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의 대중국전쟁

고구려의 대중국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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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고구려의 대외 발전과정에서 일어난 중국 세력과의 무력 충돌.

고구려의 대중국 투쟁은 대략 다음의 4시기로 나누어볼 수 있다.

고구려
고구려

제1기는 유리왕~미천왕기로 대체로 낙랑군·현도군·요동군 등 중국 군현과의 투쟁을 통해 성장하는 시기이며, 제2기는 미천왕~광개토왕기로 북중국을 차지한 선비족 모용씨(慕容氏)의 전연(前燕)과 각축을 벌이는 시기이다. 제3기는 중국 세력이 남북조로 나뉘어 대립하고 북방의 유목족인 유연(柔然)이 세력을 떨치는 국제정세 속에서 양면 외교를 통하여 평화적인 대중국 관계를 지속하는 시기이고, 제4기는 중국을 통일한 수·당과 동아시아의 패권을 놓고 다투던 시기이다. 이러한 4시기 중에서 제3기를 제외하고 고구려는 중국 세력과 치열한 무력 충돌을 거듭하였다.

초기 고구려의 성장은 중국 군현세력을 축출하기 위한 투쟁과정이기도 하였다.

고구려는 BC 75년 고구려족의 중심지역에 설치된 현도군의 지배에 저항하여 이를 무순 지역(撫順地域)으로 몰아낸 것을 계기로 하여 이후 연맹체를 형성해서 본격적인 대중국 투쟁을 전개하였다. 기록상 고구려와 중국 세력의 첫 충돌은 12년(유리왕 31)에 있었지만, 본격적인 충돌은 고구려가 적극적인 대외팽창을 추구하였던 태조왕대부터이다. 대체로 태조왕 전반기까지 주변의 소국을 정복하여 고구려족의 통합을 이루고, 한편으로 북옥저·동옥저·양맥 등 주위의 여러 다른 종족에 대한 복속을 마무리짓고, 2세기초부터 중국 군현에 대한 본격적인 공세로 들어갔다.

당시 고구려의 주된 공격 대상은 현도군과 요동군이었다. 고구려의 중국 군현에 대한 공격은 기습적으로 물자와 인민을 노획하는 성격을 지녔기 때문에, 영토의 개척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게다가 중국 군현의 역공도 만만치 않았고, 북만주에 위치한 부여가 중국 군현을 지원했으므로 고구려의 대중국 투쟁은 쉽지 않았다.

태조왕 이후 한동안 수세적인 입장에서 중국 군현세력과 간간이 충돌하던 고구려는 중국이 삼국으로 나뉘자 남쪽의 오(吳)와도 외교관계를 맺으며 당시의 국제정세를 이용하여 다시금 대외팽창을 시도하였다. 그리하여 238년 위(魏)나라의 공격으로 요동의 공손씨(公孫氏) 세력이 무너지자 고구려 동천왕(東川王)은 이 기회를 틈타 242년 서안평(西安平)을 기습 공격하였다.

서안평은 요동과 한반도의 낙랑군을 연결하는 교통로의 요충지로서, 고구려의 공격에 놀란 위의 유주자사 관구검(毋丘儉)은 고구려에 역공을 가했다(246). 이때 고구려는 위군에 대패하여 수도 환도성이 함락당하고, 동천왕은 동옥저로 피신하는 시련을 겪었다.

이때의 패배로 큰 타격을 입은 고구려는 한동안 대외투쟁이 침체되었다. 그러다가 미천왕대에 이르러 그 동안의 사회발전과 집권화의 진전으로 국력이 충실해지자, 북중국이 5호 16국의 혼란기로 접어든 당시의 국제정세를 바탕으로 다시 본격적인 대외정복활동을 전개했다.

313년(미천왕 14) 낙랑군과 대방군을 정복하고, 그 여세를 몰아 요동으로 진출하여 이 지역의 지배권을 놓고 몽골 고원에서 내려오는 유목민족들과 각축을 벌였다. 이 과정에서 고구려는 선비족의 모용씨가 세운 전연과 첨예한 대립을 벌였다.

342년(고국원왕 12) 전연의 침공으로 수도가 함락되는 위기를 맞기도 하였으며, 371년에는 백제의 침공으로 고국원왕이 전사하는 대타격을 입기도 했다. 그러나 소수림왕대의 체제정비를 통해 국력을 가다듬은 고구려는 광개토왕과 장수왕대에 후연(後燕)을 공격하여 요동을 병합하고 북만주를 차지하여 동북아시아에 커다란 세력권을 형성하였다.

그리하여 5세기 중반 이후에는 중국의 남북조와 북방의 유연 및 동방의 고구려가 다원적인 세력균형을 이룬 상태에서 동아시아의 국제정세는 상대적인 안정을 유지하였다. 이러한 국제정세 아래에서 고구려는 대륙의 여러 세력과 다각도의 외교관계를 맺으면서 장기간의 평화관계를 지속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국제정세는 6세기말에 (隋)가 중원의 통일제국으로 등장하면서 급속히 붕괴되었다.

중국 중심의 국제질서로의 개편을 추구하는 수나라는 북방의 돌궐(突厥)을 복속시키고, 고구려를 위협하였다. 598년(영양왕 9) 고구려의 선제 공격을 계기로 하여 수나라는 고구려에 대해 4차례에 걸친 대규모 침공을 시도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수의 참담한 패배로 끝났고, 수는 그 여파로 곧 멸망했다. 수가 멸망한 후 일시적인 혼란을 수습하면서 이 등장하자, 고구려는 다시 당과 대결하게 되었다.

당의 대외정책도 수의 그것과 동일하였다. 대외적인 위기가 심화되는 상황에서 대외 강경파인 연개소문(淵蓋蘇文)이 집권하자, 고구려와 당 사이에 무력 충돌이 시작되었다. 645년(보장왕 4) 당 태종의 친정(親征)으로 시작된 수차례의 고구려 침공은 별 실효를 거두지 못하였다.

당시의 대표적인 전투로는 안시성전투가 유명하다. 이후 당은 신라와 군사동맹을 맺어 백제를 먼저 제어하는 방법을 택했다. 나당연합군은 660년 백제를 멸망시킨 후, 고구려를 협공했다. 백제의 멸망으로 군사활동이 용이해진 신라군과 당군의 양면 공격이 거듭되자 고구려도 더이상 견디지 못하고 668년 평양성의 함락과 함께 멸망하고 말았다.→ 고구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