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드워드 그레이

에드워드 그레이

다른 표기 언어 그레이 , Sir Edward, 3rd Baronet Grey
요약 테이블
출생 런던, 1862. 4. 25
사망 1933. 9. 7, 잉글랜드 노섬벌랜드 엠블턴 근처 팰러던
국적 영국

요약 영국 정치가.
1916년부터는 1st Viscount Grey of Fallodon이라고도 함.

영국 역사상 가장 오랜 기간(1905~16) 외무장관으로 재임하였으며 제1차 세계 대전이 시작될 때 "등불은 유럽에서 꺼져가고 있다. 우리 생애에는 다시 그 빛을 볼 수 없을 것이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1832년 선거법 개정안을 통과시킨 총리 그레이 백작 2세의 친척인 그는 철저하게 휘그 자유당 전통 속에서 자라났다. 1882년 할아버지의 준남작위와 재산을 물려받았고 자작으로 봉해진 1885년부터 1916년까지 하원의원을 지냈으며, 1923~24년에는 시력을 거의 잃어가는 중에도 상원에서 야당인 자유당을 이끌었다. 남아프리카 전쟁(1899~1902)을 놓고 당이 분열되었을 때는 H. H. 애스퀴스가 이끄는 자유제국주의파에 가담했다.

1905년 12월 10일 그는 자유당 수상인 헨리 캠벨 배너먼 경의 내각에서 외무장관이 되었다. 모로코 위기(1905~06) 때는 전임자 랜즈다운 5세 후작의 정책을 계속 밀고 나가 독일을 반대하고 프랑스를 지원했으나, 모호한 태도를 보였기 때문에 1914년 전쟁이 일어날 때까지 심한 외교혼란을 불러일으켰다. 그는 독일이 공격할 경우 영국은 프랑스를 지원한다는 방침을 공개하도록 허락했고 영국·프랑스 참모회의를 승인했으나 급진적인 장관들의 비판을 피하기 위해 이를 내각에 상정하는 것을 미루었다. 일본과 동맹관계를 유지했고 1907년에는 러시아와 협정을 맺었다.

애스퀴스가 수상이 되었을 때(1908. 4. 5) 유임되었으며 1911년 2차 모로코 위기 때는, 영국이 독일로부터 프랑스를 지킬 것임을 시사했고, 1912년 11월 런던 주재 프랑스 대사 폴 캉봉에게 보낸 개인서신에서도 비슷한 뜻을 전했다. 그러나 애스퀴스가 하원에서 영국은 어떤 나라에 대해서도 책임지고 있지 않다고 했을 때 그는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한편 프랑스와 러시아는 영국의 무기지원을 믿었으며 마치 그레이가 이를 분명히 약속한 것처럼 독일을 대했다.

사라예보에서 오스트리아의 프란츠 페르디난트 황태자가 암살(1914. 6. 28)당한 뒤, 독일 황제 빌헬름 2세와 그레이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전쟁을 일으키지 말고 세르비아 정부가 포기한 베오그라드를 차지함으로써 보상받을 것을 각각 제안했다. 평화를 위한 모든 노력이 실패하자, 프랑스와 미심쩍은 동맹관계 때문이라기 보다는 독일의 중립국 벨기에 침공에 개입하는 의미에서 영국이 전쟁에 참가하도록 분열된 내각을 설득했다. 한편 이탈리아를 연합군에 가담하게 한 런던 비밀조약(1915. 4. 26)을 추진했으며 미국이 연합군의 대의명분을 지지할 것을 호소했다.

1916년 12월 5일 애스퀴스와 함께 공직에서 은퇴하였고 자작위를 받았다. 1919년 미국에 특사로 파견되어 미국을 국제연맹에 가입시키려 했지만 실패했다. 1925년 회고록 〈1892~1916 스물다섯 해 Twenty-five Years, 1892~1916〉를 발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