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봉창, 천황에게 폭탄 던지다

이봉창, 천황에게 폭탄 던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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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발행 조선일보(1932년 01월 10일)

기사 원문

조선일보 1932년 1월 10일
조선일보 1932년 1월 10일
천황 폐하 환행(還幸)각주1) 도중노부(鹵簿)각주2) 에 폭탄 투척

8일 오전 동경 경시청 앞에서
어료차(御料車) 별무 이상


[동경 8일 오후 6시 15분발 지급보-오후 11시 30분 연착]-내무성 발표 천황 폐하께옵서 육군시관병식(陸軍始觀兵式)에 행행(行幸)각주3) 하옵셨다가 환행하옵시는 도중 노부가 앵전문(櫻田門) 앞으로 지날 즈음에 어경위(御警衛) 사고가 발생하였는데 그 사건 개요는 아래와 같다.

8일 오전 11시 40분경 노부가 국정구(麴町區) 앵전정 경시청 앞거리 모퉁이로 꺾어 들어갈 때 봉배자(奉拜者)각주4) 선내(線內)에서 돌연 어료차로부터 앞으로 약 18간 되는 노부의 둘째 차 궁내대신(宮內大臣)이 탄 차에 수류탄 같은 것을 던지었다. 동 대신 승용차 왼편 뒤 차륜 부근에 떨어져 동 차체의 밑으로 엄지손만큼 파손된 곳이 두세 곳이 있었으나 어류차 기타에는 어이상(御異狀)이 없이 오전 11시 50분 무사히 궁성에 환어각주5) 하옵시었다.

범인은 경성 출생 이봉창
현장에서 즉시 체포

범인은 경시청 석삼(石森) 순사 외 헌병 등이 이곳 현장에서 체포하여 경시청으로 인치각주6) 하고 취조한 결과 범인은 경성 출생의 일명 조산창일(朝山昌一) 이봉창(李奉昌, 32)으로 판명되었다.

해설

1932년 1월 8일 도쿄 사쿠라다몬(櫻田門) 앞을 지나던 일본 천황 히로히토의 행렬에서 폭탄이 터졌다. 일행은 요요기(代代木) 연병장에서 열린 신년 관병식에 참여하고 돌아가는 길이었다. 1탄은 거리가 짧아 명중하지 못했고, 2탄은 불발이어서 히로히토는 멀쩡하고 말 두 필을 쓰러뜨리는 데 그쳤다. 하지만 일제가 신격화하던 천황을 겨냥했고, 일본 경시청 앞에서 일어났다는 점에서 일본에 준 충격은 컸다.

‘범인’은 상하이임시정부의 비밀 의열 투쟁 단체인 한인애국단 소속의 조선 청년 이봉창이었다. 이봉창은 1900년 서울 태생으로 청년기에 일본에서 잠깐 생활한 적도 있지만 1931년 상하이로 건너가 김구가 이끌던 한인애국단에 가입했다. 제1호 한인애국단원이 된 그는 그해 12월 일본에 잠입해 당시 일본인들이 신으로 추앙하던 천황을 폭살하려 폭탄을 던진 것이었다. 거사를 단행한 후 가슴에 품고 있던 태극기를 꺼내 흔들며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던 그는 현장에서 체포돼 그해 10월 10일 사형당했다.

당시 이 사건을 보도한 중국 언론이 거사 실패를 애석해 하자 1931년 만주사변 후 중국 본토를 호시탐탐 노리던 일본 측은 이를 상하이 사변을 일으키는 구실로 삼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