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이 김선달

봉이 김선달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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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도시화, 상업화의 산물
  2. 닭인가 봉황인가
  3. 대동강 물을 팔아먹다
  4. 교활하고 야비한 사기꾼?
  5. 승려와 장님을 조롱하다
  6. 서민의 삶을 노래하다

왜란과 호란의 폭풍이 이 땅을 휩쓸고 지나간 뒤에도 조선의 위정자들은 민생을 외면한 채 북벌이나 예송논쟁 같은 소모적인 사안에 매달렸다. 영조와 정조 치세에 조선은 간신히 재기의 동력을 마련했지만 순조 대부터 일어난 세도정치의 파고에 휩쓸려 최악의 상황으로 치달았다. 지방에서는 탐관오리의 수탈에 견디다 못한 백성들이 야반도주하는 통에 유랑민이 속출했고, 학정에 저항하는 민란까지 연이어 발생했다.

그런 가운데 민간에서는 구태의연한 사회 현실을 풍자하고 조롱하는 이야기들이 퍼져나갔다. 평양의 김선달, 서울의 정수동, 영일의 정만서, 영덕의 방학중 등이 그런 만담의 주인공이었다. 그 중에 김선달은 특히 기발한 착상과 허를 찌르는 행동으로 상대를 농락함으로써 당대 최고의 스타로 자리 잡았다. 하지만 김선달 설화는 개인의 기발한 착상으로 금전적 이득을 취하여 일시적인 즐거움을 얻거나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정도에 국한되었다.

도시화, 상업화의 산물

숙종 대 이후 조선에서는 농업생산력이 발달하고 조세의 전세화 및 금납화로 인해 화폐경제가 촉진되었으며, 인구 증가와 함께 농민계층의 분화가 가속되어 농촌 인구의 도시유입이 심화되었다. 이런 현상은 특히 농업경제가 취약했던 북방 지역에서 많이 발생했다. 1790년 평안도에서는 2356명의 농민이 유랑 길에 떠나 연말까지 50%에 해당하는 1083명이 고향으로 돌아오지 않았다는 통계 자료도 있다.

당시 평안도에서는 대청무역이나 금광업으로 거부가 된 상인들이 많았고, 이에 따라 그들을 등쳐먹는 투기꾼과 건달의 활동도 늘어났다. 김선달의 사기행각이 대부분 금전과 관련되었다는 점이 이런 사회 현상을 대변해 준다.

민간에서 전승되던 김선달 설화가 문헌에 처음 나타난 것은 1906년 황성신문에 연재된 한문현토소설 〈신단공안(神斷公案)〉의 네 번째 이야기 ‘인홍변서봉 낭사승명관(仁鴻變瑞鳳浪士勝名官)’이다. 여기에서 그려낸 김선달은 평양 출신의 선비 김인홍(金仁鴻)이고 호가 낭사(浪士)이다. 하지만 이는 소설상의 설정일뿐 실제 김선달의 정체와는 무관한 것으로 추측된다.

여기에서 김선달은 큰 뜻을 품고 한양에 올라왔지만 변변찮은 문벌과 서북인을 차별하는 풍조로 인해 경시 당하자 권세가와 부유한 상인 등을 골탕 먹임으로써 세상을 조롱한다. 구전설화에서는 그가 뛰어난 사기꾼으로 묘사되고 있지만 이 소설에서는 몰락양반 출신으로 당대의 정치현실을 비판하고 풍자하는 의식 있는 건달로 그려진다.

닭인가 봉황인가

김선달에게 ‘선달(先達)’이란 칭호가 붙은 것은 그가 과거에 급제했지만 관직에 임명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조선 후기에 과거 응시자는 수만 명에 달했지만 관직은 제한적이었던 데다 세도정권의 매관매직이 성행하면서 재산이나 배경이 없는 급제자들은 평생 미관말직조차 얻지 못했다.

김선달이 과거에 급제하는 과정도 코믹하게 묘사한 판본이 있다. 그가 과거장에서 학질에 걸린 척하자 병이 옮을 것을 두려워한 시험관이 멀찍이 떨어져 경전을 암송하는 흉내만 내는 그를 쫓아내기 위해 서둘러 합격시켜주었다는 것이다.

그에게 ‘봉이(鳳伊)’라는 별호가 붙은 이유도 재미있다. 의도적으로 닭장수에게 접근하여 닭을 봉황이라 우기고 비싸게 구입한 다음 송사를 불러일으켜 몇 배의 배상을 끌어냈던 것이다. 그러므로 ‘봉이(鳳伊)’는 그가 노련하고 교활한 사기꾼임을 보여주는 하나의 징표다. 가장 널리 알려진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김선달이 장날에 시장 구경을 갔는데 닭을 파는 가게 안에 유난히 큼직하고 빛깔이 좋은 닭 한 마리를 발견했다. 주인에게 저 봉황을 어디에서 얻었느냐고 묻자 주인은 봉황이 아니라 장닭이라고 대답했다. 하지만 김선달이 어수룩한 태도로 계속 봉황 같다며 값을 물어보자 욕심이 생긴 주인은 마침내 장닭을 봉황이라고 말하고 비싼 값에 팔았다.

김선달은 그 장닭을 안고 관아로 달려가 희귀한 봉황을 구했다며 사또에게 바쳤다. 이에 사또가 화를 내며 볼기를 치자 김선달은 자신이 닭장수에게 속았을 뿐이라고 항변했다. 그로 인해 관아에 끌려와 사또의 추궁을 받은 닭장수는 어쩔 수 없이 김선달에게 편취한 닭 값에 볼기 값까지 더하여 몇 배의 배상을 해주고 말았다. 그때부터 사람들은 그를 봉이 김선달이라고 불렀다.

대동강 물을 팔아먹다

평양을 중심으로 서북지역에서 발생한 김선달 설화는 각종 야담집과 입소문을 통해 조선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설화 속에서 김선달은 한양 사람을 골탕 먹이는 경우가 많다. 그가 엽전 한 푼 없이 한양으로 가던 도중 일부러 물에 빠진 척한 뒤 자기를 구해준 나그네에게 잃어버린 보따리를 내놓으라고 생떼를 썼다는 일화도 있다. 그가 조선 왕조 내내 정계에서 소외받았던 서북인들의 정서를 일정 부분 대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김선달의 사기행각 중에 가장 유명한 이야기는 어수룩한 한양의 부자 상인을 속여 대동강을 팔아먹은 사건이다.

김선달은 어느 날 한양에서 욕심 많은 부자 상인이 온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실로 기상천외한 사기극을 연출한다. 그는 대동강에서 물을 길어가는 평양의 물장수들에게 미리 엽전 두 냥을 나누어 준 다음 물을 퍼갈 때마다 한 냥을 자신에게 돌려달라고 부탁한다. 그런 다음 한양의 부자에게 자신이 물장수에게 물세를 받는 장면을 보여주어 탐욕을 부채질한다. 그렇듯 용의주도한 공작을 펼친 끝에 김선달은 임자 없는 대동강을 거금 삼천 냥에 팔아넘겼던 것이다. 이튿날 부자 상인은 김선달처럼 강변에 가서 대동강 물세를 거두려다 물장수들에게 몰매를 맞고 쫓겨난다.

사기행위의 진수를 보여준 이 사건으로 인해 김선달은 여타 재담가들과 차원을 달리하는 존재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황해도에서 전래되는 김선달 설화에는 그가 대동강뿐만 아니라 대동강변의 오리 떼까지 팔아치웠다는 이야기도 있다.

평양에 봉이라는 사람이 살았다. 이 사람은 어수룩한 시골 부자에게 대동강에 있는 오리를 팔아먹기로 했다. 김선달은 겨울날 시골 부자를 대동강 변에 데려간 다음 물 위에서 놀고 있는 수천 마리의 오리를 가리키며 “저 오리들은 다 내가 기르고 있는데 길이 잘 들어서 내 말을 잘 듣는다.”라고 말했다. 이윽고 그가 오리가 날아갈 만한 시각에 지팡이를 번쩍 드니 오리 떼가 일제히 하늘로 날아올랐다. 잠시 후 지팡이를 아래로 내리니 오리 떼가 모두 물가에 내려앉았다. 그러자 시골 부자는 감탄하면서 봉이에게 거금을 주고 오리 떼를 사들였다. 며칠 후 시골 부자가 대동강 변에 나와 보니 오리가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이 놈들이 대체 어디로 갔을까?” 하면서 사방으로 찾으려 다녔고, 지금까지도 찾으러 다닌다고 한다.

이처럼 김선달 설화는 기발한 재치와 재주, 지혜, 풍자, 익살, 유머가 총동원된 일종의 소극이다. 그가 대동강변의 주인 없는 오리를 팔아치운 이야기는 임진왜란 진주성 전투 당시 김시민 장군 휘하의 군관으로 활약하며 세계 최초의 비행기 비거(飛車)를 발명한 정평구 설화에도 비슷하게 각색되어 전해지고 있다. 정평구가 젊은 시절에 한양 사람을 속여 김제군 부량면의 제주방죽에 있던 물오리 떼를 두 차례나 팔아먹었다는 이야기다. 김선달 설화는 너무나 유명해서 이처럼 다른 사람의 골계담과 중복되는 경우가 많다.

교활하고 야비한 사기꾼?

김선달은 주로 기득권자인 양반이나 그들과 결탁하여 큰돈을 번 부자를 목표로 삼았지만, 무고한 서민을 대상으로 하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그는 어느 누구든 이득을 취할 수 있는 존재라면 가까이 다가선다. 만일 상대가 자신을 골탕 먹이려 하면 몇 배로 고스란히 갚아준다. 이런 그에게서 시대를 앞서가는 민중의식이나 변혁의지는 보이지 않는다. 오늘날 김선달을 정의롭고 선량한 민중의 대변자로 볼 수 없는 이유다.

어느 날 아침 김선달이 주막에 가서 외상술을 청했다. 주모는 식전에 외상술은 안 판다면서 거절했다. 주모가 식사하러 간 사이에 김선달이 하릴 없이 마당 끝에 쪼그려 앉아 있는데, 돼지 한 마리가 우리에서 빠져 나오더니 마당에 널어놓은 술밥을 먹으면서 더러운 발로 마구 헤집고 다녔다. 하지만 김선달은 돼지를 쫓지 않고 가만히 지켜보기만 했다. 잠시 후 방에서 나온 주모가 깜짝 놀라 돼지를 붙잡아 우리에 집어넣은 다음 김선달에게 항의했다. “아니, 나리는 돼지가 술밥을 저 지경으로 만드는 걸 그냥 보고만 있었소?” 그러자 김선달은 멀뚱한 표정을 지으며 “나는 돼지가 맞돈 내고 먹는 줄 알았지.” 하곤 밖으로 나가버렸다.

주모가 외상술 주지 않았다는 이유로 김선달은 인간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았던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그의 치명적인 이기심을 엿볼 수 있다. 혹자들은 욕심 많은 주모가 당한 것이 인과응보라 하여 박수를 칠지도 모르지만 그것은 그녀의 생계와 관련된 일이었다. 김선달이 보통의 경우처럼 사기를 쳐서 이득을 얻은 것은 아니지만 방관을 통해 복수를 단행하는 그가 서민의 친구로는 보이지 않는다.

그러고 보면 김선달 설화는 정의가 아니라 생존을 다루고 있다. 양반들도 재산이나 배경이 없으면 출세가 불가능하고, 서민들 역시 관리들이 시키는 대로 고분고분 따르다가는 삶이 무너진다. 그러니 권력자에게 뇌물을 주든지 부자에게 사기를 치든지 어쨌든 가능한 수단과 방법을 총동원하여 살아갈 방도를 모색하라는 것이다.

김선달은 평양 감사로부터 한양의 정승에게 귀한 벼루를 배달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그런데 상경하는 도중 주막집에서 만난 기생을 희롱하다 실수로 벼루를 떨어뜨려 깨뜨리고 만다. 이윽고 정승 댁에 다다른 그는 일부러 문지기와 승강이를 벌이다 고의로 넘어지면서 깨어진 벼루를 박살내 버렸다. 그런 다음 정승에게 문지기 탓을 함으로써 궁지에서 벗어난다.

김선달은 이처럼 기발한 행각을 통해 당대의 백성들에게 대리만족을 안겨주었다. 그의 방법을 현실에서 시도한다면 성공 확률은 그리 높지 않을 것이다. 그처럼 보통 사람으로서는 불가능한 일이기에 그의 활약상에 대한 기대감과 성취감이 배가되었을 것이다.

승려와 장님을 조롱하다

숭유억불 정책을 펴던 조선 시대에 승려는 팔천의 한 부류로 천민 취급을 받았다. 그들은 산천 유람하는 고관대작들의 가마꾼이 되었고 산성을 쌓았으며 종이와 두부를 만들어 바치는 등 고된 노역에 시달렸다. 신성한 사원은 선비들의 놀이터가 되거나 과거 공부하는 장소로 전락했다. 서민들도 점차 불교 배척 풍조에 물들면서 승려들을 무시하고 천대했다.

이런 세태를 증명하듯 김선달 설화 속에서 승려들은 실수로 죽여도 책임질 필요가 없는 존재로 그려진다. 평안북도 선천의 구전 설화에서 김선달은 승려 세 사람과 힘내기를 하여 승리하는데 첫째와 셋째 승려가 그 과정에서 목숨을 잃는다. 한데 설화는 김선달과 승려의 승부에 초점을 맞출 뿐 힘내기의 원인이나 비극적인 결과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다.

이처럼 사회적 약자를 멸시하는 경향은 장님 골탕 먹이는 이야기에서도 마찬가지다. 김선달은 장님을 얕보고 업신여기는 데 하등의 망설임이 없다. 그 과정에서 금전적 이득을 취하는 경우도 다반사였다.

봉이 김선달의 옆집에 장님이 한 명 살았다. 어느 날 김선달은 장님에게 목욕하러 가자면서 동네를 대여섯 바퀴를 빙빙 돈 다음 오줌통에 큰 돌을 넣어 툼벙 소리를 낸 다음 “내가 먼저 물속에 들어왔으니 당신도 빨리 들어오게.”라고 재촉했다. 장님이 멋모르고 옷을 벗고 들어갔다가 오줌만 실컷 먹었다.

이튿날 김선달은 장님에게 게를 잡으러 가자면서 또 다시 집을 몇 바퀴 돈 다음 똥덩어리를 주며 잘 받아두라고 했다. 장님이 똥덩어리를 물동이 안에 고이 모셔 놓고 색시가 돌아오자 게를 많이 잡았다고 자랑했다. 색시가 보니 게가 아니라 똥이라고 타박하니 그제야 김선달에게 속은 줄 알았다.

서민의 삶을 노래하다

김선달 설화에는 무능한 선비를 조소하는 이야기도 많이 등장한다. 바야흐로 공고했던 신분제가 흔들리면서 사회가 급격하게 바뀌고 있는데 여전히 공자 왈 맹자 왈 하면서 무위도식을 일삼고, 한겨울에 홑옷차림으로 벌벌 떨면서도 겻불조차 쬐지 않는 몰락양반들은 서민들에게도 한심한 족속이었다. 김선달은 이런 선비들을 마음껏 조소하고 희롱한다.

이런 김선달의 행동은 사람들에게 어떤 교훈을 전해주려는 것이 아니다. 오직 남을 속이는 행위를 통해 통쾌감을 유발시키기 위해서인 것이다. 그러기에 김선달 설화 속에서는 《고금소총》 류의 음담패설도 여과 없이 표현된다. 등장인물의 면면도 팥죽장수, 순라꾼, 고을사또, 평양감사 등 지위고하를 가리지 않는다. 그의 이름을 통하면 누구나 속일 수 있고 누구나 바보로 만들 수 있다.

그렇지만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질 때가 있다. 경기도 강화 지방의 김선달 설화에는 김선달이 한 여인을 희롱하다가 되치기를 당해 그녀의 아들 신세가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세상은 참으로 공평해서 김선달 같은 사람에게만 특별한 재능을 준 것이 아니므로 늘 조심하라는 뜻이겠다. 봉이 김선달은 실로 조선 후기의 변화하는 사회 속에서 민중들이 가지고 있던 소망과 저항 의식, 웃음, 재치, 풍자 등을 한데 버무려 빚어낸 기묘한 인간형이었다.

봉이 김선달
봉이 김선달

참조

  • ・ 〈한국 소화의 연구〉 신월균. 인하대학교 석사학위 논문. 1981.
  • ・ 〈한국 사기담 연구〉 최명동. 인하대학교 석사학위 논문. 1987.
  • ・ 〈봉이 김선달 설화 연구〉 이왕주. 한국교원대학교 석사학위 논문. 2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