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후기의 변동과 멸망

고구려 후기의 변동과 멸망

다른 표기 언어

요약 삼국시대 고대국가 가운데 하나인 고구려의 정치적 변동과 국가의 멸망.

6세기 중반에 접어들면서 고구려는 대내외적으로 새로운 변화의 국면을 맞게 되었다.

고구려
고구려

먼저 대내적으로는 왕위계승을 둘러싸고 장기간에 걸쳐 귀족세력 사이에 치열한 정쟁이 계속되었다. 이 과정에서 안장왕과 안원왕이 피살되고 많은 귀족들이 숙청되었으며, 일부 세력이 외국으로 이탈해가기도 하였다. 그러나 귀족세력의 어느 한 파가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지 못하고 일정한 타협 아래 귀족연립체제를 형성하였다. 이러한 상황은 〈주서 周書〉 고구려전이나 〈한원 翰苑〉의 고려기(高麗記)에 "최고 관직인 대대로(大對盧)가 3년마다 선임되는데, 그것이 여의치 않으면 귀족들이 각기 병사를 동원하여 싸우며, 왕이 이를 통제하지 못한다"는 기록에서 엿볼 수 있다.

이러한 귀족연립체제는 말기까지 계속되는데, 이는 최후의 집권자였던 연개소문(淵蓋蘇文)이 군사를 일으켜 반대파 귀족들을 숙청하고 정권을 장악한 점에서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대내적인 정국의 변화 속에서 고구려는 대외적으로도 여러 차례 위기를 맞게 되었다.

먼저 551년(양원왕 7)에는 백제와 신라가 동맹하여 고구려의 혼란한 내분을 기회로 한강 유역을 기습 공격하여 백제가 하류지역을, 신라는 상류지역을 차지하였다.

때마침 고구려의 서부 국경선에서도 북제(北齊)가 외교적·군사적 압력을 가해오고, 이어 신흥세력인 돌궐(突厥)이 유연을 격파하고 동쪽으로 밀려오면서 고구려에 적극적인 공세를 가하고 있는 상황이라, 고구려는 미처 남쪽을 돌볼 여력이 없어 신라와 밀약을 맺고 한강 유역에 대한 신라의 지배권을 인정하였다.

이에 기름진 한강 하류지역을 탐내던 신라는 동맹국 백제를 공격하여 한강 유역을 독차지하였으며, 이어 관산성전투에서 백제군을 대패시킴으로써 새로운 강국으로 떠오르게 되었다. 이와 같은 정세변동으로 고구려는 더이상 한반도에서의 주도권을 행사할 수 없게 되었으며, 이후 삼국 간의 치열한 전쟁이 계속되었다.

한편 6세기말에 들어 대륙의 국제정세는 급격히 변동되었다.

580년 북주를 뒤이어 건국된 (隋)나라가 589년에는 남조 진(陳)나라를 정복하여 300여 년간 분열되었던 중국을 통일하였다. 중국에 통일정권이 수립됨에 따라 그동안 다원적이었던 동아시아의 국제질서는 붕괴되었다. 수나라는 중국 중심의 일원적인 국제질서로의 재편을 기도했다. 먼저 유연을 대신하여 북방을 차지하고 있던 돌궐을 격파하여 그 세력을 약화시켰다. 이어서 요동지역으로 힘을 뻗치게 되니 고구려 세력권 안에 있던 거란족이 동요하여 그 일부가 수나라에 귀속하는 사태가 일어났다.

수나라가 중국을 통일할 때부터 경계심을 늦추지 않던 고구려는 세력이 현실적으로 미쳐오게 됨에 따라 적극적인 조처를 취하지 않을 수 없었다. 598년(영양왕 9)에 고구려군은 요서지방을 선제 공격했고, 이에 분노한 수의 문제(文帝)는 대군을 파견했으나 요하도 건너지 못하고 패퇴하고 말았다.

문제의 뒤를 이은 양제(煬帝)도 고구려가 돌궐과 손을 잡고 수를 견제하려고 시도하자, 612년에 100만이 넘는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를 공격했으나 역시 실패했다. 그후에도 2차례에 걸친 수의 공격이 계속되었으나 아무런 성과도 거두지 못하고, 끝내는 전쟁의 여파로 일어난 내란으로 멸망하고 말았다(→ 고구려의 대중국전쟁).

수나라 멸망 후의 혼란을 수습하고 (唐)이 건국되자 고구려는 다시 당과 대립하게 되었다.

초기에는 양국이 일시적으로 평화관계를 지속하기도 했으나, 당나라가 돌궐을 복속시키자 상황이 달라졌다. 당나라도 수와 마찬가지로 중국 중심의 국제질서를 세우려고 했기 때문이다. 이때 고구려에서도 연개소문이 정변을 일으켜 정권을 장악하고 대당 강경책을 추구하게 되면서 고구려와 당의 긴장이 고조되었다.

한편 고구려와 백제의 양면공격에 시달리던 신라는 당과 군사동맹을 맺게 되고, 이로 인해 당과 신라의 동맹세력이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재편을 시도하게 되었다.

645년(보장왕 4) 당 태종에 의한 고구려 침공은 안시성전투의 패배로 실패했으나, 그뒤에도 당군의 산발적인 공격이 계속되면서 고구려의 국력은 피폐해졌다. 660년에 나당연합군의 공격으로 백제가 멸망하자, 고립된 고구려는 멸망의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연개소문이 죽은 후 그 아들들의 내분이 일어나면서 국력이 결정적으로 약화되어, 668년에 마침내 나당연합군에 의해 평양성이 함락되어 고구려는 멸망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