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야난다 사라스바티

다야난다 사라스바티

다른 표기 언어 Dayananda Sarasvati 동의어 물라 삼카라, Mūla Śaṁkara
요약 테이블
출생 1824, 인도 구자라트 탄카라
사망 1883. 10. 30, 라지푸타나 아지메르
국적 인도

요약 사회개혁자이자 힌두교 수행자.
본명은 Mula Sankara.

힌두교 개혁종파인 '아리아 사마지'를 1875년에 창시했다. 아리아 사마지는 세속적으로나 종교적으로 최고의 성전인 베다의 권위만 인정할 것을 주장했다.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나 바라문 계급 자녀들이 받는 교육을 받은 그는 14세에 아버지를 따라서 시바 신을 섬기는 사원의 철야기도에 참석했다. 아버지와 다른 사람들이 잠든 사이에 신상 앞에 차려진 제물을 먹으러 온 쥐들이 신상을 타고 넘어다니며 더럽히는 광경을 본 그는, 이 경험으로 인해 어려서부터 무의미한 우상숭배라고 생각되는 것에 대해 뿌리깊은 반감을 갖게 되었다.

5년 뒤 무척 따르던 숙부가 죽자 종교에 대한 회의는 더욱 깊어졌고 죽음의 한계를 극복하려고 요가에 맨 먼저 관심을 기울였다. 그는 혼담이 오가자 집을 나와 '사라스바티'라는 수행집단에 들어갔다. 그뒤 15년간(1845~60) 종교의 진리를 찾아서 인도 전역을 돌아다닌 끝에 스와미 비라자난다의 제자가 되었다. 스승은 수업료를 내는 대신에 다야난다(Dayananda:수행생활을 시작했을 때 자신이 지은 이름)에게 불교 이전의 인도 사회에 있었던 '베다 시대의 힌두교'를 재건하는 데 일생을 바치겠다는 맹세를 하도록 했다.

다야난다는 베나레스의 마하라자가 주재한 정통 힌두교 학자들과의 대중토론에 참가했을 때 처음으로 자신의 견해로 대중의 폭넓은 관심을 끌었다. 귀족 아리안들의 모임인 아리아 사마지를 창시하기 위한 첫번째 모임은 1875년 4월 1일 봄베이(지금의 뭄바이)에서 열렸다. 때로는 베다에 대한 절대적인 권위부여가 지나쳐 전기의 사용과 같은 기술문명의 성과까지도 베다에 이미 서술되어 있다고 주장한 경우까지 있었지만, 그는 많은 중요한 사회개혁을 진전시켰다. 조혼을 반대했고, 과부의 재혼을 옹호했으며, 모든 계층에 베다 학습의 문호를 개방하고 많은 교육기관과 자선단체를 세웠다. 또한 아리아 사마지는 영국의 인도 점령기 동안 민족주의 정신을 고취시키는 데 크게 공헌했다.

다야난다는 왕족의 지배에 대해 공개적으로 신랄하게 비판한 지 얼마 뒤에 죽었는데 당시의 상황을 보면 마하라자의 지지자에게 독살된 듯하나 법적으로 죄상이 밝혀진 일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