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용

기용

다른 표기 언어 Jeanne-Marie Bouvier de La Motte Guyon, Madame Du Chesnoy
요약 테이블
출생 프랑스 몬타르기스, 1648. 4. 13
사망 1717. 6. 9, 블루아
국적 프랑스

요약 프랑스의 신비주의자·작가.
결혼 전의 성은 Bouvier de La Motte. 별칭은 Madame Guyon.

17세기 프랑스 신학논쟁의 중심인물로 정적주의의 주창자이다. 영원한 구원에 이르기 위해서 영혼의 극단적인 수동성과 중립을 주장했으며, 그 안에서 사람은 하느님의 대리자가 된다고 믿었다.

16세에 셰스누아의 자크 기용 경과 결혼해서 가정생활을 하다가 1676년 남편이 죽은 뒤 오랫동안 느껴왔던 신비체험에 몰두하게 되었다. 바르나비트 프리아 프랑수아 라콩브를 통해 오랜 기간 내적 신앙의 성숙을 거치면서, 자녀들을 떠나 라콩브와 함께 제네바·투린·그레노블을 여행했다(1681~86).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그녀가 가르친 내용의 이단적인 성향(세상과 교회의 기구들을 배척하는 경향)은 지방주교들의 의혹을 샀으며, 그 지방을 떠나라는 압력을 받았다.

이 시기에 기용은 자신의 여러 저술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간략하고 가장 쉬운 기도방법 Moyen court et très facile de faire oraison〉(1685)을 출판했다. 1687년 라콩브는 투옥되어 감옥에서 죽었고, 기용은 1688년에 체포되었으나 몇 개월 만에 맹트농 부인의 중재로 석방되었다. 맹트농은 루이 14세의 후처로 기용을 궁정사회에 소개한 부인이었다.

석방된 후 기용은 유력한 가문 출신의 아베 드 페늘롱(1651~1715)을 그녀의 수제자로 삼았다. 페늘롱은 기용의 가르침 속에서 자신의 영적 의문에 대한 몇 가지 해답을 얻게 되었다. 1694년 정적주의 색채가 강한 페늘롱의 저술은 사람들을 경악시켰고, 복잡한 정치적·종교적 책략이 난무한 이시에서 열린 총회(1695)에서 페늘롱은 기용의 가르침을 옹호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마 가톨릭 교회는 정적주의를 공식적으로 정죄했다. 기용은 체포되어 수감되었고, 페늘롱은 소책자를 통해 로마 가톨릭 교회에 맞서 싸움을 계속했다. 1703년 석방된 후 기용은 블루아에 은거하면서 집필에 몰두했다. 그녀의 저술들은 1712~20년에 출판되었다(45권, 재판 1767~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