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뤼네발트

그뤼네발트

다른 표기 언어 Matthias Grünewald 동의어 마티아스 그뤼네발트
요약 테이블
출생 뷔르츠부르크 주교관구 뷔르츠부르크, 1455~80경
사망 1528. 8, 마크데부르크 대주교관구 할레
국적 독일

요약 종교적 주제를 다룬 그의 작품은 강렬한 색채와 격정적인 선을 통해 환상적인 표현을 창조해내고 있다. 알자스 남부 이젠하임에 있는 성 안토니우스 교단 수도원의 제단화는 그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뷔르츠부르크에서 태어난 것으로 전해지지만 그뒤의 행적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 1509년경 궁정화가가 되었고, 마인츠 대주교 우리엘 폰 게밍겐의 수석 미술 담당관이 되어 아샤펜부르크에 있는 성을 개축하는 작업을 감독했다. 1515년경에 주문을 받아 그린 〈이젠하임의 제단화〉는 스웨덴의 성 비르기타가 쓴 대중적이고 신비주의적인 〈묵시록〉에 바탕을 두고 그린 것으로 그의 작품 중 가장 걸작으로 알려져 있다. 보는 이로 하여금 전율에 젖게 만드는 감정표현의 격렬함은 표현주의 미술의 선구적인 작품으로서 손색이 없다는 평가를 받는다.

종교적 주제를 다룬 그의 작품은 강렬한 색채와 격정적인 선을 통해 환상적인 표현을 창조해내고 있다.

알자스 남부 이젠하임에 있는 성 안토니우스 교단 수도원의 제단화(1516 이전)는 그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모든면으로 보아 '거장 마티스 그뤼네발트'는 1480~90년경에 아샤펜부르크에서 활동했던 또다른 화가 마티스와는 다른 인물로 여겨진다. 그뤼네발트(이 이름은 17세기에 붙여진 것임)의 작품으로 확인된 최초의 그림 〈멸시 당하는 그리스도 Mocking of Christ〉는 50세가 넘은 나이든 화가의 작품이 아니라 갓 장인(匠人)이 된 젊은이의 그림처럼 보인다.

그는 1500년경의 젤리겐슈타트암마인이나 아샤펜부르크의 문헌에 처음 등장하고 있다.

1509년경 그뤼네발트는 궁정화가가 되었고, 그뒤 마인츠 대주교 우리엘 폰 게밍겐을 모시는 수석 미술 담당관이 되었다. 대주교는 젤리겐슈타트에서 강을 따라 세 시간쯤 걸어 내려간 곳에 있는 아샤펜부르크에서 살았다.

그뤼네발트는 아샤펜부르크에 있는 대주교의 성을 개축하는 작업을 감독했는데, 그 작업중에 정교한 굴뚝을 만들기도 했다.

1510년경에 그뤼네발트는 프랑크푸르트의 상인 야코프 헬러로부터 알브레히트 뒤러가 얼마 전에 완성한 〈성모 승천 Assumption of the Virgin〉이라는 제단화 양옆에 2개의 고정된 날개그림을 덧붙여 달라는 주문을 받았다. 4명의 성인을 그린 이 2편의 그림(지금은 프랑크푸르트 시립미술협회와 카를스루에 국립미술관에 나뉘어 소장되어 있음)은 주로 회색조로 채색되어 있고, 미술가로서의 그의 능력이 이미 절정에 이르렀음을 보여준다.

주로 검은 분필을 이용하고 노란색이나 하얀색으로 약간의 하이라이트를 넣는 소묘와 마찬가지로, 이 날개그림도 색채를 사용하지 않으면서 색채효과를 내고 있다.

1515년경에 그뤼네발트는 평생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중요한 주문을 받았다. 이젠하임에 있는 성 안토니우스 교단의 수도원을 이끌고 있는 이탈리아인 기사단 분단장인 구이도 구에르시가 1505년경 스트라스부르의 니클라우스 하그노버가 조각한 중앙 제단의 성골함(聖骨函)을 위해 일련의 날개 그림을 그려달라고 부탁한 것이다.

고향 밖에서는 한번도 활동한 적이 없는 화가에게 그처럼 규모가 크고 중요한 일을 맡긴 이유는 영원히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구에르시가 주제선택과 표현방식에 대해 약간의 발언권을 가졌던 것은 분명하지만, 이젠하임의 제단화는 그뤼네발트가 타고난 재능을 충분히 발휘할 기회를 주었으며, 주로 스웨덴의 성 비르기타가 쓴 대중적이고 신비주의적인 〈묵시록 Revelations〉(1370경)에 바탕을 두고 그렸다.

그뤼네발트에게 그림을 주문한 또 한 사람의 중요한 성직자는 아샤펜부르크의 성당 참사회원인 하인리히 라이츠만이었다.

그는 일찍이 1513년에 아샤펜부르크의 성 페트루스와 알렉산데르 교회에 있는 마리아슈네 예배당에 제단화를 그려달라고 부탁했고 그뤼네발트는 1517~19년에 이 작품을 그리기 시작했다(오늘날 이 그림은 조각조각 해체되어, 화폭 하나는 뷔르템베르크의 슈투파흐에, 또 하나는 프라이부르크임브라이스가우에 보존되어 있음).

그뤼네발트는 1519년경에 결혼한 것 같으나, 그리 행복하지는 못했던 것 같다(적어도 17세기에 기록된 문헌에는 그렇게 적혀 있음). 그의 아내는 아들 안드레아스를 데려왔고, 그뤼네발트는 그 아들을 양자로 삼았다.

그뤼네발트는 결혼한 뒤 자기 이름에 이따금 아내의 성(姓)인 나이타르트를 덧붙였는데, 일부 문헌에 M과 G 및 N이라는 글자를 짜맞추어 만든 결합문자나 마티스 나이타르트, 또는 마티스 고타르트 나이타르트라는 이름이 나오는 것은 바로 이때문이다.

1514년에 우리엘 폰 게밍겐이 죽고, 알브레히트 폰 브란덴부르크가 마인츠를 다스리는 제후가 되었다(1518 추기경에 임명). 그뤼네발트는 몇 해 동안 궁정을 떠나 있을 수도 있었지만, 마지막 작품들을 보면 약 10년 동안 제후를 위해 일했던 것을 알 수 있다. 죽은 뒤에 작성된 재산목록에 궁정 신하의 값비싼 예복과 보석까지 들어 있는 것으로 보아, 그가 독일에서 가장 세속적이고 세련된 궁정생활에 몸담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그뤼네발트는 알브레히트를 위해 그의 가장 화려한 작품 가운데 하나인 〈성 에라스무스와 성 마우리티우스 The St. Erasmus and Mauritius〉(에라스무스는 사실상 알브레히트를 그린 초상임)를 그렸는데, 이 작품은 오늘날 뮌헨의 알테 피나코테크에 소장되어 있다. 1526년 그는 추기경을 위해 일하던 것을 그만두었는데 이는 1525년에 일어난 농민반란에 동조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그는 새로 등장한 프로테스탄트의 주장에 동조하는 프랑크푸르트와 할레 같은 도시를 방문하면서 생애의 마지막 2년을 보냈다. 할레에서는 시의 상수도공사를 감독하는 일에 참여했다. 죽은 뒤에 발견된 소지품 중에는 루터파의 소책자와 서류들이 있었다.

그뤼네발트에 대한 평가

회화적이고 표현력이 풍부한 그뤼네발트의 작품은 지금도 미술사에서 가장 독특한 것으로 꼽힌다.

지금까지 남아 있는 10점 남짓한 그림(일부는 여러 개의 패널로 이루어져 있음)과 약 35점의 소묘는 근대에 와서 엄격한 보호와 면밀한 검토를 받았다. 천재적인 예술가였지만, 그의 생애는 대부분 좌절과 혼란으로 가득 차 있었다. 예를 들어 아샤펜부르크의 굴뚝과 할레의 분수는 한번도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으며, 그에게는 진정한 제자도 없었고, 조수조차 거느리지 못했던 것 같다. 또한 판화제작을 기피했기 때문에 그의 영향력과 명성은 제한될 수밖에 없었다. 이 점에서 그는 같은 시대에 살았던 독일의 알브레히트 뒤러와 뚜렷한 대조를 이룬다.

색채효과와 극적인 주제표현방식은 그가 여러 번 그린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 Crucifixion〉들에 가장 잘 나타나 있다(미국 워싱턴 국립미술관, 스위스 바젤 미술관, 독일 카를스루에 미술관 소장, 〈이젠하임 제단화 Isenheim Altarpiece〉는 프랑스 콜마르의 운터린덴 미술관에 소장).

그뤼네발트의 작품은 줄곧 높은 평가를 받았지만, 17세기에 이르러 그뤼네발트라는 화가 자신은 거의 잊혀진 존재가 되었다.

오늘날 우리가 그뤼네발트에 대해 갖고 있는 약간의 지식은 그뤼네발트의 열렬한 숭배자이며 처음으로 그의 전기 〈독일 아카데미〉(1675)를 쓴 독일 화가 요아힘 폰 잔트라르트 덕분이지만, 모호한 근거로 그를 그뤼네발트라고 잘못 부른 것도 잔트라르트였다.

그의 인기가 가장 낮았던 19세기 중엽에 독일 학자들은 그뤼네발트를 '뒤러의 유능한 모방자'로 규정했다. 그러나 19세기말과 20세기초에 주로 독일 표현주의 예술가들이 합리주의와 자연주의에 반기를 들면서, 그뤼네발트의 생애에 대한 철저하고 학문적인 재평가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오늘날 그뤼네발트의 예술은 격변하던 당시 사회에 대해 고통스럽고 혼란스러우나 지극히 개성적이고 영감에 찬 반응이었다고 인정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