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자광

유자광

다른 표기 언어 柳子光
요약 테이블
출생 미상
사망 1512(중종 7)
국적 조선, 한국

요약 유자광은 뛰어난 기개와 용력으로 세조의 총애를 받아 서얼이라는 신분의 한계를 극복하고 두 차례나 1등공신에 책록된 인물이다. 세조·예종·성종·연산군·중종까지 5대에 걸쳐 출세가도를 달렸지만 사림으로부터 남이의 옥사를 고변하고 무오사화를 일으킨 희대의 간신으로 규정되어 비참한 최후를 당했고 조선왕조 내내 지탄받았다.

목차

접기
  1. 명문가의 얼자로 세상에 나서다
  2. 세조의 총애를 받아 천역을 벗다
  3. 남이의 반역을 고변하여 공신이 되다
  4. 효심도 죄목으로 삼으니 원통하다
  5. 무오사화로 사림의 공적이 되다
  6. 천출의 신화 허물어지다

간신이란 통상 암군에게 빌붙어 아첨하면서 권세를 누리고 충신들을 모함하여 나라를 누란의 위기에 빠뜨린 신하를 말한다. 그런데 임사홍이나 김자점 등과 더불어 조선 최고의 간신으로 일컬어지는 유자광은 세조부터 중종까지 5대에 걸쳐 임금의 총애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평생 높은 벼슬자리 하나 얻지 못했고 그럴듯한 권력조차 행사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여타 간신들과는 다른 모습을 보인다.

유자광은 명문가 출신이었지만 어머니가 노비였으므로 종모법에 따라 그의 신분은 천민이었다. 《홍길동전》에 빗대면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를 수 없고 형을 형이라 부를 수 없는 가혹한 천형을 안고 세상에 나온 것이다. 하지만 그는 온전히 자신의 능력만으로 운명에 굴레에서 벗어나는 데 성공했다. 조선시대에 상전의 허락 외에 자의적으로 면천할 수 있는 방법은 전쟁에서 공을 세우거나 역모의 고변 등 극히 제한적이었다. 그런데 유자광은 그처럼 가능한 모든 수단을 통해 면천은 물론 부귀영화까지 거머쥐었다.

젊은 날 일찌감치 군대에 들어가 인생역전의 기회를 노리던 유자광은 이시애의 난이 일어나자 세조에게 발탁되면서 일거에 천역을 벗어던지고 당상관의 자리를 거머쥐었다. 하지만 그는 출사 초기부터 신분제도의 훼손을 우려하던 양반 사대부들의 강력한 견제를 받았다. 예종이 즉위하자 승승장구하던 남이의 역모를 고발함으로써 1등공신이 되었지만 대간에서 딴죽을 거는 바람에 쓸 만한 관직 하나 얻지 못했다.

이에 앙심을 품은 유자광은 연산군 대에 이르러 무오사화를 통해 수많은 선비들을 희생시키면서 사림의 공적이 되었다. 중종반정에도 참여하여 1등공신이 되었지만 양대 사화의 원흉이라는 대간의 탄핵으로 낙마한 뒤 유배지에서 세상을 하직했다. 그의 사후에도 사림의 복수는 계속되어 유자광은 조선왕조 내내 평생 온갖 음해와 공작으로 올곧은 선비들을 죽음에 이르게 한 희대의 간신으로 규정되었다.

명문가의 얼자로 세상에 나서다

유자광(柳子光)은 1439년(세종 21년) 경주부윤을 지낸 유규의 얼자로 태어났다. 어머니 나주 최씨는 노비 출신의 비첩이었다. 본관은 영광(靈光), 자는 우복(于復)·우천(宇天)이다. 야사에 따르면 어느 날 아버지 유규가 낮잠을 자다가 백호가 나오는 꿈을 꾸고 나서 여종을 취하여 유자광을 얻었다고 한다.

그의 집안은 개국 당시부터 명문가였다. 할아버지 유두명은 정3품 대언을 지냈고, 아버지 유규는 1426년(세종 8년) 무과에 급제한 다음 사헌부 장령, 집의를 거쳐 세조 때에는 형조참의, 호조참의, 황해도 관찰사, 경주부윤 등을 지냈다. 유규에게는 적자로 유자환과 유자석이 있었는데, 유자환은 계유정난에 참여한 공으로 정난공신에 봉해졌고 기성군으로 책봉된 뒤 도승지, 대사헌, 이조 참판 등의 요직을 지냈다.

유자광은 일세를 풍미한 인물답게 관련된 야담이 많이 전해지고 있다. 중종 때 사림 출신이면서도 기묘사화를 일으켜 간신으로 지탄받은 남곤은 〈유자광전〉을 통해 그를 매우 부정적으로 묘사했다. 유자광이 몸이 날래고 힘이 세며 원숭이처럼 높은 곳을 잘 타고 다녔는데, 도박을 좋아하고 여자를 강간하는 등 매우 광패해서 유규가 자식으로 여기지 않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선조 대의 문인 유몽인은 《어우야담》에서 유자광이 어린 시절 매우 영특하여 천출임에도 불구하고 유규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다며 남곤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다.

유자광이 어린 시절 어머니와 함께 남원에서 살 때 아버지가 찾아와 깎아지른 듯한 바위를 보고 시를 지으라고 했다. 그러자 유자광은 ‘뿌리는 땅 속에 기반을 두고 형세는 삼한을 누르네’라는 시를 지었다. 이에 감탄한 아버지가 매일 《한서》의 열전 하나씩을 외우도록 하고 은어 1백 마리를 낚게 했는데, 유자광이 늘 문장을 막힘없이 외우고 고기도 숫자를 채우지 못하는 날이 전혀 없었다는 것이다.

이처럼 그에게는 전혀 다른 두 가지 평가에도 불구하고 매우 뛰어난 용력에 학문까지 겸비하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조선의 엄격한 신분제에 구속될 수밖에 없었던 그는 적극적으로 자신의 인생을 개척한다. 일찌감치 군대에 들어가 갑사로 복무함으로써 천역을 벗어날 수 있는 기회를 노렸던 것이다.

세조의 총애를 받아 천역을 벗다

1467년(세조 13년) 5월에 일어난 이시애의 난은 찬탈자 세조에게는 모진 통증이었겠지만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던 유자광에게 일대 낭보였다. 그 무렵 유자광은 경복궁의 동문인 건춘문을 지키는 갑사로 복무하다가 남원에 파견된 상태였다. 인생의 쓴맛 단맛을 두루 겪었을 28세의 나이였다.

당시 회령 부사 출신의 이시애가 함경도 주민에 대한 차별정책과 단종 폐위에 반발하여 반란을 일으키자 세조는 구성군 이준, 강순, 어유소, 남이 등에게 3만 명의 병력을 주어 진압하게 했다. 하지만 지세에 밝은 반란군이 연패에도 불구하고 맹렬하게 저항하면서 장기전의 양상으로 접어들었다. 그 소식을 들은 유자광은 한양으로 올라와 세조에게 상소를 올렸다. 자신이 항상 변방에서 공을 세우고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고자 했다면서 정병 3백 명만 내어준다면 전장에 나가 반드시 이시애의 수급을 베겠다는 내용이었다.

인용문
“지금 장수 된 자들은 모두 부귀가 극진한 사람들인데 죽고 사는 것을 두려워하여 진격을 미적거리며, 하는 일 없이 관망하면서 서로 이르기를 ‘이제 여름이니 활이 느슨해지기 쉽고 큰 비가 내려 길이 막힐 것이다.’ 또 ‘적의 소굴은 산이 험하며 초목이 무성하니 경솔하게 진격할 수도 없고 경솔하게 싸울 수 없다.’라고 합니다. 신이 비록 아는 것은 없지만 우리만 홀로 여름이고 적은 여름이 아니며, 우리만 홀로 활이 느슨해지고 적은 느슨해지지 않으며, 우리만 홀로 빗물에 막히고 적은 막히지 않으며, 우리만 홀로 산이 험하고 적은 험하지 않겠습니까?”

이처럼 담대한 상소문을 읽고 감탄한 세조는 유자광을 궁궐로 불러들어 인물됨을 살폈다. 그때 유자광은 어전에서 몇 계단을 한 번에 뛰어넘고 큰 기둥을 원숭이처럼 타고 오르는 등 놀라운 용력을 과시했다. 그러자 세조는 몹시 기뻐하면서 그를 왕실경호를 담당하는 겸사복에 임명했다.

인용문
“당 태종은 호걸한 선비를 대함에 있어 반드시 먼저 위엄과 분노를 더하여 그 기상을 꺾은 연후에야 맡겨서 등용했는데 나는 그렇지 않고 친애할 따름이다. 이제 너를 임용하여 장수로 삼아 1려(旅)를 이끌고 가서 이시애를 토벌하게 하고 싶지만 네가 미천하므로 위망이 없어 사졸이 따르지 못할까 두려워 감히 그렇게 하지 못하니, 너는 마땅히 알도록 하라.”

그로부터 얼마 후 세조가 직접 군대를 이끌고 전장에 나서자 겸사복들이 선봉을 담당하여 맹활약을 펼쳤다. 이때 유자광은 반란군에 합세한 건주위 여진족과 싸우다 귀를 다치기도 했다. 그 와중에도 유자광은 세조에게 병사들의 총통 다루는 기술이 미숙하니 평시에 총통군의 훈련을 꾸준하게 해야 한다는 상소를 올림으로써 세조의 신임을 다졌다.

이윽고 이시애의 난이 종식되자 세조는 유자광을 정5품 병조 정랑으로 임명하여 파란을 일으켰다. 천민에게 관직을 내린 것만으로도 유별난데 병조의 실무를 담당하며 삼사 관직의 임명에 동의할 수 있는 통청권과 자신의 후임을 추천할 수 있는 자대권을 행사하는 요직에 배치했으니 실로 경천동지할 만한 사건이었다. 이에 따라 대간에서 그 부당함을 아뢰자 세조는 이렇게 말하며 자신의 뜻을 밀어붙였다.

인용문
“너희들 중에 유자광 같은 자가 몇이나 되느냐. 나는 절세의 재주를 얻었다고 생각하니 다시 언급하지 말라.”

할아버지 태종에 버금가는 왕권을 휘두르던 세조의 강력한 호령에 대간은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유자광은 서얼 출신으로서 육조 낭관에 임명된 최초의 인물이 되었다. 그 후에도 세조는 유자광에 대한 총애를 숨기지 않았다.

세조가 재위 마지막 해인 1468년(세조 14년) 세자와 함께 온양으로 행차했을 때 유자광은 총통장으로서 왕을 수행했다. 그때 현지에서 특별히 치러진 별시에서 유자광이 낙방하자 세조는 시험을 주관한 신숙주를 닦달하여 그를 장원으로 삼고 정3품 병조 참지에 임명함으로써 조야를 놀라게 했다. 그로 인해 천민으로서 보잘것없는 갑사 출신의 유자광이 출사한 지 8개월 만에 당상관이 되었던 것이다. 그의 나이 29세 때의 일이었다.

남이의 반역을 고변하여 공신이 되다

1468년(세조 14년) 9월, 세조가 승하하면서 유자광의 출세가도에 브레이크가 걸렸다. 하지만 그는 예종이 즉위한 지 불과 1달 만에 남이의 반역을 고변함으로써 다시 한 번 출세의 액셀러레이터를 밟았다.

남이는 태종의 넷째 딸 정선공주의 아들이었는데 이시애의 난을 평정한 공으로 27세의 젊은 나이에 적개공신 1등에 책록되었고 공조판서를 거쳐 병조판서에 이르렀다. 하지만 예종이 즉위한 뒤 한명회, 신숙주 등 훈구파 대신들의 견제와 임금의 질시가 맞아떨어지면서 겸사복장직이라는 한직으로 밀려나고 만다.

그로 인해 남이가 분루를 삼키고 있는데 평소 가까이하던 유자광이 그의 실언을 트집 잡아 역모로 몰아붙였던 것이다. 그 결과 남이는 강순, 조경치, 변영수 등과 함께 원로인 한명회, 김국광 등을 죽이고 보위를 찬탈하려 했다는 혐의로 거열형에 처해졌다. 이를 계기로 유자광은 익대공신 1등에 책록되었고 무령군(武靈君)에 녹훈되었다.

그해 11월, 예종이 유자광에게 남이의 저택을 하사하자 사림에서는 남이를 무고한 것도 부족하여 집까지 빼앗았다며 목청을 높였다. 하지만 유자광은 그달 들어 용산에 출몰한 도적을 소탕하고, 변방에 침입한 야인들을 축출했으며, 남해에 침입한 왜구들을 체포하는 등 자신의 실력을 유감없이 과시함으로써 비판 세력을 잠재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자광은 사림을 주축으로 하는 대간에서는 사사건건 물고 늘어지는 바람에 실직을 거머쥐지 못했다. 정희대비의 수렴청정이 끝난 1477년(성종 8년) 도총관에 제수되었지만 대간의 반대 때문에 또 다시 분루를 삼켰다. 이는 조선왕조 5백 년 동안 서얼 출신 신료들이 공히 겪어야 했던 설움이었다.

어쨌든 그때까지 공신으로서 안정된 지위를 누리던 유자광에게도 첫 위기가 찾아왔다. 그해 도승지 현석규와 우승지 임사홍의 대립으로 불거진 무술옥사의 여파였다. 당시 조식이란 자가 자신의 누이가 일찍 과부가 되면서 받은 남편의 노비와 땅을 빼앗았고, 그 누이가 김주라는 사람과 재혼하려 하자 김주를 누이의 강간범으로 고발했다. 이 사건에 대하여 도승지 현석규와 임사홍을 비롯한 여러 승지들의 의견이 충돌하는 과정에서 막말이 오가자 사간원에서 현석규를 탄핵하기에 이른다. 그런데 성종이 문제를 야기한 현석규를 승진시키자 유자광이 부당함을 아뢨다가 임금의 미움을 샀다.

그 결과 유자광은 이듬해 5월 임사홍과 함께 파당을 이루었다는 죄목으로 동래에 유배되었다. 유자광은 그로부터 4년이 지난 뒤에야 직첩을 돌려받았지만 천출로서 잘난 체하다 날벼락을 받았다는 세간의 비웃음은 피할 수 없었다.

효심도 죄목으로 삼으니 원통하다

1485년(성종 16년) 유자광은 7년 만에 종1품 숭정대부 행 지중추부사로 임명되어 조정에 복귀했다. 그의 나이 46세 때였다. 이후 그는 두 차례나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왔지만 역시 쓸 만한 관직을 얻지는 못했다. 1487년(성종 18년) 한성부 판윤, 1491년(성종 22년) 황해도 관찰사에 제수되었지만 대간의 반대로 부임하지 못했다. 이와 같은 상황이 대간을 장악하고 있던 사람에 대한 원한으로 쌓였을 것이다. 그 무렵 정계에 진출한 사림과 사사건건 충돌을 빚던 그가 임금에게 언문을 장려하고 보급하자고 건의했다가 거센 비판을 받기도 했다.

유자광에 대한 사림의 공세는 효심까지도 비난의 빌미가 되었다. 과거 이시애의 난에서 공을 세워 관직을 얻었을 때 유자광이 제일 먼저 찾은 사람이 남원에 사는 어머니였다. 동래로 유배형에 처해졌을 때는 어머니의 나이가 71세인데 두 형이 세상을 떠나 모실 사람이 없다면서 배소를 남원으로 옮겨달라고 간청하기도 했다.

1489년(성종 20년) 10월, 유자광은 성종에게 남원에 홀로 사는 어머니 최씨가 나이 팔십의 고령이므로 서울로 모셔와 봉양케 해달라고 간청하여 허락받았다. 이듬해인 1490년(성종 21년)에는 어머니를 서울로 모셔오려 하는데 연로하여 말을 탈 수 없으니 가마꾼을 지급해 달라고 간청했다. 이에 대하여 사림에서는 그가 서얼 출신으로 1품에 이르렀지만 어미의 병을 핑계로 1년에 두세 차례 고향을 가는 바람에 현지 수령들이 접대하느라 등골이 휠 정도인데 이제 와서 가마꾼까지 달라고 주청하니 괘씸하다며 비난의 화살을 퍼부었다.

1495년(연산군 1년) 어머니가 별세하자 사간원에서는 유자광이 사치스럽게 초상을 치렀다고 탄핵했다. 그러자 유자광은 긴 상소문을 통해 대간에서 탄핵한 내용이 대부분 사대부들의 관행에 따른 것인데 부당하게 자신을 모함하고 있다면서 억울함을 호소했다. 이때 그는 수차례 ‘원통하다’는 표현을 씀으로써 대간의 공격이 서얼 출신인 자신을 견제하려는 양반 기득권자들의 횡포라는 점을 암시했다.

무오사화로 사림의 공적이 되다

1498년(연산군 4년) 7월, 유자광은 《성종실록》을 편찬하던 이극돈으로부터 사관 김일손이 제출한 사초에 사림의 영수였던 김종직의 〈조의제문〉이 포함되어 있다는 제보를 받았다. 〈조의제문〉은 항우에게 죽음을 당한 초나라의 의제를 추모하는 글이었지만 실제로는 단종으로부터 보위를 찬탈한 세조를 비난하는 내용이었다. 이는 세조의 손자인 연산군의 정통성을 뒤흔드는 것이었다.

사건의 중대성을 인식한 유자광은 이극돈과 함께 연산군에게 그 내용을 보고함으로써 조선 최초의 사화인 무오사화를 촉발시켰다. 이 사건으로 수많은 선비들이 죽임을 당하고 유배형에 처해지자 유자광은 사림의 확고부동한 공적이 되었다.

유자광이 무오사화를 일으킨 배경에는 그런 사림에 대한 증오심과 함께 과거 김종직이 함양군수 시절 학사루에 걸린 자신의 시판을 철거한 사적인 원한까지 작용했다고 한다. 함양은 유자광의 처가였고 장인이 그곳의 향리였다.

그와 같은 악명에도 불구하고 유자광은 자신과 비슷한 처지에 있던 사람들에게는 매우 인간적인 면모를 보였다. 천민으로 궐내에서 일하던 도공이나 악공, 화원들은 물론 나인들에게도 온정을 베풀었던 것이다. 사옹원 제조로 복무하던 1504년(연산군 10년) 10월 1일에는 임금에게 수라청 나인들이 옮기는 수라상이 무거워 들기 어려우니 두 소반에 나누어 차려 어전에 들이기 편하게 해달라고 건의했다가 봉변을 당하기도 했다.

천출의 신화 허물어지다

1504년(연산군 10년) 임사홍이 획책한 갑자사화로 인해 공포정치가 자행되자 사림을 중심으로 반정의 기운이 무르익었다. 위기를 직감한 연산군의 측근들은 1506년(중종 1년) 자발적으로 주군을 끌어내고 중종을 추대했다. 이른바 중종반정이었다. 그 무렵 성희안, 박원종, 유순정 등 반정 3대장과 끈끈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던 유자광은 군사를 이끌고 반정에 적극 참여했다. 그 공으로 정국공신 1등에 책록되었지만 대간의 반대 때문에 실직을 얻지 못했다.

이듬해 중종이 68세의 원로였던 그의 품계를 정1품 대광(大匡)으로 올려주려 했지만 역시 대간이 들고 일어나는 바람에 무산되었다. 하지만 사림의 공세는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중종의 즉위와 함께 세력을 회복하기 시작한 사림은 그를 연산군 때 두 차례의 사화를 일으킨 원흉으로 지목하고 꾸준히 창끝을 겨누었던 것이다.

1507년(중종 2년) 조광보가 반정공신이었던 박원종과 노공필을 죽이려 했다가 체포되어 국문을 당하는 과정에서 유자광을 무오사화를 일으킨 소인배라고 비판했다. 이에 위기의식을 느낀 유자광은 김종직의 남은 무리가 자신을 모함한다면서 낙향하겠다고 밝혔다. 아니나 다를까 기회를 잡은 대간에서는 두 달여에 걸쳐 그를 탄핵하면서 그를 극형에 처하라고 상주했다.

신료들의 추궁에 지친 중종이 어쩔 수 없이 그를 파직하자 대간에서는 유자광에게 갑자사화를 주모했다는 죄목까지 추가하며 공세에 불을 지폈다. 결국 대간의 의견에 실력자인 좌의정 박원종까지 동의하면서 유자광의 인생은 파국으로 치달았다.

그해 4월 유자광은 평해로 유배되었고 공신록에서 삭제되었다. 그와 함께 손자 유승건, 유승곤까지 연좌되어 유배형에 처해졌다. 그로 인해 울분을 삼키던 유자광은 장님이 되었고, 5년 뒤인 1512년(중종 7년) 6월 73세의 나이로 유배지에서 세상을 떠났다.

유자광은 서얼이라는 태생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뛰어난 지모와 용력을 발휘하여 두 차례나 공신이 되면서 외면적으로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지만, 그 과정에서 사림과 척을 지면서 당대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소인이자 간신으로 손가락질 받았던 비운의 스타였다.

참고

  • ・ 《한국사 간신열전》 최용범·함규진. 페이퍼로드. 2007.
  • ・ 《유자광, 으뜸가는 공신에서 간악한 소인으로 전락한 사나이》 오종록. 내일을 여는 역사 11, 2003.
  • ・ 《조선의 공신들》 신명호. 가람기획. 2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