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스타프 2세 아돌프

구스타프 2세 아돌프

다른 표기 언어 Gustav II Adolf
요약 테이블
출생 스톡홀름, 1594. 12. 9
사망 1632. 11. 6, 작센 뤼첸
국적 스웨덴

요약 스웨덴 왕(1611~32 재위).
(라). Gustavus Adolphus.

목차

접기
  1. 개요
  2. 통치 초기
  3. 대외전쟁의 해결
  4. 국내문제의 해결
  5. 30년전쟁 개입
  6. 마지막 군사작전양상
  7. 평가
구스타프 2세 아돌프(Gustav II Adolf)
구스타프 2세 아돌프(Gustav II Adolf)

개요

근대 국가로 발돋움할 수 있는 기초를 마련했으며, 스웨덴을 유럽의 주요강국으로 만들었다.

통치 초기

카를 9세와 그의 2번째 왕비인 홀슈타인 출신의 크리스티나 사이에 맏아들로 태어나 1611년 17번째 생일을 몇 주일 앞두고 아버지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중요한 헌정상의 양보를 한 대가로 스웨덴의 리크스다그(Riksdag:신분의회)는 그에게 정부 행정에 대해 전권을 행사할 수 있도록 허용했고 그는 당시 매우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었다. 1599년 카를 9세는 조카인 지그문트 3세 바자(폴란드 왕을 겸임)를 밀어내고 왕위를 빼앗았고 그결과 스웨덴과 폴란드는 60여 년 간이나 간헐적으로 왕조전쟁을 벌였다.

그는 1629년까지 왕조의 정통 혈통을 주장하는 폴란드가 침입할 위험과 더불어 바사 가문의 손위 가계(지그문트 3세)를 다시 왕위에 앉히려는 시도에 끊임없이 대처해야 했다. 또한 그 이전에 카를 9세는 자리가 빈 러시아 제국의 제위에 스웨덴 출신을 앉히기 위해 러시아와 전쟁을 벌였는데, 스웨덴군이 러시아 문제에 깊숙이 개입하게 되자 덴마크와도 전쟁이 벌어지게 되었다.

카를 9세의 이같은 행동으로 인해 스웨덴은 국제적으로 어려운 상황에 빠졌을 뿐만 아니라 국내적으로도 정세가 불안해졌고 이를 후계자에게까지 물려주게 되었다.

그의 왕위찬탈은 스웨덴의 루터파 교도에게 위협적이던 가톨릭 군주를 쫓아냈다는 것과 함께 원로원을 통한 귀족 입헌정치의 패배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왕위찬탈이 있고 난 후 5명의 고위귀족 지도자들이 처형당했다. 카를 9세의 통치는 전제적이고 폭압적이었으며 칼뱅주의로 기운 것 같은 종교정책 때문에 루터 교회와 끊임없이 분쟁을 빚었다.

그가 죽었을 때 스웨덴은 끝없는 전쟁으로 지쳐 있었고 왕가에 대한 국민의 감정은 전반적으로 좋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구스타프가 새로운 국왕으로 즉위하자 국민들은 왕으로부터 실정(失政)을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보장을 받아낼 좋은 기회라고 여겼다.

대외전쟁의 해결

그는 1611년 왕위에 오르자마자 세 지역에서 벌이고 있는 전쟁과 중대한 헌정상의 위기에 함께 대처해야 했다.

덴마크와의 전쟁은 사실상 패한거나 마찬가지였으므로 가능한 한 유리한 조건으로 전쟁을 끝내고자 했다. 크네레드 강화조약(1613)으로 스웨덴은 북해 연안으로 통하는 유일한 항구인 엘브스보리를 막대한 전쟁배상금 지급에 대한 담보로 덴마크에 넘겨주어야 했다. 이러한 배상은 막대한 과세와 막바지에 네덜란드로부터 얻은 차관으로 1619년에 이르러 모두 청산할 수 있었다.

전쟁은 쓰라린 증오심을 남겼으며, 그는 덴마크가 스웨덴의 국력이 약할 때면 언제고 그 틈을 이용해 이익을 취할 가장 위험한 적국이라는 사실을 결코 잊지 않았다. 한편 폴란드와의 전쟁은 1617년 그가 리가(현재는 라트비아 공화국에 있음) 근방에 있는 뒤나뮌데 요새를 점령하기 위해 원정대를 보냈다가 실패한 후로 오랫동안 중지상태에 있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대한 위협으로 간주되었던 것은 다른 유럽 국가들에 대해서는 선전을 통해, 국내에서는 내통자들의 활동을 이용해 자신의 왕위주장을 관철하려는 지그문트의 공작이었다.

러시아에서 벌이고 있는 전쟁은 훨씬 더 심각한 상황에 이르렀지만 승패를 명확히 가릴 수 없는 힘든 전투가 계속 벌어지는 가운데 비로소 그는 전쟁수행의 기초적인 방법을 배웠다. 계속 끌던 전쟁은 1617년 스톨보보 조약으로 끝을 맺었는데 조약이 이루어질 때쯤의 전쟁 성격은 확연히 달라져 있었다.

원래 카를 9세는 폴란드가 자기 나라 출신 후보를 러시아 왕위에 앉히는 것을 막으려고 러시아에 개입했다. 1613년 미하일 로마노프가 황제로 선출됨에 따라 그런 위험은 사라졌지만 그는 가능한 한 많은 러시아 영토를 차지하려는 의도로 전쟁을 계속해왔다.

그는 러시아의 군사력과 해양국가가 될 수 있는 잠재력을 두려워했는데 만약 러시아가 안정만 이룩한다면 새로운 황제는 러시아를 발트 해를 주름잡는 해상강국으로 만들려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그는 러시아가 현재 취약한 상태에 있다는 점을 이용해 해상을 통해 서유럽과 직접 교류하지 못하게 막고 스웨덴의 중개상들을 러시아 대외 무역의 창구가 되게 함으로써 이에 따르는 통과세와 관세로 빈약한 스웨덴 재정을 튼튼하게 하려고 했다.

스웨덴의 재정을 강화한다는 계획은 별 성과를 거두지 못했으나 스톨보바 조약은 유럽에서 정치·전략적으로 중요한 사건이었다. 스웨덴은 잉그리아와 켁스홀름을 병합해 핀란드와 에스토니아의 스웨덴 영토를 잇는 길다란 지역을 차지함으로써 러시아를 발트 해로 진출하지 못하도록 완전히 차단해 아시아 쪽으로 밀어붙였고, 러시아가 유럽의 주요강국으로 등장하는 것을 표트르 대제 때까지 늦출 수 있었다.

국내문제의 해결

한편 그가 물려받은 국내의 긴장 상태는 많이 해소되었다.

1611년 그가 왕위에 오를 때 받아낸 신분의회의 인가장은 국왕을 원로원과 국가 고위직을 맡고 있는 귀족들에게 완전히 종속시키는 것처럼 보였지만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에게서 인가장을 받아낸 총리 악셀 옥센셰르나는 사실상 왕의 가장 가까운 협력자가 되었고 그들의 이러한 협력관계는 통치가 끝날 때까지 계속되었다. 이들은 서로 부족한 재능과 결함을 보완하며 역사상 보기 드문 동반자 관계를 이룩했다. 그는 인가장의 정신을 잘 지켰으며, 귀족들도 그에게 인가장의 조항을 있는 그대로 지키도록 고집하지 않았다.

귀족들은 그가 자신들의 이익을 지키는 데 별로 무리가 없는 왕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귀족들을 불러들여 국사(國事)를 돌보도록 하는 한편 수많은 경제적 특혜를 베풀었다. 귀족들이 국가를 위해 봉사하고 국가의 이익을 위해 자신의 특권마저도 희생할 준비가 되었다는 것은 이 시기에 스웨덴 사회가 보여준 가장 건전한 국면의 하나였다.

따라서 헌정상의 문제를 놓고 왕과 귀족들이 오랫동안 벌여온 투쟁은 그의 성품과 그와 옥센셰르나 사이의 독특한 협력 관계 때문에 그의 시대에는 일어나지 않았다. 이처럼 상황이 개선됨에 따라 전면적인 개혁조처가 가능해졌다.

그는 왕위에 오른 지 10년에 이르는 동안 새로운 체재의 최고법원을 세웠고(1614), 상설행정부서로서 재무부와 대법관직을 만들었다(1618). 재위 말년에는 해군부와 육군부를 신설해 원로원의 지도위원들이 각각 이들 부서의 운영을 맡게 했다. 1634년의 정부 조직법은 이같은 개혁을 일반적인 법령으로 집약한 것이었다.

이로써 스웨덴은 유럽의 다른 어떤 국가보다도 더 근대적이고 효율적인 중앙행정 체제를 갖추었다. 스톡홀름은 주로 귀족들로 구성된 공무원들이 항구적으로 거주하면서 진정한 스웨덴의 수도로 자리잡았다. 1620년대에는 철저한 개혁으로 지방 정부를 전문화하고 국왕의 확고한 통제를 받게 만들었다.

원로원은 사상 처음으로 국가의 상설기관이 되었고 왕이 나라를 비우고 전쟁을 수행할 때에는 모든 국사를 처리할 권한을 가졌다.

1617년 포고령은 의회를 구성하는 신분계층을 4개(귀족·성직자·시민·농민)로 정하는 한편 1866년까지 지속된 운영절차의 원칙을 마련했다(→ 리크스다그). 원로원과 신분의회는 합심해 왕의 정책에 협조했는데 거기에는 그의 뛰어난 설득 능력이 큰 작용을 했다. 그의 연설을 들으면 그가 토론의 명수이며 남다른 언변과 힘을 지닌 웅변가임을 잘 알 수 있었다.

결정은 그가 내렸으나 그 전에 항상 악셀 옥센셰르나와 마음을 터놓고 협의했다.

그는 독일의 30년전쟁에 개입하는 것과 같은 심각한 문제에 대해 결정을 내려야 할 때 주저하거나 우유부단한 입장을 보였는데 이것은 그가 스웨덴 국민에 대한 책임감을 깊이 깨닫고 있었음을 입증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같은 국내의 개혁조처들 가운데 스웨덴에 가장 지속적이고 효과적인 영향을 미친 것은 교육문제에 대한 노력이었다.

1620년대에 '김나지아'(Gymnasia)를 세워 처음으로 중등교육을 효율적으로 실시하게 되었다. 웁살라대학은 그에게서 막대한 자금 지원을 받음으로써 대학 발전에 절대 필요한 요건인 재정의 안정을 이룩했다. 이와 함께 그는 도르파트대학교(현재는 에스토니아의 타르투국립대학교)를 설립해 발트어(語) 연구에 으뜸가는 고등교육의 중심지로 만들었다.

1620년 그는 브란덴부르크 출신의 마리아 엘레오노라와 혼인했다.

투르크가 폴란드를 공격한 틈을 이용해 1621년 지그문트와 다시 전쟁을 벌였고 리가를 점령한 데 이어 점차 리보니아 지방(지금의 에스토니아와 라트비아)을 얻게 되었다. 구스타프의 목적은 서유럽에 대한 폴란드의 주요 수출통로를 막아 경제적 압력을 가함으로써 지그문트의 스웨덴 왕위 요구를 철회하도록 하려는 것이었다. 그가 프로이센과 싸우게 된 것은 바로 1626년의 이같은 정책 때문이었다. 그는 비수아 강에 강력한 거점을 설치하게 되면 폴란드를 굴복시킬 수 있을 것으로 믿었다.

그러나 이미 그는 틸리발렌슈타인과 같은 합스부르크가(家)의 장군들이 전투에서 승리를 거둠에 따라 독일 프로테스탄트교도들에게 위험이 닥치리라는 더 큰 문제에 신경을 쓰고 있었다.

그는 폴란드와의 전쟁을 프로테스탄트 세력이 종교개혁 반대세력에 대해 벌이는 투쟁의 한 국면으로 여겼다. 지그문트가 스웨덴의 왕위를 되찾을 경우 스칸디나비아 반도에는 다시 가톨릭 세력이 들어설 것이고, 합스부르크가와 그 동맹세력들은 네덜란드의 선박들이 발트 해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통로를 막을 것이며 그렇게 되면 통일 네덜란드(네덜란드 연방공화국)는 더이상 스페인에 대항해 투쟁을 벌일 수 없으리라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따라서 유럽의 운명은 리보니아 또는 프로이센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에 달려 있었다.

유럽의 프로테스탄트 교도들이 이러한 연관성을 제대로 깨닫는 데는 시간이 걸렸으나 프로테스탄트 운동이 독일에서 곤경에 빠지게 되자 독일의 지도자들은 점차 그를 가장 가능성있는 그들의 구원자로 바라보게 되었다. 그러나 그로서는 프로테스탄트 동맹에 가담해 싸우기에 앞서 적절한 지지 세력을 확보하는 것이 필요했다. 덴마크의 크리스티안 4세가 아무런 대책도 없이 독일에 개입했다가 참패(1626)를 당했기 때문에 이같은 우려는 타당한 것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덴마크가 독일에게 패배함으로써 스웨덴의 개입은 불가피했다.

황제군이 독일의 발트 연안지대를 점령하고 있었고 합스부르크가와 폴란드가 연합해군을 구성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는 사실은 스웨덴에게는 눈앞에 닥친 침략위협과 같았다. 이같이 위급한 상황에서 그와 크리스티안 4세는 힘을 합쳐 포메른 지방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프로테스탄트 세력의 거점인 슈트랄준트에 군대를 보냈다.

양국 연합군이 때맞춰 도착해(1628) 슈트랄준트가 발렌슈타인에게 점령당하는 것을 막았다. 이때부터 30년 전쟁에 대한 스웨덴의 대규모 개입은 시간 문제가 되었다. 폴란드와의 전쟁은 1629년 알트마르크 휴전조약으로 해결되어 그는 마음껏 독일 문제에 관심을 기울일 수 있었다. 1630년 6월 드디어 스웨덴 원정군은 페네뮌데에 상륙했다.

30년전쟁 개입

그의 전쟁개입을 촉발한 동기가 무엇이었는지에 관해서는 오랫동안 역사적인 논쟁이 있었다.

구세대 역사학자들은 동시대인들과 마찬가지로 그를 '북방의 사자'이며 단순히 프로테스탄트교도들의 영웅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후대의 역사학자들은 순전히 정치적인 고려 때문에 개입한 것으로 평가했으며, 오늘날에는 그를 발트 연안지대 전역을 차지해 러시아와 서유럽 간의 무역을 독점함으로써 스웨덴의 빈곤 문제를 해결하려 했던 경제적인 제국주의자로 보고 있다. 그러나 가장 그럴 듯한 설명은 그 자신이 말했던 것처럼, 스웨덴의 국가체제와 교회에 닥친 위협에 맞서 국가의 안전을 지키려 했다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행동이 본질적으로는 방어적인 것이라고 생각했고 독일 땅에 상륙했을 때도 경제적이든 정치적이든 어떤 명확한 장기계획을 전혀 갖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독일이 그때까지 접해보지 못한 방식으로 싸우는 뛰어난 군대를 갖고 있었으며, 그때까지 유럽에서 볼 수 있었던 것보다 더 큰 전략적 개념을 결합시킴으로써 전술상의 혁신을 도모했다. 전술 단위의 규모를 줄였고, 대규모의 대형(隊形)으로 인해 움직임이 둔한 적군에 맞서 유연한 직선형의 대형을 사용했으며, 보병과 기병 그리고 던지는 무기와 기습공격을 서로 결합해야 하는 고질적인 문제를 적어도 그의 시대에만큼은 해결했다.

마지막으로 조작이 쉽고 가벼운 대포를 처음으로 만들었다. 이같은 방식으로 그는 오라녜 공으로서 네덜란드군의 사령관으로 있던 나사우 가문 출신의 마우리츠가 17세기초에 처음 시작한 전쟁 기술의 전환을 완성시켰다. 그가 독일에서 벌인 대규모 작전 이후 유럽 국가의 군대 규모는 계속 커져갔다. 이런 모든 과정은 유럽 사회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그는 동맹국도 없이 독일에 발을 내디뎠다.

프로테스탄트교도들의 감정이야 어떻든 독일의 프로테스탄트 제후들은 스웨덴의 개입에 거부감을 나타냈다. 특히 브란덴부르크의 선제후 게오르크 빌헬름이 스웨덴과 협력하기를 거부하는 바람에 마그데부르크가 틸리 장군의 군대에게 점령·약탈당하지 않도록 하려 했던 그의 시도는 좌절되었다. 그러나 1631년 1월에 프랑스와 동맹을 맺으며 체결한 베어발데 조약으로 그의 입지는 강화되었다.

스웨덴은 이 조약으로 상당한 이득을 보았다.

6월에는 브란덴부르크에 압력을 넣어 할 수 없이 협력하게 만들었고, 9월에는 중립입장이 침해받자 화가 난 작센의 요한 게오르크가 공식으로 스웨덴과 동맹을 맺었다. 9월 스웨덴과 작센의 연합군은 브라이텐펠트에서 틸리 장군의 부대를 격파했는데 이 전투는 전쟁 기술 면에서 획기적인 하나의 이정표였으며 독일 역사에서 전환점이 된 사건이었다(→ 브라이텐펠트 전투). 그 다음달 그는 독일 중부지대를 휩쓸며 승리를 쟁취했고, 진격해나가면서 자신의 거점을 조직적으로 강화했다.

성탄절 무렵 마인츠가 함락되자 이제 독일의 운명은 그의 손에 달린 것 같았다.

상황이 이같이 전개되자 그는 원정을 떠날 때 세웠던 제한적이고 막연한 계획을 재검토하지 않을 수 없었다. 1630년 그는 독일에 개입하면서 자신의 목표가 안보와 보상이라고 확신했다. 보상문제는 스웨덴의 전쟁비용을 모두 현금으로 지급받음으로써 해결할 수 있고, 안보는 스웨덴과 포메른이 항구적으로 동맹을 맺을 때에 이루어진다고 보았다.

그러나 1631년말 독일의 북부와 중부 지역이 모두 자신의 손 안에 들어오고 남부 독일의 프로테스탄트 국가들을 해방하는 것도 이미 눈앞에 다가옴에 따라 처음 계획을 수정·확대했다. 그는 항상 독일의 프로테스탄트 제후들은 스스로 구제의 길을 강구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이들이 장래에도 온전히 살아남으려면 광범위하고 항구적인 프로테스탄트 동맹(Corpus Evangelicorum)을 만드는 것이 최상의 해결책이라고 생각했다.

독일 제후들이 무기력하고 이기적이라는 사실을 경험한 그는 이같은 동맹이 효과적인 기능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바로 자신이 그것을 조직하고 주도해야만 가능하다고 확신했다. 또한 군사력을 동원할 필요가 생겼을 때는 일관된 지휘체계가 필요하며 이것 또한 자신이 주도해야 한다고 믿었다.

따라서 안보문제는 자신이 후원자로서 정치·군사 지도자가 되는 프로테스탄트 동맹을 통해 이룩할 수 있었다. 보상문제에 대해서는 화폐를 통한 보상 대신 방대한 지역, 특히 포메른을 스웨덴에 양도할 것을 요구했다. 즉, 이전의 안보문제가 보상문제로 바뀌게 되었다. 많은 독일인들은 두려움에 떨었고 스웨덴의 일부 외교관들은 최종 타결이 이루어지면 독일 출신의 황제 페르디난트 2세가 퇴위하고 그가 새로운 신성 로마 제국 황제로 선출될 것이라고 믿었다.

그도 분명히 이를 깊이 고려했겠지만 어떤 태도를 취했는지는 확실치 않으며 아마도 그러한 가능성을 예견한 것으로 보인다.

분명히 이러한 논의는 합스부르크가의 지배를 스웨덴의 지배로 바꿀 생각이 전혀 없었던 독일 동맹국들의 불만을 샀을 것이다. 독일인들은 이미 이 전쟁의 성격을 지원전으로 만든 스웨덴군의 행동뿐만 아니라 그의 독재적 방식에도 거부감을 나타냈다. 점령지역에는 스웨덴의 통치기구가 조직됐고 구스타프는 출병한 장군들과 지원자들에게 정복지역을 주어 보상했다. 그가 독일의 제후들과 맺은 일부 조약들을 보면 이들을 자신의 봉건 가신 이상으로 여긴 것 같았다.

1632년 10월 마침내 그는 프로테스탄트 제후들과 동맹을 맺기 위한 기초를 닦았다. 그러나 이 동맹의 범위는 황제 세력의 대응 위험성이 가장 컸던 남부 독일에 국한되었다. 또한 2개의 가장 강력한 프로테스탄트 제후국인 작센과 브란덴부르크는 동맹에 가입하지 않았다.

마지막 군사작전양상

동맹의 성공 여부는 1632년에 벌인 작전 결과에 달려 있었다.

이 작전의 의도는 먼저 바이에른을 꼼짝 못하게 만든 뒤 다음해인 1633년에 빈을 점령하려는 것으로, 한 가지 측면에서는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다. 스웨덴군은 용감하게 바이에른의 레흐 강을 건너 틸리 장군의 부대를 쳐부수고 뮌헨을 점령했다.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는 이러한 위기를 맞아 1630년에 해임했던 발렌슈타인을 다시 불러들여 제국군을 이끌게 했다. 발렌슈타인이 뉘른베르크를 위협하자 그는 할수없이 그곳을 지키기 위해 바이에른에서 물러났다. 알테페스테에 있는 발렌슈타인의 요새에 대한 공격은 당시로서는 어떤 장군도 고려하지 않았을 작전으로, 결국 실패로 돌아갔다.

그후 몇 주일 동안 긴박한 탐색전이 벌어졌고 결국 뤼첸에서 겨울용 막사로 뿔뿔이 흩어지던 발렌슈타인의 군대를 그가 습격했다(1632. 11. 6)(→ 뤼첸 전투). 아침 안개로 인해 기습공격의 이점은 사라졌고 발렌슈타인은 전열을 재정비할 시간을 벌었다.

하루 종일 치열하게 전투가 벌어졌고 밤이 되면서 스웨덴군은 전술적인 차원에서 분명한 승리를 거뒀으며 전략적으로도 중요한 성공을 쟁취했다. 그러나 이것은 엄청난 희생을 치르고 얻어낸 승리였으며 기병부대를 이끌던 그는 다른 병사들과 떨어져 혼란스런 전투가 벌어지는 가운데 죽고말았다.

평가

구스타프는 독일의 안정과 스웨덴의 안보를 이룩하기 위해 전쟁에서 반드시 승리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이것이 예상보다 더 어려운 국면을 맞게된다는 사실이 차츰 드러나기 시작했을 때 죽음을 맞았다.

그러나 그의 생애는 독일 역사의 진로를 바꿔놓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그는 합스부르크가의 황제 군대와 독일 가톨릭 동맹 소속 제후들 군대가 독일 전역을 거의 통제하게 되었을 때 30년전쟁에 개입했고 이로 인해 종교개혁 반대세력으로부터 맹렬한 공격을 받고 있던 독일의 프로테스탄트교도들은 다시 힘을 얻을 수 있었다.

그 결과는 독일뿐 아니라 유럽 전체에 대해 종교적 영역을 넘어서는 큰 영향을 미쳤다.

신성 로마 제국 황제에 대항하는 독일 제후들을 지원함으로써 그는 합스부르크 왕가가 현실적으로 신성 로마 제국 황제로서의 권위를 누리지 못하게 했고 따라서 통일 독일의 출현을 19세기까지 늦추게 만들었다. 군사지도자로서 그는 군사기술분야의 혁신을 이룩했고 이것은 전쟁의 기술사에서 한 시대의 획을 긋는 일이었다.

그러나 이같은 군사적 업적은 스웨덴 입장에서 볼 때 국내에서 그가 이룩한 업적에 비하면 그렇게 높이 평가되는 것은 아니다. 그는 정부 행정조직, 경제발전이나 교육 등의 분야에서 매우 폭넓고 독창적인 업적을 이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