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자폭탄, 히로시마에 떨어지다

원자폭탄, 히로시마에 떨어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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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발행 매일신보(1945년 08월 08일)
대공보(1945년 08월 08일, 1945년 08월 09일, 1945년 08월 10일)
경성일보(1945년 08월 09일, 1945년 08월 12일)

기사 원문

매일신보 1945년 8월 8일
매일신보 1945년 8월 8일
적 신형 폭탄 사용

광도(廣島)각주1) 시에 상당한 피해

[동경 전화] 대본영(大本營) 발표(소화 20년 8월 7일 15시 30분)
1. 작각주2) 8월 6일 광도(廣島)시는 B29 소수기(少數機)의 공격에 의하여 상당한 피해가 발생하였다.
2. 적은 우(右) 공격에 신형 폭탄을 사용한 것 같은데 상세(詳細)는 방금 조사 중이다.

기사 원문

대공보 1945년 8월 8일
대공보 1945년 8월 8일
원자작탄(原子炸彈)각주3) 처음 위력 선보여

광도 폭탄 한 발에 일구(日寇)각주4) 크게 놀라
미국이 앞으로 이를 일본 공격에 전면 이용
미기(美機)가 폭탄이 떨어진 뒤의 광도를 정찰해


신무기 원자작탄
미국, 영국, 캐나다가 합작하여 몇 년 만에 비로소 완성한 것

기사 원문

대공보 1945년 8월 9일
대공보 1945년 8월 9일
원자작탄 하나가광도 대부분을 폭파

사진에서 전 도시는 연기로 가득
집 밖에 있던 사람들은 타 죽고
집안에 있던 사람들은 질식사하여
사상자 수를 확인하기 어려우며 의료 손길도 못 미쳐

기사 원문

경성일보 1945년 8월 9일
경성일보 1945년 8월 9일
이우(李鍝) 공(公) 전하 어전사작전 임무 어수행 중광도의 공폭(空爆)에 부상

궁내성 발표(8일 정오) 이우 공 전하께서는 그저께 6일 광도에서 작전 임무 수행 중 공폭에 의해서 부상, 어제 7일 전사하셨다.

육군성 발표(소화20년 8월 8일) 육군중좌 이우 공 전하가 군 참모로서 근무하던 8월 6일 작전 임무 수행 중 광도에서 공폭에 의해서 전상(戰傷)을 입으시어 7일 전사하셨다.

이우 공 전하께서는 8월 6일 아침 작전 임무 수행 중 광도에서 공습을 당하여 부상, 한때 경과가 양호해졌지만 다음날 7일 이른 아침 중태에 빠져 결국 전사하셨다.

이제 전하의 유해는 8일 오후 1시 반 경성부 종로구 운니정의 본집에 도착, 비 전하, 이청, 이종 양 공자를 비롯한 친족 등의 영접을 받아 집 안쪽 방에 안치되었다.

기사 원문

대공보 1945년 8월 10일
대공보 1945년 8월 10일
어제 원자탄이 장기(長崎)각주5) 에 투하

전시가 거의 파괴되었다고 최초 보고
비행기 1000여 대 재차 공세
부석(釜石)각주6) 에 함포 사격 어제 복산(福山)각주7) 에도 공습 감행

기사 원문

경성일보 1945년 8월 12일
경성일보 1945년 8월 12일
미국의 신형 폭탄에 제국 정부 항의

인류의 신 죄악
잔학성, 독가스 능가

해설

1945년 7월 16일 원자폭탄 실험에 성공한 미국은 8월 6일 오전 일본 히로시마에 인류사상 최초로 원자폭탄을 투하했다. ‘리틀 보이’라는 이 원자폭탄은 요즘 소형차 정도의 크기였지만 위력은 엄청났다. 폭탄이 떨어진 날에만 10만 명 이상이 죽었고, 8일 투하된 나가사키 피해까지 포함하면 1945년 말까지 21만 명이 숨지고 지금까지 26만 명의 피폭자가 후유증을 앓고 있다.

그런데 눈에 띄는 대목은 일본의 최고사령부인 ‘대본영’의 발표를 인용한 〈매일신보〉와 〈경성일보〉의 보도다. 어마어마한 피해를 낸 원자탄을 ‘신형 폭탄’이라고만 했다. 당시 중국에서 발행되던 대공보가 ‘원자작탄’ 혹은 ‘원자탄’이라 보도한 걸 보면 같은 한자 문화권인 일본의 군부가 교전 상대국의 신형 무기를 몰랐다고 보기는 힘들다. 일반 국민의 사기를 고려한 언론 조작 아니었을까.

어쨌든 두 발의 원자폭탄 투하는 일본이 항복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비록 인류 최초로(그리고 마지막이어야겠지만) 피폭 경험을 겪어야 했지만.

이제 와서 원폭 투하를 두고 “일본이 아시아가 아니라 유럽 국가였다면 그랬겠느냐”는 등 미국을 비판하는 목소리도 있지만 전쟁을 빨리 끝내 결과적으로 인명 피해를 줄였다는 지적도 만만치 않다.

한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는 조선인들도 적지 않아 당시 폭사한 사람만 4만 명이 넘는 것으로 추산된다. ‘이우 공 전하 전사’ 기사에 나오는 의친왕의 차남도 히로시마에서 폭사했다. 그는 일제의 압력을 물리치고 끝끝내 조선인 신부를 맞았고, 일본군 장교로 중국에 근무할 때도 독립군을 지원하는 등 조선 왕족으로는 드문 ‘인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