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랍의 봄

아랍의 봄

다른 표기 언어 Arab Spring

요약 2010년 12월 18일 튀니지에서 일어난 대규모 시위를 시작으로 이집트, 리비아, 시리아 등 아랍 세계로 번진 민주화 운동을 뜻한다. 튀니지, 이집트, 리비아에서 오랜 기간 철권통치를 펼쳐온 독재자들을 하야시키는 계기가 됐다. 그러나 상당수 나라가 내전에 시달리는 등 독재정권 이후 새로운 체제를 수립하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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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시작 : 튀니지 청년 노점상의 분신
  2. 독재 정권 붕괴
  3. 험난한 민주화의 길
    1. 튀니지 : 국민 4자 대화기구
    2. 이집트: 군사정권으로 회귀
    3. 리비아 : 두개로 갈라진 나라
    4. 시리아 : 끝나지 않는 내전

시작 : 튀니지 청년 노점상의 분신

튀니지 시위
튀니지 시위

2010년 12월 남동부 지방도시인 시디 부지드 거리에서 무허가 청과물 노점상을 하던 26세 청년 무함마드 부아지지는 경찰의 단속으로 과일과 좌판을 빼앗겼다. 대학을 졸업하고도 취직을 못해 노점상을 하던 그는 시청에까지 찾아가 항의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는 2010년 12월 17일 시청 앞에서 분신자살을 시도했다. 그의 분신 소식은 트위터와 페이스북, 블로그 등을 통해 도시 전역으로 퍼져나갔고, 대규모 시위로 나타났다. 특히 2011년 1월 4일 부아지지가 끝내 사망하면서 시위는 더욱 커졌다.

튀니지의 시위는 리비아, 이집트, 예멘, 시리아 등 북아프리카와 중동 주요국으로 확산됐다. 당시 이들 나라는 모두 독재 정권의 장기 통치 하에 놓여있었다. 독재 기간은 튀니지의 벤 알리 대통령 24년(1987∼2011), 이집트의 무하마드 호스니 무바라크 대통령 30년(1981∼2011), 예멘의 압둘라 살레 33년(1978∼2011), 리비아의 무아마르 카다피 42년(1969∼2011)에 이른다.

이에 더해 경제 높은 청년실업, 빈부격차, 물가 폭등 등이 시위를 촉발시킨 직접적인 원인으로 꼽힌다. 튀니지, 이집트 등 이들 나라는 식량을 수입에 크게 의존하는 데, 2007년부터 국제 식량 가격이 급격히 오른데다 2010년 최악의 가뭄으로 러시아가 밀 수출을 금지하면서 곡물 가격이 크게 올라 많은 시민들이 빈곤에 허덕였다. 이들은 튀니지에서 무함마드 부아지지의 분신사건이 일어나자 SNS를 통해 분노를 공유하고 시위를 확신시켰다.

독재 정권 붕괴

당시 튀니지는 엘 아비디네 벤 알리(74) 대통령이 1987년부터 23년간 장기 집권하면서 부정부패, 14%가 넘는 높은 실업률, 물가 폭등 등으로 국민의 불안이 높을 때였다. 튀니지 시민들은 수도 튀니스를 비롯해 전역에서 벤 알리 대통령의 퇴임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였고 튀니지 정부의 강제 진압 과정에서 300여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결국 벤 알리 대통령은 2011년 1월 14일 사우디아라비아로 망명했다. 튀니지의 민주화 시위는 이들의 국화에 빗대 '재스민 혁명'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튀니지의 재스민 혁명은 이집트로 번졌다. 이집트의 호스니 무바라크 대통령은 국가비상사태법을 30년 간 유지하면서 철권 통치를 해왔다. 튀니지의 재스민 혁명이 알려지자 2011년 1월 14일 소규모로 시작된 시위는 1월 25일부터 호스니 무바라크의 퇴진과 정치·경제 개혁을 요구하는 대규모 시위로 이어졌다. 정부의 강경진압에 시위대 850여 명이 사망했다. 결국 시위 시작 18일 만인 2월 11일 호스니 무바라크는 군부에 권력을 이양하고 대통령직을 사임했다.

리비아 시위
리비아 시위

아랍의 봄은 리비아에서 무려 42년간 잔혹한 독재 정치를 펼쳐온 무아마르 카다피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카다피는 1977년부터 선거와 정당제도는 물론 헌법도 폐지하고 자마히리야(인민권력)라는 전제 독재체제를 구축해 리비아를 통치해왔다. 그러나 좌우로 국경을 맞대고 있는 튀니지와 이집트에서 잇따라 독재정권이 무너지자, 리비아에서도 거센 반정부시위가 일어났다. 카다피는 시위대에 무차별적으로 총을 발사하고 장갑차와 미사일을 동원해 시위대를 압박했다.

리비아에서 벌어진 민주화 운동은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의결과 나토의 군사개입으로 성격이 다소 변질됐다. 나토는 영국, 프랑스 등이 전면에 나서 '민간인 보호'를 명목으로 2011년 3월 리비아 공습을 결정했다. 카다피는 나토의 공습을 '침략'이라고 주장하며 저항했고, 나토의 공습 5개월 만인 8월 20일 리비아 반군은 트리폴리 시를 점령하고 카다피의 세 아들을 체포했다. 카다피는 10월 20일 고향 시르테에서 시민군에 생포된 후 사살됐다.

예멘에서는 1978년부터 33년간 철권통치해온 알리 압둘라 살레 대통령이 하야했다. 2011년 1월 27일 사나에서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고 같은해 11월 걸프국가협력기구와 살레 대통령은불처벌을 조건으로 신병 치료차 미국으로 떠나는 형식으로 하야하기로 합의했다.

험난한 민주화의 길

아랍의 봄을 맞은 나라들은 유혈사태를 거치며 독재자를 몰아냈지만, 그 이후 새로운 체제를 수립하기는 쉽지 않았다. 아랍 국가 가운데 튀니지만이 비교적 평화적으로 민주화의 길을 이행하고 있다고 평가받을 뿐, 그외의 국가들은 군부정치로 돌아거나 수많은 난민을 발생시키며 내전으로 빠져들었다.

튀니지 : 국민 4자 대화기구

벤 알리 대통령의 망명 이후 23년만에 처음으로 자유 총선이 열렸다. 2011년 10월 23일 치러진 선거로 온건 이슬람주의 정파 '엔나흐다'가 집권했으나 세속주의와 이슬람주의 세력간 극심한 대립이 벌어졌다. 2012년 6~8월에는 급진 이슬람주의자들이 엔나흐다 정권 주요인사들을 공격하는가 하면, 2013년 2월과 7월에는 주요 야당 지도자가 총격으로 암살당하는 사건도 잇따라 일어났다.

이때 튀니지 국민4자대화기구가 출범했다. 이 대화기구는 노동단체들이 중심이 되어 만들어진 국민 협의체로, 튀니지노동연맹(UGTT), 튀니지산업·무역·수공업연합(UTICA), 튀니지인권연맹(LTDH), 튀니지변호사협회(ONAT) 등 4개 조직이 연합해 결성했다. 이들은 이슬람 정당과 세속정당 사이에 대화의 장을 마련하고 중재를 해왔다. 반 년 이상의 협상 결과 엔나흐다는 자발적으로 퇴진하고 조기 헌법제정과 총선 실시를 통해 새로운 과도정부를 수립하기로 합의했다.

이후 2014년 1월 26일 튀니지는 국회의 94% 지지를 얻어 아랍 국가 중 가장 진보적인 것으로 평가받는 새로운 헌법을 제정했다. 이 헌법은 이슬람교를 튀니지의 국교로 정하고 있으나 '샤리아(이슬람 율법)'를 법의 근간으로 한다고 명시하지 않고, 여성의 권리도 보호하도록 규정했다. 그리고 2014년 10월 총선을 실시해 세속주의 정당인 '니나투니스'가 제1당을 차지했고, 같은 해 12월 첫 자유 경선을 통한 대통령선거에서 베지 카이드 에셉시 대표가 선출됐다.

노르웨이 노벨위원회는 2015년 10월 9일 튀니지의 '국민 4자 대화기구'를 "튀니지의 다원적 민주주의 구축에 결정적 공헌을 했다"며 노벨평화상 수상자로 결정했다고 발표했다.

이집트: 군사정권으로 회귀

이집트는 무바라크의 사임 이후 민주주의 절차에 따라 새로운 대통령을 선출했으나 갈등 끝에 다시 군부로 회귀했다. 2012년 6월 24일 선거에서 이슬람주의 조직인 무슬림형제단 출신인 무함마드 무르시가 이집트의 새로운 대통령으로 당선된다. 그러나 경제난은 여전했고 치안 유지, 전기와 물의 공급 등 기본적인 행정도 원활하지 않자 시민들의 불만이 고조됐다. 결국 무르시 정권은 2013년 7월 3일 집권 약 1년 만에 쿠데타로 축출됐고 군부가 들어섰다.

쿠데타를 주도한 압델 파타 엘시시 대통령은 무르시 대통령을 반역죄에 테러단체 연루 혐의로 구금하고 무슬림형제단을 불법 단체로 낙인찍어 해체했다. 항의하는 비무장 시민들에게 무차별 사격을 가해 최소 1500명이 목숨을 잃었고 1만5000명 이상이 투옥당했으며 1000명이 넘는 무르시 지지자들이 사형, 종신형 등을 선고받았다.

그럼에도 엘시시 대통령는 세속주의 세력의 광범위한 지지를 받이 2014년 5월 치러진 대선에서 권력을 잡았다. 엘시시 정권은 전 독재자 무바라크에 대한 재판에서 시위대 유혈진압 혐의에 무죄를 선고하는 한편, 무르시 전 대통령에게는 징역 20년을 선고했다. 이후 반정부 시위와 유혈진압이 반복되고 있다.

리비아 : 두개로 갈라진 나라

카다피 정권 붕괴 이후 리비아에서는 국가과도위원회(NTC)에 이어 이슬람계가 다수를 차지한 제헌의회가 2012년 7월 구성됐으나 비이슬람계 무장단체와 이슬람 무장단체 간의 교전이 끊이지 않았다. 이러한 가운데 2014년 5월 퇴역 장성 하프타르가 이끄는 '국민군'이 의회의 해산을 요구하며 사실상의 쿠데타를 일으키며 갈등이 최고조에 달했다.

2014년 6월 총선이 치러졌으나 선거에서 패한 이슬람계 반군 '파즈르 리비아(리비아의 여명)'는 수도 트리폴리에 제헌의회와 정부를 수립했다. 선거로 구성된 비이슬람계 주축이자 친서방파로 분류되는 과도 정부는 동부 토브루크로 피신해 별도의 정부와 의회를 수립했다. 사실상 두개의 정부와 두개의 의회가 있는 상황이 된 것이다.

이러한 상황은 리비아에 권력 공백을 낳았다. 극단 이슬람 무장조직 이슬람국가(IS)가 세력을 확장했고, 각 지역에 우후죽순 군벌세력이 생겨났다. 전국에 약 1700개의 무장세력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 중 상당수는 IS에 동조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국제사회는 리비아 통합을 위해 중재안을 내놨다. 유엔은 리비아에 통합정부 구성안을 제안했다. 베르나르디노 레온 유엔 리비아 특사는 2015년 10월 9일 "리비아 각 지역 대표들과 1년여 동안 협상을 벌여온 결과 하나의 통합정부안을 도출하게 됐다"고 발표했다

시리아 : 끝나지 않는 내전
시리아 내전
시리아 내전

2011년 3월 10대 학생들이 시리아 남부 소도시 다라의 한 학교 담에 혁명 구호를 적었다가 체포되어 고문을 당했다. 이 소식이 알려지자 학생들의 석방을 요구하는 평화시위가 시작됐고, 바샤르 알아사드 대통령이 유혈 진압했다. 이에 시위가 확산됐고, 알 아사드 대통령은 2011년 7월 전차와 항공기까지 동원한 무차별 폭격과 포격을 벌였고, 이에 반 정부군이 조직되어 내전 양상으로 비화됐다. 아사드정권은 독가스까지 써가며 대량학살을 자행했다.

시리아는 45년 동안 아사드 일족의 독재가 이어져왔다. 독재는 1971년 군사 쿠데타로 권력을 잡은 하페즈 알아사드에서 2000년부터 권력을 물려받은 아들 바샤르 알아사드 현 대통령으로 이어져 왔다. 이에 더해 종파간 차이도 사태를 격화시키는 요인이다. 알아사드 정권의 핵심 지지층은 이슬람 시아파의 한 분파인 알라위파 신자들인데 이들은 시리아 인구의 10% 정도에 불과하며 나머지 대다수 국민은 이슬람 수니파다.

이러한 갈등에 수니파 종주국인 사우디아라비아, 시아파 종주국인 이란이 저마다 지역 패권을 노리며 개입해 내전은 한층 복잡해졌다. 시아파 종주국인 이란은 알아사드 정부군에 자금과 무기, 병력을 지원했고 수니파의 종가격인 사우디아라비아는 대부분이 수니파인 시리아 반군을 지원한다. 게다가 수니파 극단주의 무장세력인 이슬람국가(IS)까지 끼어들어 시리아 내전을 악화시켰다. 이에 수많은 난민이 고통을 받았다.

참고문헌

  • ・ <뉴스1>, 튀니지 재스민 혁명 이후 주요 일지, 2015년 10월 9일
    http://news1.kr/articles/?2453913
  • ・ <연합뉴스>, 이집트 시민혁명 4주년…군사정권 회귀·표현 자유 위축, 2015년 1월 5일
    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15/01/25/0200000000AKR20150125001200079.HTML?input=1195m
  • ・ SBS, 월드리포트-리비아, IS의 '제 2 근거지' 되나?, 2015년 4월 16일
    http://news.sbs.co.kr/news/endPage.do?news_id=N1002931736
  • ・ '아랍의 봄' 발생과 기원의 정치문화적 배경과 정치변동, 하병주, 지중화지역연구, 2014년 2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