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이의 옥

남이의 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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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1468년(예종 즉위) 세조 때 원로 훈신(勳臣) 세력이 일을 조작하여 남이 등 전공(戰功)을 바탕으로 새로 대두한 세력을 제거한 사건.

이해 9월 세조가 죽고 예종이 19세의 나이로 즉위하자 세조비 윤씨[貞熹王后]가 수렴청정하고 신숙주(申叔舟)·정인지(鄭麟趾)·한명회(韓明澮)·구치관(具致寬)·최항(崔恒)·김질(金礩) 등 이미 대신을 지낸 훈신들이 원상(院相)으로 임명되었다. 예종은 즉위하기 2년 전부터 세자로서 세조의 명을 받아 대리하여 정무를 보아왔는데 신숙주 등은 이때부터 정무 처결에 참여해오다 원상이 됨으로써 예종 즉위 후의 국정을 주도하고 있었다. 남이는 개국공신 남재의 손자이자 태종의 외손이며, 좌의정까지 오른 권람의 사위이다.

그는 1467년(세조 13) 4도 도총사(都摠使) 구성군 준(浚)의 휘하에서 강순과 함께 대장직을 맡아 이시애(李施愛)의 난을 진압했다. 이어 건주위 여진족을 정벌하여 족장인 이만주(李滿住) 부자 등을 죽이는 큰 전공을 세움으로써 28세의 청년 장수로서 명성을 떨치고 있었다.

한편 구성군·강순·남이 등은 이시애의 난 진압 공로 등으로 적개공신(敵愾功臣)에 봉해지고 정치적 지위가 급격히 상승하여 원상세력과 은연중 대립하다가, 예종이 즉위한 뒤 권력다툼이 노골화되어 원상세력이 사건을 일으켰던 것이다. 사건은 예종이 즉위한 지 얼마 안되어 혜성이 나타났는데, 어느날 밤 궁궐에서 숙위하고 있던 남이가 "혜성이 나타남은 묵은 것을 없애고 새것을 나타나게 하려는 징조다"라고 말한 데서 비롯된 것으로 전해진다. 이를 훈신세력이 알게 되어 유자광(柳子光)이 이것을 돌려쳐서 남이 일파가 역모한다고 고해바치자, 전부터 남이를 못마땅히 여기고 있던 예종도 합세하여 이것을 기화로 마침내 남이 등을 제거하게 되었다.

남이·강순·조경치(曺敬治)·변영수(卞永壽)·변자의(卞自義)·문효량(文孝良)·고복로(高福老)·오치권(吳致權)·박자하(朴自河) 등이 모의하여서 왕이 산릉(山陵)에 행차할 때 거사하여 보성군 합(合)의 아들 춘양군(春陽君) 내(徠)를 추대하려 했다고 꾸며, 이들을 모두 죄를 주어 죽이고 합과 내 및 조경치의 장인 김개(金漑)의 벼슬을 빼앗았다. 이어서 남이의 어머니와 김개·남이 등의 심복인 조영달(趙穎達)·이지정(李之楨)·조숙(趙淑) 등 25명과 남이가 지휘하던 장용대(狀勇隊)의 맹불생(孟佛生)·진소근지(陳小斤知)·이산(李山) 등도 죽였으며, 윤말손(尹末孫)·정숭로(鄭崇魯) 등의 공신녹권(功臣錄券)을 몰수하는 동시에 이들을 종으로 삼고, 최연원(崔演元)은 변방 군대에 충군했다. 이로써 구성군이 영의정에서 물러나고 한명회가 다시 영의정이 되는 한편 원상세력의 주요인물들이 익대공신(翊戴功臣)에 책봉되어 훈구세력의 정치적·경제적 기반이 더욱 강화되는 계기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