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티즈버그 전투

게티즈버그 전투

다른 표기 언어 Battle of Gettysburg

요약 남부연합군의 로버트 E. 리 장군은 북군의 전의를 꺾고 유럽 국가들로부터 남부연합에 대한 승인을 얻고자 북부 진격을 결정하고 게티즈버그로 갔다. 북군의 G. 미드 장군 부대는 도로망의 중심지이자 전략상 요지인 게티즈버그를 방어하고 있었다.
첫날과 둘째 날 벌어진 격전에서 양측 모두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셋째 날에는 남부연합군이 북군이 지키는 세미테리 능선을 맹렬히 공격했다. 남군은 능선까지 진격했으나 포격으로 큰 타격을 입고 전열이 흐트러지자 버지니아로 퇴각했다. 미드 장군은 3일 동안 벌어진 전투에서 승리했다.
게티즈버그 전투는 남북전쟁의 전환점이 되는 중요한 전투로 꼽힌다. 이 지역은 1863년 11월 국립묘지로 지정되었으며, 1895년 국립군사공원이 되었고 1933년 국립공원관리소 관할이 되었다.

게티즈버그 전투(Battle of Gettysburg)
게티즈버그 전투(Battle of Gettysburg)

일반적으로 남북전쟁의 전환점이 되는 중요한 전투로 꼽힌다. 남부연합군의 로버트 E. 리 장군은 5월에 북군의 조지프 후커 장군을 버지니아 주 챈슬러즈빌에서 격파한 뒤 북군의 전의(戰意)를 꺾고 유럽 국가들로부터 남부연합을 승인받고자 북부로의 진격을 결정했다. 그의 병력은 7만 5,000명에 달했다.

포토맥 강에 주둔한 북군의 새로운 사령관이 조지 미드 장군인 것을 안 리 장군은 R.S. 유얼 장군에게 군대를 캐시타운이나 게티즈버그로 옮기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미드 장군 부대의 선발기마대 지휘관인 존 버퍼드 장군은 게티즈버그가 도로망의 중심지로서 전략상 요지라는 것을 파악하고 지원군대가 도착하기까지 그곳을 지키기로 했다.

전투가 시작된 첫날 격전이 벌어져 북군은 신식 스펜서 연발기총을 사용했으며 양측 모두 사상자가 많이 생겼다. 이때 양측 사령관들은 똑같이 어떻게든지 게티즈버그를 차지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틀째는 리틀라운드 탑, 세미테리 언덕, 데블즈덴, 휘트필드, 피치오처드 같은 곳을 차지하기 위한 결사적인 공격과 반격이 수없이 계속되어 양측 모두 많은 사상자를 냈다.

3일째에는 리 장군이 공격 결단을 내렸다. 남부연합군 1만 5,000여 명은 1만여 명의 북군이 지키는 세미테리 능선을 맹렬히 공격했다. 수비를 돌파한 남군 선봉대가 능선까지 진격했으나 더이상은 전진할 수 없었다. 남군은 진격하는 동안 포격으로 큰 타격을 입어 전열이 흐트러졌으며, 지원이 부족한 상태에서 3면에서 맹렬한 공격을 받아 19개의 전투깃발과 수백 명의 포로를 남긴 채 퇴각했다.

7월 4일 리 장군은 공격에 대비하고 기다렸지만 북군의 공격은 더이상 없었다. 그날밤 그는 폭우가 내리는 것을 이용해 버지니아로 퇴각하기 시작했다. 리 장군이 패배한 원인은 그가 남군의 군사력을 지나치게 믿었다는 점과 유얼 장군이 남군의 '철벽장군' 잭슨을 대신할 만한 능력이 없었던 점, 정찰에 실패한 점 등에 있었다.

미드 장군은 비록 남군을 끝까지 추격해 격멸시키지 못했다는 비난을 받았지만, 남군의 공격을 막아내고 3일 동안 벌어진 결정적인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당시 입은 손실은 남북전쟁 최대의 것으로서 북군은 8만 8,000명 중 사상자가 2만 3,000여 명이었고, 남군은 7만 5,000명 중 2만 이상의 사상자를 냈다. 이 전투지는 1863년 11월에 링컨 대통령이 게티즈버그 연설을 할 때 국립묘지로 지정되었으며 1895년에는 국립군사공원이 되었고 1933년에 관할권이 국립공원관리소로 넘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