 이외에 △ 김대중 사면·복권 및 극소수를 제외한 시국관련 사범의 석방 △대통령 선거법 개정, 국민기본권 신장, 언론자유 창달, 지방자치제 실시 등 8개항을 제시했다.

노태우는 이를 청와대에 건의해 만약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 대통령 후보는 물론 당 대표직을 포함한 모든 공직에서 물러날 것이라고 밝혔다. 민정당은 긴급 의원총회를 열고 노태우의 제안을 당의 공식 입장으로 추인했다. 전두환은 7월 1일 특별담화를 통해 노태우의 6·29 선언을 대폭 수용하겠다고 밝혔다.

6·29 선언은 전두환이 먼저 직선제 수용을 결정한 뒤, 노태우의 당선 가능성을 높이기 위해 노태우가 건의하는 형식으로 만들어진 것이라는 주장이 다수다. 전두환은 자신이 먼저 노태우에게 직선제를 검토해보라고 제안했다고 밝혔고, 노태우는 선언 이후에 청와대를 방문해 사후에 이야기했다고 주장했다.

대통령 직선 개헌

1987년 10월 29일 여야합의로 헌법이 개정·공포됐다. 헌법 개정 논의는 민정당과 민주당을 대표하는 '8인 정치회담'이 이 과정을 주도했다. 이들은 7월 31일부터 9월 16일까지 총 48일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헌법 전문 수정 △헌법재판소 설치 △대통령 직선제 부활 △대통령 권한 축소 △국회 권한 강화 등을 결정했다.

1987년 개정된 현행 헌법은 '대통령은 국민의 보통·평등·직접·비밀 선거에 의하여 선출한다'고 국민에 의한 직접 선거의 원칙을 명시했다. 이에 따라 1987년 대통령 선거는 1972년 유신 이후 최초로 국민들의 직접선거로 치러졌다.

제13대 대통령 당선

1987년 12월 16일 치러진 13대 대통령 선거에는 민주정의당의 노태우, 통일민주당의 김영삼, 평화민주당의 김대중, 신민주공화당의 김종필, 통일한국당의 신정일 등 6명이 출마했다. 이 선거에서 '위대한 보통 사람의 시대'를 슬로건으로 내세운 노태우 후보는 36.6%(828만표)의 득표율을 확보해 당선됐다. 김영삼은 28.0%(633만표), 김대중은 27.1%(611만표)를 얻었다.

이른바 '양김'이라 불리는 김영삼·김대중의 분열은 노태우가 당선되는 가장 큰 원인이 됐다. 1987년 7월 9일 사면 복권된 김대중은 통일민주당의 대통령 후보를 두고 김영삼과 극심한 갈등을 빚었다. 재야단체와 정치권 등에서는 김영삼·김대중의 후보단일화를 주장하는 목소리가 높았으나 끝내 결렬됐다. 10월 10일 김영삼이 대통령 선거 출마를 발표하자, 김대중은 10월 18일 통일민주당을 탈당하고 11월에 평화민주당을 창당했다.

노태우는 인천국제공항, 경부고속철도 서해안고속도로 등 사회간접자본 건설 공약과 함께, 대통령에 당선되면 '중간평가'를 받겠다는 공약을 내놓았고, △밀폐수사 금지 △토지 공개념 확대 △출자총액제한 △재벌의 소유·경영 분리 △작전 지휘권 재조정 등을 제시했다. 선거 18일 전인 11월 29일 KAL858기 폭파 사건이 벌어져서 시민들의 안보 불안감을 자극했으며, 비행기 폭파범인 김현희가 선거전날인 12월 15일 압송되고, 그 장면이 TV 방송으로 생중계 된 것도 결과에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분석되었다.

대통령 재임 시기

노태우는 13대 대통령으로 1988년 2월 25일 취임했다. 노태우는 집권 초기 전두환의 영향력에서 벗어나지 못해 '6공화국이 아니라 5.5공화국'이라는 비아냥을 들었다. 전두환은 대통령 선거가 끝난 지 열흘 만인 12월 26일에 군 인사를 단행해 최세창, 고명승, 최평욱 등 자신의 친위 세력을 군 요직에 앉혔다. 또 당선자 노태우가 새로운 내각을 구성하는 과정에서도 인선작업에 관여했다.

노태우는 장관에서 가급적 군 출신을 배제하려 했으나 전두환에 의해 5명의 군 출신 장관이 기용됐고, 5공 시절 장관을 했던 사람이 8명이나 포진해 있었다. 군의 요직도 모두 전두환 세력이 차지했다. 전두환 자신도 국가원로자문회의를 만들어 의장이 됐다.

노태우는 1988년 2월 25일 취임한 직후 국가원로자문회의의 규모를 축소했다. 같은해 실시되는 4.26 총선에 출마할 이들을 뽑는 민정당 공천에서 권익현, 권정달, 김상구 등 5공 핵심 세력을 배제했다. 또 전두환의 동서이자 하나회 회원인 이재형 국회의장과 노신영 전 국무총리도 뺐다. 대신 노태우는 최측근이자 인척인 박철언이 이끄는 월계수회 회원들을 대거 공천했다.

노태우는 전두환의 동생 전경환을 각종 비리와 부정축재를 벌인 혐의로 구속했다. 전경환은 새마을운동본부 회장을 맡으며 5공화국 내내 숱한 권력형 비리와 추문을 낳은 인물이었다. 전두환은 4월 13일 연희동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국가원로자문회의 의장직과 민정당 명예총재직 등 모든 공직에서 물러나겠다고 밝혔다.

5공 청문회

그러나 민심은 노태우 정권에게 호의적이지 않았다. 1988년 4.26 총선 결과 민정당은 299석 중에 절반에도 못미치는 125석을 얻는데 그쳤고, 평민당, 민주당, 공화당 등 야당이 174석을 차지했다. 국회가 여소야대 정국이 됐다. 이때 야권과 시민사회에선 광주학살 책임자 처벌과 12.12사건과 5.17사건 진상 해명 등 '5공 청산 요구'가 높았다. 학생들은 전두환 체포조를 만들어 연희동에서 시위를 벌였다.

당시 국회의 주도권은 제1야당인 평민당을 이끄는 김대중이 가지고 있었다. 국회는 광주민주화운동진상조사특위(광주특위)와 제5공화국 비리조사특위(5공특위)를 구성하고 청문회를 열었다. 김대중은 꾸준히 전두환의 천문회 증언을 요구했다.

1988년 10월 17일 노태우가 미국 순방길에 올랐을 때, 검찰은 전두환의 친형 전기환과 사촌동생 전우환을 구속하고, 처남 이창석도 구속하는 등 전두환의 친인척을 대거 구속했다. 전두환은 11월 23일 TV 생중계로 대국민 사과문을 읽은 후 백담사로 떠났다.

노태우는 12월 13일 검찰에 '5공특별수사부'를 설치하도록 하여 47명을 구속했다. 야당 측은 검찰의 축소수사라며 정호용 ·이원조 · 이희성 · 장세동 · 허문도 · 안무혁 등 5공 비리의 핵심 6인을 사법 처리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북방정책

노태우 정부는 '북방정책'이라는 새로운 대외정책을 수립, 시행했다. 이는 소련과 중국을 포함해 동유럽과 아시아의 사회주의권 국가들과 새롭게 국교 정상화를 추진하고, 이를 통해 한반도 평화정착과 북한의 개혁 개방을 유도해내는 정책을 뜻했다. 노태우 정부 북방정책의 목표는 '7.7 선언'을 통해 공표되었다.

노태우는 1988년 7월 7일 ‘민족 자존과 통일 번영을 위한 특별 선언’, 이른바 ‘7·7 선언’을 내놓았다. 이 선언은 6개 항의 대북정책으로 북한·중국·소련에 대한 개방을 표명했다. 이 선언은 "북한을 경쟁과 대결이라는 적대적 대상이 아니라 통일을 위한 동반자, 즉 민족공동체의 일원으로 보아야 한다"고 밝혔다.

7.7선언의 6개항은 △남북동포간의 상호교류 및 해외동포의 자유로운 남북왕래를 위한 문호 개방 △ 이산가족의 서신왕래 및 상호방문 적극 지원 △ 남북간 교역을 위한 문호 개방 △ 비군사물자에 대한 한국의 우방과 북한간의 교역 찬성 △ 남북간의 소모적인 경쟁대결외교 지양 및 남북대표간의 상호협력 △ 북한과 한국 우방과의 관계 개선 및 사회주의 국가와 한국과의 관계 개선을 위한 상호협조를 할 의사가 있음 등이었다.

같은해 10월 18일 노태우는 제43차 유엔총회에서 한 기조연설에서 7.7 선언의 주요 내용을 설명하고 남북한이 한민족으로서 번영을 위해 서로 협력하는 동반자로서의 관계를 진전시켜 나가겠다고 밝혔다. 이후 노태우는 남북한이 동시에 UN에 가입한 1991년과 1992년에도 유엔에서 연설을 했다. 당시 소련을 비롯한 사회주의 국가들은 개혁 · 개방을 모토로 시장경제를 도입하는 흐름에 있었다.

노태우 정부는 1989년 2월 6억 달러의 차관을 들여 헝가리와의 수교를 성사시켰다. 이후 폴란드 및 유고와 1989년 11월과 12월 각각 수교를 맺었으며 1990년 3월에는 체코, 불가리아 및 루마니아 등 동유럽 국가들과 외교관계를 맺었다. 또 아시아지역에서 몽골과도 1990년 3월 수교했다.

또 당시 시장경제 체제를 도입하고 있던 소련에도 30억 달러의 차관을 제공하고 1990년 9월 30일 한-소 국교정상화를 선언하고 외교관계를 맺었다. 중국과의 수교는 중국이 요구하는 '하나의 중국' 원칙 등의 문제로 인해 한-소 수교보다 2년 늦은 1992년 8월 24일 한-중수교에 관한 공동성명에 서명하면서 이뤄졌다.

남북 유엔 동시 가입

남북은 1989년 2월 남북고위급회담의 예비회담을 시작으로 일련의 회담을 진행했다. 1991년 9월 남북이 유엔에 동시 가입하고 12월 13일 '남북사이의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 협력에 관한 합의서(남북기본합의서)'에 서명했다. 또 남북은 1991년 12월 31일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사찰을 수용한다는 내용의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을 발표했다. 남북기본합의서는 1992년 2월 19일에 발효했다.

하지만 미국의 부시 정권은 영변에 있는 2개의 시설이 핵시설로 의심된다며 이곳도 국제원자력기구의 사찰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 미국은 핵문제 해결이 남북관계 개선에 앞서야 한며 특별사찰을 주장했고 북한은 이에 강력하게 반대했다. 결국 남북관계는 다시 냉전으로 전락했다.

공안정국 조성

노태우의 7.7 선언 이후 재야단체 등에서는 민간 차원의 남북 교류 주장이 대두됐다. 그러나 정부는 민간 차원의 남북 교류는 엄금했으며 문익환, 임수경 등의 방북 사건을 계기로 대대적인 공안 정국이 조성되었다.

1989년 3월 18일 일본에 머물고 있던 소설가 황석영이 북한을 방문한다고 발표하고 베이징을 거쳐 3월 20일 평양에 도착했다. 이어 닷새만인 3월 25일 목사 문익환이 남한 당국의 허가를 받지 않고 평양을 방문해 김일성을 만나 대담했다. 문익환은 당시 조국평화통일위원장 허담과 4.2 남북공동성명을 발표했다. 통일 방식으로는 연방제 안을 택하고 정치와 군사 문제 및 교류 협력 문제를 추진할 것을 결의하는 내용이었다.

노태우 정부는 '좌경용공세력을 색출한다'며 안기부·검찰·보안사 합동으로 공안합동수사본부를 설치하고 국가보안법의 적용 범위를 확대하며 재야와 학생운동에 대한 전면적인 수사를 진행했다. 이과정에서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전민련)과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전대협) 지도부에 대한 대규모 검거가 벌어졌다. 문익환은 4월 13일 구국하자 공항에서 체포되어 구속됐다.

이러한 와중에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는 1989년 6월 30일 평양에서 열리는 세계청년학생축전에 한국 외국어대 4학년 임수경을 전대협 대표자격으로 보냈다. 임수경은 47일간 평양에 머무르며 북측 학생대표와 '남북 청년학생 공동선언'을 발표하고 귀국할 때는 반드시 판문점을 통과하겠다고 밝혔다.

정부는 판문점 귀환을 허용하지 않았고, 정의구현사제단에서는 문규현 신부를 북한에 파견해 임수경을 데려오도록 했다. 이들은 단식 등을 벌인 끝에 8월 15일 판문점을 통해 남한으로 귀환했다. 이들은 귀환 직후 체포되어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됐다.

임수경이 방북하기 사흘 전 평민당 소속 국회의원 서경원이 1988년 7월 사흘간 북한을 방문했다는 이유로 구속되는 사건이 벌어졌다. 안기부 등은 평화민주당 총재 김대중이 관련되었는지 여부에 수사를 집중했고, 김대중을 불고지죄와 외환관리법 위반으로 불구속 기소했다. 공판에서 서경원 의원은 수사과정에서 고문 등 안기부의 가혹행위로 허위자백을 했다고 주장했다.

3당 합당

노태우는 여소야대 정국을 타개하기 위해 비밀리에 '3당 합당'을 추진했다. 1990년 1월 22일 민정당 총재인 노태우 대통령과 김영삼 민주당 총재, 김종필 공화당 총재는 청와대에서 전격 회동을 갖고 3당 합당과 함께 민주자유당 창당을 선언했다.

이에 따라 무려 216석을 가진 거대 여당 민자당이 탄생했다. 13대 총선을 통해 만들어진 여소야대 정국은 여대야소로 바뀌었고 김대중의 평화민주당은 유일한 원내 야당으로 남게됐다.

보안사 민간인 사찰 기록 공개

1990년 10월 4일 육군 보안사 소속 이병 윤석양이 한국기독교회협의회 인권위 사무실에서 양심선언을 하고 보안사의 민간인 사찰 기록을 공개했다. 정치인 등 주요 인사 1600여 명에 대한 불법 사찰 실태가 드러났다. 야당과 재야단체는 10월 13일 공동 집회를 열고 노태우와의 관련성을 조사하고 만약 관련이 있다면 대통령직을 사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국방부 장관과 보안사령관이 해임되고 보안사는 국군기무사령부(기무사)로 개편됐다.

범죄와의 전쟁

노태우는 보안사의 민간인 사찰을 규탄하는 대규모 집회가 열린 1990년 10월 13일 '범죄와 폭력에 대한 전쟁'을 선포했다. 1990년 11월엔 '범죄와의 전쟁'의 일환으로 '새질서 새생활 운동' 캠페인을 시작하고 전국의 공무원들을 동원해 운동을 전개했다.

분신정국

학원 자주화 시위에 참여했던 명지대 학생 강경대가 사복 경찰들이 휘두른 쇠파이프에 맞아 사망했다. 이에 항의하는 시위와 대학생들의 분신으로 이어졌다. 4월에는 전남대 학생 박승희가 강경대 치사 사건과 공안정치 분쇄를 주장하며 분신했고 5월에는 안동대 학생 김영균과 경원대 학생 천세용,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전민련) 사회부장 김기설 등 모두 11명이 분신으로 목숨을 잃었다.

이에 대해 정부는 분신 배후설을 유포했고, 시인 김지하는 '죽음의 굿판을 당장 걷어치워라'는 글로 분신을 비난했다. 박홍 서강대 총장은 김기설의 분신자살에 대해 죽음의 블릭리스트에 의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검찰은 전민련 총무부장 강기훈이 김기설의 유서를 대필했다며 강기훈을 붙잡아 구속했다.

노태우 정부의 분신배후설은 대학생과 재야 세력의 도덕성에 치명적 타격을 입혔다. 그러나 유서대필 사건은 조작 사건으로 드러났다. 이 사건으로 옥살이를 했던 강기훈은 재심 상고심을 거쳐 24년 만인 2015년 5월 무죄 확정 판결을 받았다. 서울고법과 대법원은 김씨의 유서 필적이 강씨의 필적이라고 판단한 1991년 국과수의 감정결과가 신빙성이 없다며 강씨에게 무죄 판결을 내렸다.

민자당 탈당

200석을 넘는 의석을 확보했던 민자당은 1992년 3월 24일 치러진 총선에서 참패해 과반수에서 한 석 모자라는 149석으로 줄어들었다. 신민주연합당과 꼬마민주당이 합당한 민주당은 97석, 현대그룹 회장 정주영이 창당한 통일국민당은 31석을 차지했다.

노태우는 충남 연기군수 한준수의 '관권 선거 폭로'로 위기를 맞았다. 그는 민주당 원내 총무실에서 14대 총선이 유례없는 관권 부정선거였다며 '중앙'에서 내려온 문서 15종과 수표 다발을 공개했다. 이에 노태우는 1992년 8월 28일 민자당 총재직에 사퇴했고, '정치적 중립'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9월 17일 민자당을 탈당했다. 노태우는 '중립내각' 구성을 선언하고 한림대 총장 현승종을 국무총리로 하는 '거국 중립내각'을 출범시켰다.

퇴임과 말년

1992년의 제14대 대통령선거에서 김영삼이 당선된 이후 노태우는 1993년 2월 24일 청와대를 떠나 서울 연희동 자택으로 돌아갔다. 1993년 김영삼 정부가 출범한 이후 전두환·노태우를 비롯한 신군부 관련자에 대한 고소 고발이 이어졌다. 7월에는 신군부에게 지휘권을 강탈당했던 정승화 당시 육군참모총장 등 22명이 전두환·노태우 등 34명을 군 형법상의 반란 및 내란 목적 살인 혐의로 검찰에 고소했고, 1994년 5월 13일에는 광주 항쟁의 피해자 322명이 전두환·노태우를 비롯한 책임자 35명을 내란 및 내란 목적 살인 혐의로 서울지검에 고소했다.

5·18 특별법 제정과 비자금 사건

1995년에는 노태우의 비자금 문제가 불거졌다. 10월 19일 국회의원 박계동이 국회 본회의장에서 노태우가 비자금 4000억 원을 조성했다고 폭로하고 신한은행 서소문지점에 예치된 128억 2700여 만원의 예금 조회표를 증거로 제시했다. 다음날 정부가 비자금 수사 방침을 밝혔다. 사흘 뒤 관계자들이 검찰에 출두하고 조사가 시작되며 비자금의 실체가 확인되기 시작했다.

노태우는 10월 27일 사과문을 내 재임 중 5000여 억원의 통치자금을 조성했고 퇴임 시 1700여 억 원이 남았다고 말했다. 이후 검찰은 삼성, 현대, 대우, 한보를 비롯한 34개 재벌총수들에 대한 소환 조사를 진행했다. 수사결과 총수들은 30억원에서 250억원까지 뇌물을 줬으며 노태우의 비자금은 4100억 원에 이르는 것으로 나타났다.

당초 검찰 수사는 비자금에 대한 것으로 한정됐으나 '12.12 군사반란과 5.18 내란에 대해서도 처벌해야 한다는 여론이 커지면서 국회가 '헌정질서 파괴범죄의 공소시효 등에 관한 특례법'을 제정했고 검찰은 형법상 내란죄에 대해서까지 수사를 확대했다. 11월 27일 헌법재판소는 5.18 내란 사건 불기소처분에 대한 헌법소원 사건에 대한 평의회를 열고 검찰의 '공소권 없음'은 부당하다고 밝혔으며, 12월 15일에는 성공한 쿠데타도 형사 처벌될 수 있음을 밝혔다.

노태우는 1995년 11월 16일 구속됐다. 1996년 1월 23일 검찰은 전두환 노태우 등의 관련자들을 5.18 사건에서의 내란죄, 내란목적살인죄의 혐의로 구속 기소했다. 1996년 8월26일 1심 재판부는 징역 22년 6월과 추징금 2,838억 9,600만원을 선고했다. 당시 전두환은 사형과 추징금 2,259억 5,000만원이 선고됐다. 대법원은 1997년 4월 징역 17년과 추징금 2,628억원을 확정 선고했고, 김영삼 전 대통령은 1997년 12월 특별 사면했다.

노태우는 2002년 전립선암 수술 후 건강이 악화되었으며 2003년 2월 노무현 전 대통령 취임식에 참석한 것을 마지막으로 공식 석상에 참석하지 않았다. 2013년 노태우는 추징금을 분할하여 완납했다. 그는 천식과 소뇌위축증이라는 희귀병으로 투병 생활을 계속한 끝에 2021년 10월 26일 숙환으로 타계했다.

참고

  • ・ 한국현대사산책-1980년대편 3권, 강준만, 인물과사상사, 2003
  • ・ 노태우 회고록, 노태우, 조선뉴스프레스, 2011
  • ・ 대한민국 역대정부 주요정책과 국정운영-노태우정부, 한국행정연구원, 대영문화사, 2014
  • ・ <한겨레>, 전두환·노태우 구속 2년뒤 특별 사면됐다, 2017년 3월 10일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786050.html#csidx1cc95e253598ac9888d78164dba809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