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순남

김순남

다른 표기 언어 金順男 동의어 김현명, 金顯明
요약 테이블
출생 서울, 1917. 5. 28
사망 1983, 함남
국적 북한

요약 김순남은 월북 작곡가로 우리나라 음악 발전에 기여했고 많은 해방가요를 작곡했다. 어머니에게서 피아노를 배운 후 경성사범학교 음악부에 다니면서 작곡을 시작했다. 그 후 보통학교 교사로 있으면서 왕성한 작곡활동을 했다.
22세 때 일본 프롤레타리아 음악동맹 조직부장이었던 하라 다로의 지도를 받았다. 1945년 8월 16일 강장일과 공동발의로 조선음악건설본부를 결성했다. 이때 지은 노래가 <건국행진곡>이다. 1947년 미군정의 좌익색출 때 <인민항쟁가>를 지었다는 이유로 체포령이 내려 도피하다가 강장일 등과 함께 월북했다. 탄생 80돌인 1998년에는 그가 1945년 초에 작곡한 <자유의 노래>를 비롯해 <해방의 아침> 등 21곡이 러시아에서 발굴되기도 했다. 그는 해방가요 외에 <산유화> 등 뛰어난 가곡과 기악곡을 썼으며, 현대음악적 기법을 전통음악과 결합한 세계적 음악가로 평가받고 있다.

월북 작곡가로 우리나라 음악 발전에 기여했고 많은 해방가요를 작곡했다.

상인인 아버지 김종식과 국민학교 교사인 어머니 이보경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어머니에게서 피아노를 배웠다.

교동보통공립학교를 졸업하고 경성사범학교 음악부에 다니면서 작곡을 시작했다. 그 후 보통학교 교사로 있으면서 왕성한 작곡활동을 했다. 1937년 일본 도쿄 음악학교 작곡부 교수인 시모후사 간이치[下總皖一]로부터 작곡을 배웠고 도쿄 고등음악학원에 입학했다. 22세 때 일본 프롤레타리아 음악동맹 조직부장이었던 하라 다로[原太郞]의 지도를 받다가 1940년 학교를 자퇴하고 도쿄 제국음악학원 기악부로 전학했다.

당시 일본현대작곡가연맹 주최의 작곡발표회에서 일본 중진작곡가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로 음악적 재능을 인정받았다.

1942년 귀국하여 1944년 문세랑과 결혼한 뒤 경성여자의학전문학교 음악강사로 일했다. 조선음악협회 주관의 양악대연주회에서 경성합창단을 지휘했고 곧바로 경성합창단 이사로 취임했다. 또 당시 음악의 지하운동 서클인 성연회에 가담하여 신막·강장일·이범준 등과 8·15해방 이전까지 활동했다.

1945년 8월 16일 강장일과 공동발의로 음악가대회를 소집하여 조선음악건설본부를 결성했다.

이때 지은 노래가 〈건국행진곡〉이다. 같은 해 9월 15일 조선 프롤레타리아 음악동맹이 조선음악가동맹으로 흡수·통일되면서 더욱 많은 활동을 하여〈해방의 노래〉·〈인민항쟁가〉·〈농민가〉등을 작곡했다. 경성방직에 들어가면서 민족음악에 대한 고민을 하기도 했다. 1946년 2월 민주주의 민족전선 중앙위원이 되었고 그해 5월 해방가요발표 대연주회를 주도했으며, 관련 문화단체의 음악강의나 심사위원으로 활동했다.

연극에도 많은 관심이 있어 〈님〉·〈3월 1일〉 등에서 음악을 담당하기도 했다.

1946년 남기옥과 남로당에 입당, 1947년 미군정의 좌익색출 때 〈인민항쟁가〉를 지었다는 이유로 체포령이 내려 도피하다가 강장일 등과 함께 월북했다.

북한에서는 해주음악전문학교 임시 작곡교수로 있으면서 한시형·장일남 등을 가르쳤다. 북한에서〈인민항쟁가〉의 작곡가인 그의 등장은 떠들썩한 사건이었다. 1948년 박은용의 독창회에서〈산유화〉·〈진달래꽃〉등을 발표했고 그해 8월 해주 남조선인민대표자로 선출되었다.

6·25전쟁 이후〈빨치산의 노래〉·〈인민유격대의 노래〉·〈승리의 깃발〉·〈개선행진곡〉등 많은 곡을 작곡했다.

1951년 3월 조선음악동맹 부위원장과 작곡분과·평론분과 위원직을 맡았다. 소련 차이코프스키 음악학원에서 1952년부터 2년 동안 작곡과 교수인 하차투리안에게 사사받았다. 1953년 남로당 숙청작업에 따라 북한으로 귀환당하여 모든 공직을 박탈당하고 창작활동을 금지당했다. 1960년경 신포기업소에서 노동자생활을 하면서 창작활동을 다시 시작했고, 민요를 발굴하여 악보로 출판하기도 했다. 이때 작곡한 노래가〈놀아라, 사랑하는 기대야〉이고 바이올린 협주곡〈이른 봄〉도 이때 작곡했다.

1970년경 폐결핵에 걸려 요양하다가 1983년 67세의 나이로 죽었다.

탄생 80돌인 1998년에는 그가 1945년 초에 작곡한 〈자유의 노래〉를 비롯해 〈해방의 아침〉·〈농민의 노래〉·〈독립의 아침〉 등 21곡이 러시아에서 발굴되기도 했다. 그는 50여 곡의 해방가요 외에 〈산유화〉 등 뛰어난 가곡과 기악곡을 썼으며, 현대음악적 기법을 전통음악과 결합한 세계적 음악가로 평가받고 있다.

음악세계

김순남의 작품은 하라 다로의 영향을 받았는데, 해방 직후 조선음악가동맹에서 활동하면서 본격적으로 작품에 반영되었다. 좌파의 성향이 짙었으나, 음악을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삼아 작품성을 떨어뜨린 적은 없었다.

음악 자체의 민족성 추구에 관심을 기울였고 사실주의 내용에 알맞는 표현기법을 써서 내용을 분명히 했다. 특히 김소월의 시에 곡을 붙인 것은 정치성보다는 민족성을 중요시하여 작곡했다. 음악가의 집을 운영하면서 음악의 발전을 꾀했으며 국악원에서 국악을 공부하여 민족음악의 기초를 닦았다.

그는 많은 해방가요를 작곡했는데 전통장단과 음계를 쓰는 노력을 보였다. 많은 가극작품을 썼고 임화 등의 시인의 시를 노래화했다. 그가 소련을 방문했을 때 그의 악보를 본 쇼스타코비치는 "조선에도 이런 작곡가가 있었느냐"고 감탄했다고 한다.

1953년 북한으로부터 부르주아 음악작법이며 반인민적 형식모더니즘이라는 비판을 받고 창작활동을 금지당했으나 1960년경 노동자생활을 하면서 "좋은 곡이란 음역이 좁아야 하며 선율이 쉽고 도약이 없어야 한다"는 수기를 쓰기도 했다. 말년에 이런 기조와 함께 대곡의 합창곡, 독창곡, 바이올린 독주곡 등을 쓰면서 새롭게 창작활동을 했으나 투병생활로 더이상 창작을 할 수 없게 되었다.

주요작품으로는 가곡집으로 〈산유화〉(1947)·〈자장가〉(1948) 등이 있고, 기악곡으로〈피아노 소나타 2번〉(1944)·〈피아노 3중주〉(1945)·〈관현악과 성악을 위한 바라아테〉(1946)·〈제1교향곡〉(1947) 등이 있으며, 해방가요로는〈남조선형제를 잊지 말아라〉와 그밖의 노래로〈조(朝)·중(中) 친선의 깃발〉·〈고향의 어머니〉·〈탱크병의 노래〉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