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주사변

만주사변

다른 표기 언어 Manchurian Incident , 滿洲事變
요약 테이블
간행/발행 동아일보(1931년 09월 20일, 1931년 09월 21일)

기사 원문

동아일보 1931년 9월 20일
동아일보 1931년 9월 20일
18일 오후 10시부터 일중군(日中軍) 수(遂)각주1) 충돌

민국병(民國兵)각주2) 이 만철선을 폭파한 까닭에
일본 수비대가 곧 응전 포격했다고
일본군 봉천성(奉天城) 점령


[동경 19일발 전통] 외무성 18일 오후 11시 반 착전=만철본선(滿鐵本線) 유성구[柳城口, 북대영(北大營)각주3) 부근]의 철교를 18일 오후 10시 반 폭파한 자 있어 중국병의 처치(處置)라 알고 일본 수비대가 출동하여 북대영 부근에서 일중 교전 중이라는 경찰 보고에 접하였다.

[봉천 19일발 전통지급보] 18일 오후 10시 중국병이 봉천의 북방 북대영에서 만철선을 폭파하고 일본의 OO수비대를 습격하였으므로 일본병은 곧 이에 응전하여 대포로서 북대영의 중국 병영을 포격하고 오후 11시 20분에 그 일부를 점령하였는데 격전은 아직도 계속 중이다.

관동군 사령부를
급거 봉천에 이전
요양사단과 안동부대도 출동

[여순 19일 오전 4시 23분발 지급전보 연합] 관동군사령부는 급거 봉천으로 옮기게 되어 본장(本庄) 군사령관은 막료와 보병 OO명을 인솔하고 OO일 오전 OOOO 임시열차로 봉천에 급행하였다.

[봉천 19일발 연합] 제O사단 사령부는 OO일 오전 OOOO에 요양(遼陽)발 봉천을 향하여 진격하였다.

(이하 제목만)
관성자(寬城子)와 봉황성과 안동현을 보장(保障) 점령
여순 주차대(駐隊) 평양비행대도 출동
봉천군을 전멸할 계획

민국(民國) 측 군인 경관 전부를 무장해제
북대영(北大營) 파괴로 장사(將士)는 다 이산(離散)
하졸(下卒) 사상만 수백 명

일본군 행동의 여하를 불구 중(中) 측은 무저항
19일야(夜) 오전 0시 봉천 당국 일본 과장
포화의 봉천성내 파급방지를 전화로써 임 총영사에 요청

공격 중지를 총영관에 교섭
민국 측 간부 대책 협의

기사 원문

동아일보 1931년 9월 21일
동아일보 1931년 9월 21일
제O사단 사령부 장춘(長春)에 이전 결정

전국 확대의 징조로 24일 오후 OO향북(向北)

[봉천 20일 오전11시19분발 지급 연합] 장춘 방면의 전국(戰局) 확대 징조가 있으므로 다문(多門) 중장의 제 O사단 사령부는 장춘에 이동하기로 결정하고 오후 OO봉천발 임시열차로 장춘에 향하기로 되었다.

장춘성 함락
[장춘 20일발 연합] 장춘성은 19일 오후 2시 반 완전히 함락되어 민국 측 주력은 팔면성(八面城) 방면에 퇴거하였다.

일본군 점령 지역의 즉시 철병을 요구
국민정부각주4) 힐문각주5) 적(詰問的) 항의


봉천 점령은 불전안(不戰案) 위반
왕(王) 외교부장 항의
사태 중대로 장개석 주석 귀경


장 씨, 장 주석에 무저항주의를 전명(電命)
비서를 각국 공사관에 파견
‘책임의 재일(在日)’을 보고

[북평 19일발 전통] 장학량(張學良) 씨는 작야각주6) 12시 요녕성 정부수석 장식의(臧式毅) 씨에 대하여 봉천군은 일본군에 대하여 절대로 무저항주의를 취하고 경과를 관망하라고 전명하였다.

[북평 19일발 전통] 장학량 씨는 19일 오후 비서를 각국 공사관에 파견하고 1. 일본군의 봉천 점령 경과 2. 사건 발생 책임은 일본에 있다 3. 일본에 항의를 제출하였다는 것을 보고하여 중국 측의 입장을 설명하고 일본 공사관에는 모 씨가 내방하여 시야(矢野) 참사관과 회견하고 형식적으로 정보 교환하였다.

금번 사건은 계획적 행위
적극적 행위에 조야가 경악
남경 각 방면의 관측

저항할 힘도 없고 이유도 없는 것
장학량 씨 대기자 담

해설

전쟁이 일어나면 가장 먼저 희생되는 것은 ‘진실’이라 한다. 이 기사도 마찬가지다. 전쟁이 터지고 난 뒤 며칠 뒤에, 식민지 신문이 전하는 뉴스이니 발표 기사만 전할 따름이다. 제대로 원인을 따질 여지가 없다.

일본은 1931년 9월 18일 중국 측이 만주철도 선로를 폭파했다는 이른바 ‘류탸오거우(柳條溝) 사건’을 조작했다. 당시 만주를 지배하던 중국군벌 장쉐량(張學良) 측을 공격할 명분을 만들기 위해서였다. 만주는 상품시장, 중공업 원료 공급지로 가치가 높아 일본은 창춘(長春)-뤼순(旅順)간 철도 이권을 확보하는 등 일찍부터 눈독을 들였다. 장쉐량이 국민당 정부에 가세한 이후 만주 지역에서 일본상품 배척 · 이권 회수 운동이 일어나 사정이 악화되었다. 이에 당시 대공황으로 구미 열강이 간섭하기 힘든 사정을 이용해 본격적인 침략에 나선 것이었다.

일본 관동군은 개전 5일 만에 랴오둥(遼東) · 지린(吉林)성을 점령하는 등 파죽지세로 밀고 나갔다. 승세를 굳힌 일본은 1932년 3월 1일 만주국이란 괴뢰국을 세워 만주를 손안에 넣었고, 1933년엔 철병을 권고하는 국제연맹에서 탈퇴하는 강수를 두었다.

만주사변은 일본이 이후 중일전쟁 · 태평양전쟁을 잇달아 일으키는 도화선이 되었지만 조선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3·1운동 이후 일제가 펼쳤던 기만적 ‘문화 통치’가 끝나고 파쇼적 전시체제가 강화됐다. 내선일체(內鮮一體)니 하는 민족말살정책이 추진된 것도 이때 이후다. 경제적으로도 북한 지역을 중심으로 병참기지화가 강력 추진됐고 식량 수탈도 심해졌다. 또한 만주 지역에서 활동하던 항일 무장 세력도 일본군의 강력한 탄압에 점차 기반을 잃고 연해주 지역으로 옮겨가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