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묘사화

기묘사화

다른 표기 언어 己卯士禍

요약 1519년(중종 14) 11월 남곤·심정·홍경주 등의 재상들에 의해 조광조·김정·김식 등 사림이 화를 입은 사건. 중종 즉위 이후 정국을 주도한 훈구파에 대해 신진 사림파들이 정계에 진출해 세력을 늘려가면서 갈등을 일으켰다. 특히 사림파들은 중종반정의 공신 중 공이 없음에도 공신이 된 자들을 솎아 내야 한다고 주장하고 이를 일부 관철시켰다. 그러자 훈구파들은 사림파들이 붕당을 지어 왕권을 위협하고 국정을 어지럽힌다고 고해 중종은 이를 수용해 사림파들을 숙청했다. 이후 훈구파가 다시 정계의 중심이 되었으나 사림의 대세는 막을 수 없었다.

기묘사화
기묘사화

성종 때부터 본격적으로 진출한 사림은 연산군 때 2차례의 사화를 겪으면서 위축되었다.

그러나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연산군이 폐위되고 주도권을 장악한 반정공신들은 연산군 때 악정을 개혁하는 과정에서 사림을 수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중종 역시 시간이 지나면서 공신세력의 독주를 저지할 수 있는 새로운 세력으로서 사림을 주목했다. 그러한 배경에서 일시 물러났던 사람들이 대거 중앙정치에 등장했다.

이들은 조광조 등을 중심으로 세력을 형성하여 왕도정치 이념에 입각한 개혁을 추진했다.

이들은 경연을 강화함으로써 왕에 대한 교육을 강화하여 중종을 모범적인 군주로 만들려 노력했다. 또한 기존의 언론기관을 기반으로 활동하던 자신들의 한계를 인식하고 좀더 적극적으로 권력에 관여하기 위해서 낭관(郎官)에게 결정에 참여하는 권한을 부여하여 실무의 결정과 집행과정에서 재상들을 견제할 수 있는 구조를 형성했다. 이러한 변화 위에서 천거제를 실시하여 지방의 사류와 성균관의 학생들을 정치에 참여시켰고, 공론정치를 강화하여 재지사족(在地士族)의 의견도 정치에 수렴하려고 노력했다. 또한 사림은 향촌의 운영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그것은 구체적으로 향약(鄕約)의 실시로 나타났다. 중국의 여씨향약(呂氏鄕約)을 수용하여 〈언해여씨향약〉을 통해 일반민에게까지 보급했는데, 그들의 호응에 힘입어 단시일 내에 전국적으로 실시를 보게 되었다.

이러한 사림의 움직임에 대하여 반정공신들은 초기에는 호의적이었으나 낭관권의 형성, 천거제의 시행, 현량과의 실시, 향약의 실시 등으로 인해 자신들의 기득권이 위협당하자 사림들과 대립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사림들이 언론을 이용하여 공신들의 잘못을 탄핵하자 갈등은 점차 심해졌다.

사화의 직접적인 계기가 된 것은 1519년(중종 14)에 다시 가열된 중종반정공신의 위훈삭제(僞勳削除) 문제였다. 사림은 일찍부터 이 문제를 주목하여 공이 없이 공신에 책봉된 사람들을 훈적(勳籍)에서 삭제할 것을 건의했으나 큰 성과는 없었다.

그러나 사림의 힘이 커지면서 1519년에 이 문제를 다시 거론하여 마침내 공신의 3/4에 이르는 76명의 공신호를 삭탈하고 그들에게 분급한 토지와 노비를 몰수하게 했다. 중종은 공신세력에 대한 견제가 필요했기 때문에 사림들을 지원했으나 사림의 독주를 원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므로 대규모의 공신 삭제와 같이 사림의 독주를 허용하는 조처에는 기본적으로 반대했다. 그러나 당시의 사림의 주장에 밀려 삭제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서 중종은 위기감을 느끼게 되었고 사림을 견제할 방법을 모색했다. 피해를 입은 공신들 역시 사림에 대한 적극적인 대응책을 모색하고 있었다. 이미 사림의 탄핵으로 상당수 중앙정치에서 탈락되어 있어 상대적으로 권력이 위축되어 있던 상황에서 대규모 공신 삭직은 자신들의 존립을 위협하는 것이어서 심한 위기의식을 가졌다.

김전(金銓)·남곤·고형산(高荊山)·심정 등은 희빈홍씨(熙嬪洪氏)의 아버지인 홍경주를 중심으로 반격의 기회를 노리게 되었다.

이들은 희빈홍씨를 통해 "나라의 인심이 모두 조광조에게 돌아갔다"고 과장하면서 그대로 둘 경우 왕권까지 위태롭게 할 것이라고 주장하고, '주초위왕'(走肖爲王:走肖는 趙의 破字)이라는 글자를 나뭇잎에 새겨 왕이 보게 함으로써 위기의식을 갖게 했다. 1519년 11월에 홍경주 등은 조광조 등이 붕당을 만들어 중요한 자리를 독차지하고 임금을 속이고 국정을 어지럽혔으니 죄를 주어야 한다고 건의하자 중종은 이를 받아들였다.

이로 인해 사림들은 큰 피해를 입었는데, 조광조는 능주(綾州)로 귀양가서 사사(賜死)되었고, 김정·기준(奇遵)·한충(韓忠)·김식 등은 귀양가서 사형당하거나 자결했다. 이밖에 김구(金絿)·박세희(朴世熹)·박훈(朴薰)·홍언필(洪彦弼)·이자(李)·유인숙(柳仁淑) 등 수십 명이 유배·파직을 당했다.

사림들이 언관과 낭관을 중심으로 활동했던만큼 피해를 입은 이들 역시 언관과 낭관의 핵심 인물들이었다. 이것은 무오사화(戊午士禍)에 피해를 입은 사람들이 주로 언관의 핵심 인물들이었던 것과 대조가 된다(→ 기묘명현).

사화 이후 공신세력이 요직에 임명되어 주도권을 장악하게 되자, 이들은 사직된 공신들에게 다시 공신호를 반환하여 자신들의 세력을 강화하면서, 사림의 권력기반이었던 낭관권의 혁파에 노력했다.

이들은 낭관권의 핵심요소인 자천제(自薦制)나 낭관들의 정치적 결속을 문제삼으면서 사림이 강화될 수 있는 길을 막으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은 일시적인 효과가 있었을 뿐이었다.

이는 공신들의 정치적 비리를 공격하는 사림의 정치이념이 당시의 상황에서 설득력이 있는 것이었고, 그러한 근거 위에서 언권과 낭관권이 서 있었으므로 근본적인 불식이 어려웠기 때문이다. 또한 현실적으로 광범위한 재지사족을 기반으로 하는 사림의 중앙진출을 막을 수 없었다.

결국 기묘사화는 사림이 주도권을 강화하는 과정에서 기득권자인 공신재상들의 반격으로 야기된 정치적인 사건이었으나, 사림정치로 나아가는 대세를 바꾸지는 못했다.→ 기묘록, 기묘명현, 사화

기묘사화
기묘사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