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장생

김장생

다른 표기 언어 金長生 동의어 희원, 希元, 사계, 沙溪, 문원, 文元
요약 테이블
출생 1548(명종 3), 서울
사망 1631(인조 9)
국적 조선, 한국

요약 예학의 태두로 평가되고 있으며, 그 이론적 배경은 이기혼융설이다. 그의 예학론은 임진왜란 이후 혼란해진 국가기강을 바로잡고 사회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통을 바르게 하는 것'에 중점이 두어졌다. 이러한 정통주의적 예학론은 이후 집권세력의 정치이념으로 중요한 역할을 했다.
김장생은 이이에게서 주자학을 전수받아 그 학통을 계승했다. 특히 그의 성사상을 이어받아 학문의 요체로 삼았으며, 이기심학관을 계승하여 일원적 이기심학관을 견지했다. 격물치지설에서도 율곡의 설에 따르고 있었다.

목차

접기
  1. 개요
  2. 관직생활
  3. 국가재조의 예학
  4. 예학의 이론적 배경
  5. 예학의 계승

개요

예학(禮學)의 태두로 평가되고 있으며, 그 이론적 배경은 이기혼융설(理氣混融說)이다.

그의 예학론은 양란(兩亂) 이후 혼란해진 국가기강을 바로잡고 사회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통(統)을 바르게 하는 것'[正統]에 중점이 두어졌다. 이러한 정통주의적 예학론은 이후 집권세력의 정치이념으로 중요한 역할을 했다.

관직생활

김장생의 글씨
김장생의 글씨

본관은 광산. 자는 희원(希元), 호는 사계(沙溪). 대사헌 계휘(繼輝)의 아들이며, 집(集)의 아버지이다.

송익필(宋翼弼)로부터 사서(四書)와 〈근사록 近思錄〉 등을 배웠고, 장성하여 20세 무렵에 이이(李珥)에게 사사했다. 1578년(선조 11) 학행(學行)으로 창릉참봉에 천거되었다. 1581년 종계변무(宗系辨誣)의 일로 명나라 사행(使行)을 가는 아버지를 수행한 뒤, 돈녕부참봉이 되었다. 이어 순릉참봉·평시서봉사(平市署奉事)·동몽교관·통례원인의를 거쳐 1591년 정산현감이 되었다. 임진왜란 때 호조정랑·군자감첨정(軍資監僉正)으로서 군량 조달에 공을 세웠다.

그뒤 남양부사·안성군수를 거쳐 1600년 유성룡(柳成龍)의 천거로 종친부전부(宗親府典簿)가 되었다.

1602년에 청백리에 뽑히고 이듬해 익산군수로 나갔으나, 북인(北人)이 득세하게 되자 1605년 벼슬을 버리고 연산으로 낙향했다. 광해군이 즉위한 뒤 잠시 회양·철원부사를 지냈다. 그러나 1613년(광해군 5) 영창대군(永昌大君)의 외할아버지이자 인목대비(仁穆大妃)의 아버지인 김제남(金悌男) 등이 역모를 꾀했다 하여 사사되거나 옥에 갇힌 계축옥사(癸丑獄事) 때 동생이 이에 관련됨으로써 연좌되어 심문을 받았다.

무혐의로 풀려나온 뒤 곧 관직을 사퇴하고 다시 연산에 은거하면서 학문에 몰두했다.

인조반정으로 서인이 집권하자 장령에 오르고, 이어 성균사업(成均司業)·집의·상의원정(尙衣院正)을 지내면서 원자(元子)를 가르치는 등의 일을 맡아보았다. 이 가운데 성균사업은 그를 위하여 새롭게 만들어진 것이었다. 그 뒤 좌의정 윤방(尹昉)·이조판서 이정구(李廷龜) 등의 천거로 공조참의를 지냈으며, 이어 부호군을 거쳐 1625년 동지중추부사에 올랐다.

다음해 다시 벼슬에서 물러나 행호군(行護軍)의 산직(散職)으로 낙향하여 황산서원(黃山書院)을 세워 이이·성혼을 제향했으며, 같은 해 용양위부사직(龍驤衛副司直)으로 옮겼다.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양호호소사(兩湖號召使)로 의병을 모아 공주로 온 세자를 호위하는 한편 군량미 조달에 힘썼다. 청나라와의 강화에 반대했으나 화의가 이루어지자 모은 군사를 해산하고, 강화도의 행궁(行宮)으로 가서 왕을 배알했다. 그해 형조판서가 되었으나 1개월 만에 물러난 뒤 용양위부호군으로 낙향했다.

그뒤 1630년에 가의대부가 되었으나, 조정에 나가지 않고 향리에 줄곧 머물면서 학문과 후진양성에 힘썼다. 연산에서 83세의 나이로 죽어, 진잠(鎭岑)에 장사지냈다.

국가재조의 예학

그가 활동하던 시기는 당쟁으로 동서(東西)와 남북(南北)이 분당·대립하고, 한편으로는 이괄(李适)의 난과 임진왜란·병자호란으로 국가체제가 위기에 빠져 토지제도·수취제도 등 여러 방면에서 누적된 폐단을 개혁해서 민생을 회복해야 할 때였다.

국가재조는 여러 측면에서 진행되었으며, 특히 사상계에서는 기존의 주자학적 정통주의가 훨씬 강력하게 대두되는 방향으로 이루어졌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그는 국가의 위기체제를 극복할 수 있는 이념적 체계로서 예(禮)에 주목했다. 예 실천의 방법으로서 개인의 수신(修身)을 강조하고, 이를 위하여 계구신독(戒懼愼獨)을 중요시했다.

즉 일상생활에서 항상 계구신독을 염두에 두고 심성의 온전함을 지키며 그 마음이 발(發)함에 모두 예에 맞게 행하여 하늘을 우러러 조금이라도 부끄러움이 없어야 한다고 했다.

이로써 예 실천의 주체인 인간 내면의 심(心)을 개발하고, 천리(天理)의 법칙을 깨닫도록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예의 강조는 〈가례 家禮〉를 통한 유교적인 가족질서 확립 노력으로 이어진다. 그는 〈근사록〉을 오랫 동안 연구하고 고금선유(古今先儒)의 여러 가지 설을 참조하여 이를 바탕으로 당시의 토속과 인정에 맞추어 〈가례〉를 고치고 보급하는 데 힘썼다.

예와 효의 관계를 "예가 아닌 것은 효를 다했다고 할 수 없다"라고 설명하면서 효를 백행(百行)의 근본으로 여겼다.

또한 관혼상제(冠婚喪祭)를 중시하여 "관혼상제는 가정에서의 일용(日用)의 체(體)이며 길흉(吉凶)의 수(需)에 통한다. 하나라도 폐(廢)하여 강습하지 않은 바 없다"고 하여 어느 곳 어느 때라도 시행해야 하는 것으로 보았다.

예학의 결론은 통(統)을 바르게 하는 것, 곧 정통(正統)에 있었다. 가정·사회·국가에서 그 나름의 기강과 질서가 서야 하는 것이며 그 근간이 되는 것이 통(統)이며 통을 뒷받침해주는 것이 예였다. 이러한 예학론을 중심으로 하는 정통주의 사상은 노론 집권세력의 정치이념으로서 기능했다.

예학의 이론적 배경

그가 예론에서 이론적 배경으로 삼았던 것은 율곡의 이기설(理氣說)이었다.

이황(李滉)의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에 반대하면서 율곡의 이기관(理氣觀)을 포괄적으로 계승하여, 이(理)와 기(氣)는 본래 스스로 섞여 있다고 하는 이기혼융설(理氣混融說)을 주장했다. 그는 이기의 관계를 불상잡(不相雜)·불상리(不相離)로 파악하고, 기(氣)의 유위유형(有爲有形)한 부제성(不齊性)과 이(理)의 무위무형(無爲無形)한 제일성(齊一性)의 관계에서 율곡의 이통기국설(理通氣局設)과 이일분수설(理一分殊說)을 이해했다.

또한 율곡의 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說)을 견지하고 이에 근거하여 사단칠정(四端七情)과 인심도심(人心道心)을 일원적으로 해석하여, 사단과 칠정이 이정(二情)이 아니며 인심과 도심이 이심(二心)이 아니라고 보았다.

따라서 심(心)이 발(發)한 때와 발하기 전의 존양성찰(存養省察)이 중요한 의미를 지니게 되고, 칠정이 사단으로, 인심이 도심으로 보존되고 발양되기 위해서 존심양성(存心養性)을 절실히 요구하게 된다. 여기서 계구신독에 대한 강조가 나오는 것이다.

한편 격물치지설(格物致知說)에서도 퇴계의 이자도설(理自到說)을 부정하고 율곡의 설을 충실히 계승했다. 격물(格物)이란 물리(物理)가 극처(極處)에 이르는 것이며 물리는 내 마음에 이미 갖추어져 있는 것이므로 물리가 내 마음에 도래한다고 보는 것은 잘못이라고 주장했다.

즉 사물의 이(理)는 인간의 지(知)와 관계없이 언제나 완전하게 존재하는 것이고, 인간의 지를 통하여 인식되느냐 되지 않느냐에 무관하게 존재하는 것이므로, 문제는 다만 나의 지(知) 여하에 따라 인식의 여부가 결정된다는 것이다.

그는 물아일리(物我一理), 주객합일(主客合一)인 내 마음의 인식 능력으로 물리를 체득하는 이론을 추구했다. 따라서 격물이라는 것도 사물의 이(理)를 객관적으로 인식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활연관통(豁然貫通)의 체득에서 성취되는 것이라고 보았다. 이어서 그는 격물과 치지는 비록 구별하여 표현되지만, 물리가 일리(一理)이며 격물과 치지가 모두 활연관통의 양면이기 때문에 그 실질은 하나라고 생각했다.

김장생은 이이에게서 주자학을 전수받아 그 학통을 계승했다.

특히 그의 성사상(誠思想)을 이어받아 학문의 요체로 삼았으며, 이기심학관(理氣心學觀)을 계승하여 일원적(一元的) 이기심학관을 견지했다. 격물치지설에서도 율곡의 설에 따르고 있었다. 그러나 "율곡은 박문(博文)의 공이 많지만 약례(約禮)에서는 오히려 지극하지 못하다"고 했듯이 예학에 더욱 깊은 관심과 노력을 기울였다.

예학의 계승

송익필에게서 배운 예론을 깊이 연구하여 당시 나라의 전례(典禮)나 모든 행상에 의문이 있으면 그에게 자문할 정도로 예학에 정통했다.

또한 학문을 아들 집에게 이어받게 한 조선 예학의 태두로 예학파의 주류를 형성하게 했다. 그의 문인으로는 아들 집과 송시열(宋時烈)·송준길(宋浚吉)·이유태(李惟泰)·강석기(姜碩期)·이시직(李時稷)·최명길(崔鳴吉)·이덕수(李德洙)·최명룡(崔命龍) 등이 있다. 이들을 중심으로 기호학파(畿湖學派)가 크게 성하여 영남학파(嶺南學派)와 쌍벽을 이루었다.

연산 돈암서원(豚巖書院)을 비롯하여 안성 도기서원(道基書院) 등에 제향되었으며, 뒤에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저서로는 〈상례비요 喪禮備要〉·〈가례집람 家禮輯覽〉·〈전례문답 典禮問答〉·〈의례문답 疑禮問答〉 등 예에 관한 것과, 〈근사록석의 近思錄釋疑〉·〈경서변의 經書辨疑〉와 시문집을 모은 〈사계선생전서 沙溪先生全書〉가 남아 있다. 1688년(숙종 14) 문묘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문원(文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