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산도

금강산도

다른 표기 언어 金剛山圖 동의어 풍악도, 해산도, 海山圖, 해악도

요약 풍악도·해산도·해악도라고도 불린다. 금강산은 영산으로 널리 숭배되고 자연경관이 빼어나 그림의 소재로 많이 되었고 한국 실경산수화의 발전에 도움이 됐다. 18세기 정선은 금강산 실경을 독특한 화풍으로 그려 진경산수화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
만폭동·불정대·총석정·정양사·묘길상·보덕암·명경대·장안사·구룡폭포·표훈사·혈성루·만물초·해산정·비로봉 등이 주로 그려졌다.
조선 후기에는 민화와 목판화로도 널리 제작되었고 일제 강점기에 수묵담채화나 유화로도 다루어졌고 그 전통이 오늘날에 이어진다.

금강산전도(金剛山全圖)
금강산전도(金剛山全圖)

풍악도·해산도(海山圖)·해악도라고도 불렀다.

불교의 성산과 선계의 영산으로 널리 숭배되었던 금강산신앙과 자연의 빼어난 조화력이 응집된 절경을 통해 승경낙도(勝景樂道)하던 풍류사상을 배경으로 제작되었다. 화가들의 직접 탐승에 의한 사생과 이를 토대로 정형화된 범본(範本)에 의해 그려지면서 한국 실경산수화의 발전에 선도적인 구실을 했다. 형식은 일만이천봉을 한 화면에 담은 전경도(全景圖) 또는 총도(總圖)와 실경별로 따로 그린 각경도로 구분된다. 각경도로는 만폭동·불정대·총석정·정양사·묘길상·보덕암·명경대·장안사·구룡폭포·표훈사·혈성루·만물초·해산정·비로봉 등이 많이 그려졌다.

금강산이 그림으로 제작되기 시작한 것은 고려 후기로 〈화엄경〉의 〈제보살주처품 諸菩薩住處品〉에 나오는 담무갈보살(曇無竭菩薩)이 머무는 불교의 성지로 알려지면서부터였다. 금강산에 담무갈보살이 머문다는 믿음은 중국의 원나라 황실과 귀족층에까지 알려져 뛰어난 절경과 함께 천하의 명산으로 크게 각광을 받게 되면서 황실을 비롯해 금강산을 직접 참배하지 못한 사람들을 위해 그려지기 시작했다.

고려 후기에 제작된 금강산도는 현재 전하지 않지만 노영(魯英)이 1307년 그린 〈담무갈현신도〉의 배경을 이루는 금강산 암봉의 부분적인 모습을 통해 화풍을 엿볼 수 있다.

조선 초기에는 명나라 황실과 중국사신을 위한 사대용으로 금강산도가 많이 그려졌다. 황제에게 보내는 것은 비단 바탕에 옥축으로 포장했고, 사신들 선물용은 종이 바탕에 오매(烏梅)로 축을 했다. 이들 그림은 안귀생(安貴生)·배련(裴連)과 같이 당시 최고의 화원들에 의해 제작되었으며, 사신들이 보고 크게 찬탄했을 정도로 정교하고 뛰어났다고 한다.

1469년 조선에서 구해간 금강산도가 비로봉을 주봉으로 일만이천봉을 한 화폭에 담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어 전경도 형식이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금강산도는 17세기를 전후해 김제(金禔)·이경윤(李慶胤)·조속(趙涑) 등의 문인화가들에 의해 그려지면서 일반 감상용으로 성행하기 시작했으며, 이러한 흐름은 18세기 전반 정선(鄭敾)에 의해 대성되었다. 정선은 여러 차례 금강산을 탐승하면서 그 특색을 파악하고 실경에서 받은 감동을 승화시켜 독특한 화풍을 형성하고 조선 후기 진경산수화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

음양의 조화원리를 토대로 기존의 수묵화법과 새로운 남종화법을 융합하고, 예각적인 필법과 창윤한 묵법의 대조적인 기법을 통해 이룩된 그의 화풍은 심사정(沈師正)·최북(崔北)·김유성(金有聲)·김응환(金應煥)·이인문(李寅文)·김홍도(金弘道)·정황(鄭榥)·정충엽(鄭忠燁)·장시흥(張始興)·이유신(李維新)·김윤겸(金允謙)·김득신(金得臣) 등에게 파급되어 정선파가 형성되면서 조선 후기 화단을 크게 풍미했다.

그리고 통신사절단을 따라 도일했던 최북과 김유성 등은 이케노 다이가[池大雅]와 우리카미 교구도[浦上玉堂]와 같은 일본 에도 시대[江戶時代] 남화의 대가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조선 후기에는 이밖에 서민들의 금강산도에 대한 수요가 크게 늘어나 민화와 목판화로도 널리 제작되었다. 특히 민화의 경우 신선사상 등의 기복적이고 길상적인 민간신앙과 결부되어 사랑방의 장식용 병풍으로 많이 그려졌으며, 정선화풍의 도식화 현상과 함께 형태의 추상적인 변형과 파격적인 구도를 통해 독특한 조형세계를 보여주었다.

금강산도는 일제강점기에도 지속되어 일본화가들까지 상당수 참여했을 정도로 활발하게 그려졌으며, 수묵담채화와 함께 유화(油畵)로도 다루어지면서 사생적이고 사실적인 풍경화로 발전하였다.

이러한 전통은 8·15해방 이후에도 계승되었으며, 특히 북한에서는 장엄한 구도와 극사실적인 필치와 밝은 색채 등을 사용해 대규모의 작품을 국토예찬의 선양물로서 제작하고 있다. 대표적인 작품으로 정선의 〈만폭동〉(서울대학교 박물관)·〈해악전신첩〉(간송미술관)·〈금강전도〉(호암미술관)를 비롯하여 김홍도의 〈금강4군첩〉(개인소장), 이인문의 〈단발령망금강산도〉(개인소장), 김응환의 〈금강산화첩〉(개인소장), 정수영의 〈해산첩〉(국립중앙박물관), 김윤겸의〈금강산화첩〉(국립중앙박물관), 김규진의 〈총석절경도〉(1920, 창덕궁), 변관식의 〈외금강삼선암도〉(1959, 개인소장), 문화춘의 〈내금강의 아침〉(1970, 조선미술박물관)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