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토벤

베토벤

루트비히 판 베토벤, Ludwig van Beethoven

어떤 작곡가들은 편의적으로 구축된 시대 구분에 단순하게 들어맞지 않는 경우가 있다. 대부분의 음악사학자들은 고전주의 시기의 마지막과 낭만주의 시기의 시작을 약 1800년경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살아온 시기가 양쪽 시기에 약 25년씩 걸쳐 있으면서 너무나 개성이 강해서 단순히 분류될 수 없는 한 명의 작곡가가 있는데 그가 바로 베토벤이다.

전성기 때 베토벤
전성기 때 베토벤

베토벤은 1770년에 태어났고 하이든과 모차르트가 여전히 살아 있으면서 왕성하게 작곡 활동을 하는 동안에 성장했다. 젊은 시절 그가 듣고 공부했던 음악은 형식면에서 엄격한 고전주의였다. 그러나 그가 죽은 1827년은 19세기 내내 이어진 낭만주의가 만개한 시기였다.

변화의 시기를 살아간 모든 위대한 예술가들처럼 베토벤은 변화의 수혜자이면서 부분적으로는 그러한 변화에 대한 책임을 지고 있다. 그는 고전주의 시대로부터 물려받은 형식, 절차, 이상을 취하면서 이전에 받아들여졌던 한계를 넘어 그것들을 발전시켰다. 교향곡, 협주곡, 소나타, 현악 4중주 등 고전주의 장르를 19세기로 가져와 새로운 세대를 위한 음악 표현 수단으로 변형시켰다. 그는 고전주의의 경계를 뚫고 나와 전례 없이 광범위하고 깊이 있는 작품세계를 창조해냈다. 오케스트라를 확장했고, 음악 구조를 바꿨으며, 교향곡에 합창을 추가했고, 순전히 악기로만 이루어진 작품들에 내러티브를 덧붙였다. 이 모든 것들은 19세기뿐만 아니라 그 이후로도 광범위한 영향을 미쳤다. 마지막으로, 그는 이전에는 없었던 방식으로 개인적인 주관성과 그의 기이한 개성을 뚜렷하게 표현한 기악음악을 만들어냈다. 그는 한 시대의 아이이자, 또 다른 시대의 아버지였다.

인용문
베토벤의 역사는 19세기 지적 역사와 마찬가지다.
칼 달하우스(Karl Dal-haus)

베토벤의 생애

베토벤은 아마도 모든 시대를 통틀어 가장 유명한 음악가일 것이다. 1827년에 사망한 이래로, 그는 서양 음악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로 숭배되었다. 후대 작곡가들 대부분이 그가 성취한 것에 압도당할 만큼 후대에 남긴 그의 영향은 거대했다.

베토벤의 창작력
베토벤의 창작력
베토벤의 초기 삶

루드비히 판 베토벤(Ludwing van Beethoven)은 1770년 음악가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독일의 주요한 도시였던 본(Bonn)의 지방 통치자인 선제후 궁정의 전문 음악가였다. 그의 할아버지는 굉장히 존경받는 인물이었지만, 그의 아버지는 알콜 중독 증세 때문에 궁정에서 약간은 문제의 대상이었다. 10대부터 베토벤은 가족의 재정적 부분을 책임져야 했으며, 궁정에서 일을 시작했다. 그는 오르간과 작곡을 공부했고 악기들을 관리하는 일을 도왔다. 동시에 그는 음악을 작곡하기 시작했는데, 대부분의 작품은 노래와 실내악이었다.

알아두기

베토벤 연대기
1770 : 독일 본에서 음악가 가족으로 태어남
1792 : 비엔나로 가 프란츠 요제프 하이든(Franz Joseph Haydn)과 공부함
1792~1802 : 작곡과 연주의 초기(대부분 건반 악기와 실내악 작품임)
1802 : 청력을 잃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발견함
1802~1812 : 작곡 시기의 중기로 베토벤은 실내악뿐만 아니라 6개의 교향곡, 4개의 협주곡, 5개의 현악 4중주, 오페라, 몇 편의 관현악 서곡과 피아노 소나타를 작곡함
1815 : 형의 죽음 이후로 베토벤은 형수와 조카 칼(Karl)의 양육권을 두고 다툼
1817 : 청력을 완전히 잃음
1820~1822 : 마지막 피아노 소나타들
1824 : 9번 교향곡
1825~1827 : 마지막 현악 4중주들
1827 : 56세의 나이로 사망

1790년, 본에 중요한 사람이 왔다. 바로 프란츠 요제프 하이든으로, 그는 당시 런던을 방문하던 길이었다. 그는 어린 베토벤을 만났고 런던에서 비엔나로 돌아올 때 베토벤을 제자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1792년, 베토벤은 비엔나로 가서 위대한 거장과 함께 공부했다. 그때 베토벤은 22세였고, 하이든은 60세였다.

분명한 사실은, 비엔나에서의 레슨이 원활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하이든은 약간은 거만하고 구식이었고, 베토벤은 반항적이고 고집불통이었다. 그러나 베토벤은 아주 훌륭한 피아니스트였고, 그는 곧 비엔나에 살고 있던 예술 후원가들의 지지를 얻을 수 있었다. 리치노프스키(Lichnowsky) 왕자각주1) 는 그에게 식사를 제공하고 자신의 궁전에 숙소도 제공했다. 그 대가로 베토벤은 음악을 작곡하고 적어도 약속된 저녁 파티에서는 피아노를 연주해야 했다. 사실, 베토벤은 누군가에게 의존하는 것을 싫어했고 종종 연주하기를 거부했다. 그러나 왕자는 매우 관대했고 결국에는 궁전 안에 베토벤만을 위한 방을 마련해주고 그가 하고 싶을 때만 작업할 수 있도록 했다.

인용문
하이든에게서 어떤 교훈을 얻기는 했지만, 그에게서 배운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베토벤

초기 베토벤은 대부분 건반 악기와 실내악 곡들만 썼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는 그 당시 좀 더 큰 음악 형식들인 현악 4중주, 피아노 협주곡, 교향곡 등을 작곡해보기로 결정했다. 32세가 될 때까지 베토벤은 피아노 소나타들과 수많은 실내악 작품들, 6곡 세트로 된 현악 4중주, 3곡의 피아노 협주곡, 2곡의 교향곡을 작곡했다. 현악 4중주, 협주곡, 교향곡들은 하이든과 모차르트에게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베토벤의 음악은 이미 엄청난 개성을 보여주기 시작하고 있었다. 첫 번째 교향곡은 올바른 조성으로 발전하기 전에 고의적으로 잘못된 조성으로 시작한다. 세 번째 피아노 협주곡은 강력하게 단일화된 리듬을 특징으로 하고 있다. 초기 현악 4중주곡들 중 하나의 마지막 악장은 ‘라 말린코니아(La Malinconia)’, 즉 ‘멜랑콜리’라고 이름 붙여진, 표현력이 풍부한 느린 도입부로 시작한다.

베토벤은 그의 삶을 놓고 봤을 때 이 시기에 ‘멜랑콜리’를 느낄 만한 모든 이유를 갖고 있었다. 1802년 그는 남은 삶 전체를 경악하게 만든 비극적 진실을 알게 된다. 바로 청력을 잃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자살을 심각하게 고민했지만 절망을 극복하고 음악을 하는 것이 자신의 의무라고 결심했다. 그는 자신의 마음 속에 있는 작품들을 만들어야만 했다.

인용문
“나는 비참한 삶을 살고 있다고 고백할 수밖에 없네. 나는 전적으로 나의 음악 속에서 살고 있네.”
1801년 베토벤이 친구에게 보낸 편지 내용

그의 병은 점점 악화되었다. 몇 년 뒤에는 완전히 청력을 잃게 되었다. 잠시 정상적인 청력으로 돌아왔던 순간들도 있었으나, 1817년이 되자 베토벤은 어떤 소리도 들을 수 없게 되었고, 그와의 대화는 나팔형 보청기와 그의 목에 매달린 노트에 의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었다. 청각 상실로 인해 베토벤은 연주하거나 지휘할 수 없게 되었지만, 그의 삶이 끝날 때까지 작곡은 멈추지 않았다. 그는 그의 머리 속에 있는 모든 것을 들을 수 있었다.

베토벤의 영웅적 시기

베토벤 삶의 중반부는 작품에 대한 강렬한 집중과 역경에 대한 승리의 정신으로 특징지을 수 있다. 이러한 이유로 ‘영웅적’ 시기라고 일컬어진다. 그는 모든 삶의 문제를 극복하려고 마음먹고 있었다. 그는 한 편지에서 “나는 운명의 목을 조를 것이다.”라고 썼다. 이 시기에 그는 놀라우리만큼 왕성한 창작력을 보여주었다. 1802년부터 1812년까지 10년 동안 베토벤은 실내악들뿐만 아니라 6개의 교향곡, 4개의 협주곡, 5개의 현악 4중주, 오페라 전곡, 몇 곡의 관현악 서곡들, 그리고 여러 편의 중요한 피아노 소나타들을 작곡했다.

이 시기 베토벤이 작곡한 음악들은 강하고 남성적이며, 이와 함께 서정성이 뛰어난 악구들을 대조시킨다. 이러한 대조는 작품들 사이(예를 들어, 교향곡 4번, 6번과 8번은 온화한 반면에 교향곡 3번, 5번, 7번은 좀 더 강렬하다.)에서도 존재하고 한 작품 안에서도 존재한다. 몇몇 작품들은 공격적인 클라이맥스를 구성한 후, 완전히 순수한 아름다움과 찬란한 광채의 순간으로 이동한다(피아노 협주곡 5번의 1악장이 이렇다.). 모차르트와 같이 베토벤은 자신의 기교를 보여주기 위해 피아노 협주곡을 작곡했다. 그러나 곧 그는 청각 상실로 인해 대중 앞에서 연주를 할 수 없게 되었고, 점점 더 내성적이면서 반사회적이 되어 갔다. 그가 때때로 날씨를 무시하고 코트나 모자 없이 시골길 주변을 혼자 중얼거리면서 걷는 것이 목격되기도 했다.

이러한 영웅적 시기의 작품과 관련해 가장 놀라운 것은 곡의 길이다. 3번 교향곡부터 베토벤은 이전 음악가들보다 훨씬 더 대규모의 작품을 쓰기 시작했다. 3번 교향곡의 1악장 하나만으로도 하이든이나 모차르트의 전체 교향곡 길이만큼 길었다.

이 시기 동안 베토벤은 매우 유명해졌다. 그의 고국이 프랑스와 전쟁을 치르던 시기에 베토벤의 작품은 강력하고 애국적인 것으로 여겨졌다. 그는 심지어 웰링턴 공작이 나폴레옹에게 승리를 거둔 것을 축하하기 위한 〈전쟁 교향곡〉(전부가 관악기의 팡파르와 대포 발사 소리로 이루어진)같이 공공연하게 정치적인 작품들을 쓰기도 했다. 그는 또한 매우 부유해졌다. 그의 음악은 그 어느 때보다 많이 출판되고 공연되었으며, 이에 따른 그의 수입은 귀족과 왕실의 후원만큼 많았다.

베토벤의 개인적 위기와 작곡의 중단

놀라울 정도로 많은 작품을 만들어내던 영웅적 시기 이후, 베토벤은 몇 년 동안 가족사에 휘말려 창작에 몰두하지 못하는 시기를 보냈다. 1815년, 베토벤의 형이 죽으면서 그의 아내와 베토벤에게 자신의 아들이자 베토벤의 조카인 칼의 양육권을 공동으로 남겼다. 이는 베토벤에게 굉장한 혼란과 정신적 고통을 야기했다. 결혼을 한 적은 없지만 베토벤은 종종 그를 편안하게 해주는 아내와 자신의 아이들이 있는 정상적인 가족을 동경해왔다. 베토벤은 친구에게 한번은 “불가능하기에 그런 꿈을 꾸려 하지 않지만... 그 꿈을 내 마음 속에서 버릴 수가 없다.”고 말한 적이 있다.

갑자기 한 아이의 양육 책임을 맡게 되고 젊은 여성과 가까운 관계를 맺게 된 것은 베토벤의 평정심을 완전히 뒤흔들었다. 그는 조카 칼의 양육권을 혼자 갖기 위해 그의 형의 미망인과 엄청난 법정 다툼을 벌였다. 그 다툼은 몇 년 동안 이어졌고, 이는 베토벤의 기력을 서서히 약화시켰고 마음의 평화를 무너뜨렸다(조카와 그의 가난한 어머니는 말할 것도 없었겠지만). 결국, 베토벤은 법적 분쟁에서 이겼고(그에게는 힘 있는 친구들도 있었다.), 칼은 그와 함께 살게 되었다. 하지만 베토벤은 지독히 엄격하고 자식에 대한 소유욕이 강했기 때문에 그 둘의 관계는 험악했다. 19세 때, 칼은 시계를 전당포에 맡기고 두 자루의 총을 사 자살을 시도했다. 칼은 곧 회복했지만 이러한 행동은 베토벤을 자각하게 했다. 칼은 그의 어머니의 집으로 돌아갈 수 있게 허락받았고, 군대에 감으로써 베토벤의 통제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베토벤의 성격

베토벤은 종종 거칠고 공격적이면서, 극도로 참을성이 없고, 분노가 치밀어 오를 때는 난폭해지는 경향이 있는 인물로 그려지곤 한다. 이러한 작곡가의 이미지에는 어느 정도 사실인 부분도 있지만, 그의 인간성의 복잡한 면을 다 드러내기에 적절하지 못한 면도 있다.

그는 유럽사회의 기존 계급구조가 의문시 되던 시기에 살았으며, 계급이 갖고 있는 권위에 대해 양면적 입장이었다. 귀족의 저택에서 연주를 요청받게 되면 그는 단독으로 방을 쓸 것을 요구하였다. 그는 규정된 사회 예절을 따라야 한다는 생각을 혐오했다. 게다가 그의 청각 상실은 자연스럽게 그를 더욱 내성적이고 비사교적으로 만들었다.

베토벤의 성격에는 여러 모순된 부분들이 있었다. 때때로 그는 온화하고 친절했고, 어떤 경우에는 냉정하고 적대적이었다. 그는 혼자 있기를 좋아하는 사람이었지만, 여러 명의 친한 친구들과 함께하는 것도 즐겼다. 그는 비엔나의 비좁은 숙소에서 작업하는 것에 만족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시골 길을 오래 걷는 것을 즐겨했고 종종 시골 마을에서 여름을 보내기도 했다. 그는 또 평온한 가정생활에 대한 바람을 자주 표현했지만, 결혼하지는 않았다. 아마도 우리는 베토벤처럼 비범한 천재들에게서 그러한 모순됨을 기대하는지도 모른다.

베토벤의 만년

칼과의 전쟁으로 가장 격렬한 시기를 보낸 후에야 베토벤은 천천히 작품 창작력을 다시 얻게 되었다. 그의 인생 후반부에서 가장 중요한 작품들은 마지막 3개의 피아노 소나타, 9번 교향곡, 그리고 일련의 현악 4중주곡들이다. 피아노 소나타들은 놀라운 작품들로, 형식과 구성에서 기존 틀을 벗어나 있고, 복잡함과 단순함의 병치 속에서 매우 큰 감동을 준다. 1824년에 최종적으로 완성된 9번 교향곡은 경계를 허무는 베토벤 전통을 이어갔다. 4명의 독창자와 합창을 포함하고 있는 혁명적인 마지막 악장이 들어 있는 이 교향곡의 영향력은 엄청났다. 이후 많은 작곡가들이 여러 가지 방식으로 모방하였지만, 교향곡에서 성악을 사용하는 것은 그 당시에는 들어보지 못한 일이었다. 9번 교향곡 마지막 악장에 사용된 가사는 독일의 유명한 시인인 쉴러의 시 ‘환희의 송가(Ode to Joy)’이다. 그것은 베토벤 인생 철학의 총체라고 할 수 있다. “모두 함께 가자, 모든 사람들이 형제가 될 것이다, 모두 신 앞에 무릎 꿇자.”

베토벤의 마지막 3년은 전적으로 현악 4중주에 바쳐졌다. 이 가장 친숙한 장르를 통해 베토벤은 그의 가장 개인적인 관념과 생각들을 전달하였다. 베토벤의 마지막 현악 4중주들은 그의 가장 훌륭한 작품인 동시에 가장 도전적인 음악이었다고 많은 사람들이 생각했다. 불협화음적인 패시지와 리듬적 복잡함과 더불어 매우 부드럽고 아름다운 순간도 있는 그의 현악 4중주들은 서양 음악 전통에서 가장 심오한 음악들이다. 베토벤각주2) 은 사람들이 전에 들어보지 못한 방식으로 음악사에 잊을 수 없는 흔적을 남기고 1827년 3월 26일 56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인용문
나는 천국에서 들을 수 있을 것이다.
베토벤의 마지막 말
베토벤의 작곡 습관

베토벤이 나이 들어가고 사회에서 점점 더 멀어짐에 따라, 그는 자신만의 예술 세계에 완전히 몰입했다. 그는 습관적으로 식사를 걸렀고, 각종 초청들은 잊어버리거나 무시했으며, 주로 밤에 작업했다. 베토벤은 그 자신 안에서 음악 창작에 대한 강력한 압박을 느꼈고, 스스로를 ‘끊임없는 작업’으로 끌어들였다. 그러나 그 같은 창조적 열망을 죽음이 가까워 오면서 덜 겪었다. “지난 얼마간 나는 3개의 위대한 작품에 대한 생각을 늘 지니고 다녔다... 서로 다른 그리고 이전에 내가 쓴 교향곡들과도 전혀 다른 2개의 교향곡과 하나의 오라토리오, 이들을 나는 반드시 해치워야 한다... 나는 그러한 규모로 작업을 시작하는 것이 두렵지만, 일단 시작하면, 모든 것은 잘 마무리된다.”

베토벤이 그의 음악적 생각들을 작업해놓은 스케치북의 상당수를 보유하고 있다는 것은 우리의 행운이다. 이것들은 작곡가가 작업 중에 남겨 놓은 생생한 흔적들을 보여준다.

베토벤이 쓴 음악 필사본
베토벤이 쓴 음악 필사본

베토벤의 음악

베토벤의 음악은 언제나 진지한 음악의 대명사로 거론되곤 한다. 20세기에, 클래식 작곡가를 단 한사람만 아는 누군가가 있다면 아마 베토벤을 알 것이다. 그의 음악은 세계의 어떤 다른 작곡가의 음악보다도 더 자주 연주되고, 연구되고, 녹음되었다.

베토벤의 음악은 호소력 있고, 감동적이며 강렬하여 인간 마음속의 근원에 다다른다. 그의 작품은 단순함과 복잡함, 정서적인 것과 지적인 것의 조화를 보여준다. 우리는 그의 음악을 들으면서 인간의 영적인 측면을 경험하며, 또한 한없이 인간적인 고뇌를 느낄 수 있다.

베토벤의 음악에는 그의 ‘지문’처럼 느껴지는 양식적 특성이 있다. 그의 작품임을 실수 없이 분명히 알아차릴 수 있는 흔적은 다음과 같다.

1. 음악이 거침없이 앞으로 나아가는 듯한 길고 강렬한 크레센도
2. 같은 주제이지만 조용하고 또 매우 크게, 다른 방식으로 연주됨
3. 소나타 형식과 같은 고전주의적 구조의 극적인 사용
4. 갑작스런 전조, 그러나 영향력 있는 화성적 논리에 들어맞음

베토벤 음악에서 가장 유명한 작품들은 생애 중반, 영웅적 국면의 곡들이다. 3번에서 8번까지의 교향곡들, 중기 현악 4중주, 피아노 협주곡 4번과 5번, 바이올린 협주곡과 오페라 〈피델리오〉가 중기의 작품들이다. 이 중 몇 작품들은 실제로 영웅주의와 관련이 있다. 3번 교향곡은 ‘영웅’이라는 제목을 갖고 있으며, 〈피델리오〉(‘충실한 사람’)는 부당하게 감옥에 갇힌 남편을 구하는 여성의 영웅적인 면을 보여준다. 이 시기 음악은 대부분 극적이고 힘이 넘친다.

그러나 베토벤의 음악에는 또 다른 면, 즉 서정적인 측면도 있다. 중기 교향곡 중에는 6번 〈전원〉과 같이 매우 아름답고 부드러운 선율선을 갖는 작품도 있다. 보다 극적인 작품들에서도 매우 부드러운 패시지들이 등장한다. 베토벤 양식의 비밀 중 하나는 한 작품 안에 강함과 부드러움의 패시지를 병치시킨다는 데 있다.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베토벤의 초기 작품들도 있는데, 여기에는 베토벤이 비엔나로 가기 전에 쓴 것들과 비엔나에 온 첫 해에 쓰여진 작품들이 포함된다. 어떤 곡들은 그의 위대한 선배들, 하이든과 모차르트의 작품을 모델로 하고 있으며, 이미 그들과 다른 놀랄 만한 독창성을 보여주는 작품들도 있다. 장르별로는 가곡, 피아노곡, 여러 실내악곡들이 있다.

생애 후기의 작품들은 각각 매우 다른 성격을 갖는다. 9번 교향곡, 〈장엄 미사(Missa Solemness)〉, 후기 피아노 소나타들, 마지막 5편의 현악 4중주가 여기에 포함된다. 베토벤의 마지막 음악은 매우 풍요롭다. 독특하면서 깊이 있고 심금을 울리며, 순수함과 소박함이 복합적으로 들어 있다. 말년에 베토벤은 드라마와 영웅주의에는 더 이상 관심이 없었고, 자신만의 창조성을 추구했다. 이 시기 음악은 어떤 면에서 감상하기에 매우 난해하고 도전적이지만, 반복적으로 청취하는 감상자는 충분히 만족스러운 보상을 얻게 될 것이다.

리버 빈 극장(The Theater on the River Wien)

베토벤의 음악 역사는 비엔나의 오페라 극장인 리버 빈 극장과 깊이 연관되어 있다. 이곳에서 그의 유명한 작품들이 초연되었다. 1801년에 개관한 이 극장은 〈마술피리〉를 비롯한 여러 오페라 대본을 썼고, 다재다능한 연기자이자 오페라 기획자로 모차르트에게 음악을 위촉했던 에마뉴엘 쉬카네더를 위해 건립되었다. 나중에 쉬카네더는 베토벤과도 새로운 오페라로 모차르트 때와 같은 성공을 이루고자 했고, 베토벤을 이 극장의 상주 작곡가로 위촉하였다. 베토벤은 이 극장으로 옮겨와 연주회를 위한 작곡과 지휘 활동을 시작했다.

모차르트와 하이든의 교향곡이 때때로 무대에 올려지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연주회 프로그램은 베토벤의 곡이었다. 1802년에서 1812년 사이에 이 극장은 베토벤의 4개의 교향곡과 오페라 〈피델리오〉를 비롯한 다수의 작품들을 세계 초연하는 본거지가 되었다. 1813년에 극장주가 바뀌고 이곳이 (훨씬 나중에) 오페레타와 뮤지컬을 위한 극장으로 변모하면서 베토벤도 극장과의 인연을 끝내게 된다. 극장 이름은 강변인 것 같지만 리버 빈 극장은 강둑에서 3km 이상 멀리 떨어져 있고 비엔나 남서쪽 중심부에 위치해 있다. 극장 입구에는 〈마술피리〉의 장면을 묘사한 동상과 함께 유명한 파파게노의 문이 있다.

리버 빈 극장
리버 빈 극장 작자미상 / 펜, 잉크와 수채 / 1800년경
베토벤 음악비평

베토벤의 후기 생애 동안 음악 저널리즘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일간 신문들은 음악에 관한 기사나 리뷰를 실었고, 음악 저널들이 생겨났다. 당시의 비평은 오늘날처럼 새로운 음악에 호의적이지만은 않았다. 베토벤의 작곡에 관한 초기 리뷰가 다음과 같이 실렸다.

베토벤 오페라 〈피델리오〉의 서곡에 대해, “공정한 음악가와 음악 애호가들 모두 이렇게 두서없고 날카로운 쇳소리의 혼돈스럽고 귀청떨어질 것 같은 음악은 난생 처음이라는 데에 전적으로 동의했다.”

3번 교향곡에 대하여, “이 작품은 너무 지나치게 길다... 이 교향곡을 어떤 방식으로든 축약시키지 않으면 곧 쓸모 없어질 것이다.”

5번 교향곡에 대하여, “... 일종의 불쾌한 야옹거림”

9번 교향곡에 대하여, “... 투박하고 거친, 무관한 화성들... 이상하고 좋지 못한 취향”

후기 음악에 대해서는 “그는 이제는 많이 작곡하지 않지만, 그가 내놓는 대부분의 작품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모호하고, 설명할 수 없는 것들로 가득하며, 종종 비평가는 물론 청중을 혼란시키는 불쾌한 화성이 등장한다.”

그의 모든 음악에 대하여, “베토벤 음악은 언제나 내게 화난 것처럼 들린다. 여기저기서 망치가 떨어지는 듯하다.”

베토벤의 피아노 연주

청력을 상실하기 전에 베토벤은 당대의 뛰어난 비르투오조 피아노 연주자로 명성을 날렸다. 그가 21세 때, 신문 기사에서는 그를 “가장 위대한 피아니스트 중 하나”라고 묘사했다. 또 다른 동시대인은 그의 즉흥연주의 뛰어남을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어떤 모임에서 연주를 하게 되든 그는 청자들에게 어떻게 감흥을 줄 수 있는지를 알고 있었다. 그의 표현력에는 놀라운 무언가가 있다. 또한 아름다움과 아이디어의 독창성, 기백이 넘치는 그만의 스타일이 있다.”

그러나 베토벤이 거의 완전히 청력을 상실한 1815년에 이르면 평론들은 비통한 내용으로 바뀐다. “그의 귀먹음으로 인해 그토록 존경받던 이전의 비르투오조 예술가는 남아 있지 않게 되었다. 큰 소리를 내는 부분에서 이 가엾은 사람은 현악기들이 거슬리는 소리를 낼 때까지 계속 두드려댔고, 조용한 부분에서는 너무나 약하게 연주하여 어떤 그룹의 음들은 안 들리기도 했으니, 음악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베토벤의 음악 감상의 예

베토벤이 이룩한 성과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의 초기와 중기 작품에서부터 들을 필요가 있다.

베토벤의 5번 교향곡

베토벤의 5번 교향곡은 그가 30대 후반이었던 영웅적 시기 중반에 작곡되었다. 이는 그의 가장 유명한 작품 중 하나이자 가장 많이 알려진 교향곡일 것이다. 음악은 탄탄하며 표현력 있고 이례적인 거대한 통합을 이룬다. 도입부의 네 음 모티브는 ‘단-단-단-장’의 리듬 패턴으로 전체 교향곡에 여러 형태로 스며들어 있다. 1악장의 처음부터 마지막 악장의 끝까지 이 모티브가 자라나고 쌓여가는 듯한 느낌을 준다. 평론가들은 이를 개인적인 승리의 감정으로 해석했다. 이러한 감정은 c단조에서 C장조로 옮겨가면서 더욱 뒷받침된다. 대부분의 교향곡들은 시작한 조성으로 끝나는데, 베토벤의 5번 교향곡은 c단조의 팽팽한 긴장감으로 시작하여 활기차고 승리에 찬 C장조로 끝맺는다. 또한 베토벤은 마지막 악장에서 강렬함과 승리감을 표현하기 위해 오케스트라에 몇 가지 악기들을 첨가하였다.

인용문
시공간을 초월하는 거대 괴물
E.M 포스터의 소설 하워즈 엔드(Howard’s End)에서 5번 교향곡을 묘사한 표현

교향곡의 통일성은 두 가지 기법을 통해 강화된다. 마지막 두 악장은 분리되지 않고, 중간에 쉼 없이 연결된다. 베토벤은 실제로 3악장의 주제를 4악장에도 인용함으로써 이 두 악장을 더 긴밀하게 연결하였다.

이러한 모든 요소들(단조에서 장조로의 진행, 확대된 오케스트라, 악장 간의 연계, 이전 악장의 요소들을 마지막에 다시 사용하는 것)은 당시의 교향곡에서는 새로운 것이었고, 19세기를 통틀어 후대 작곡가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5번 교향곡에서 베토벤은 음악에 대한 전혀 새로운 시각의 장을 열었다. 음악은 더 이상 기술적으로 만든 것을 객관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관점의 표현이라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새로운 관점은 낭만주의의 근간이 되었다.

감상 가이드

루드비히 판 베토벤(Ludwig van Beethoven, 1770~1827년)
〈스위스 곡조에 의한 6개의 피아노 변주곡 F장조, WoO 64〉

작곡 연도 : 1790년
템포 : 안단테 콘 모토(매우 느리게, 그러나 움직임 있게)
박자 : 4분의3
조 : F장조

이 작품은 베토벤이 초기에 썼던 여러 변주곡 세트 중 하나이다. 특정 선율을 가지고 변주곡을 창작하는 것은 작곡가들에게 작곡 기술을 터득할 수 있는 쉬운 방법이었다. 선율과 화성이 이미 존재하니, 작곡가는 이를 장식하거나 다양화하는 방법만 생각하면 되기 때문이다.

베토벤이 이 작품에서 사용한 짧은 스위스 선율은 매우 단순하면서도 매력적이다. 단순성에 기초하면서 흥미진진한 기발함이 있는데, 이는 매우 이례적인 악구 길이에서 나온다. 베토벤이 애초에 이 선율에 끌린 것도 아마 이러한 특징 때문일 것이다. 보통의 4마디 악구 대신에 이 선율은 2, 3마디 악구와 5마디 악구의 응답으로 이루어져 있다.

선율과 화성의 뼈대라고 할 수 있는 이 악구의 구조는 6개 변주곡 모두에서 나타난다. 베토벤은 3분할과 행진곡 리듬, 셈여림의 변화, 8분음표, 16분음표 단위를 썼고, 음악을 장식하고 다양화하기 위해 단조 조성을 사용하기도 했다.

감상 가이드

루드비히 판 베토벤(Ludwig van Beethoven, 1770~1827년)
교향곡 5번 c단조

작곡 연도 : 1807~1808년
악기 편성 : 플루트 2, 오보에 2, 클라리넷 2, 호른 2, 트럼펫 2, 팀파니, 현악기 파트

1악장

템포 : 알레그로 콘 브리오(‘빠르고 힘차게’)
박자 : 4분의2
조 : c단조
형식 : 소나타 형식

베토벤의 5번 교향곡 1악장은 긴밀하고 집약적이다. 전 악장에서 불필요한 음이 하나도 없다. 제시부는 단-단-단-장 리듬 모티브으로 시작되며, 이 모티브는 거의 모든 마디를 장식한다.

두 번째 주제는 호른이 알린다. 주제 자체는 조용하고 부드럽게 시작하는데, 첼로와 베이스들이 뒷받침하면서 처음의 리듬 모티브가 들리도록 한다. 재빠르게 또 다른 클라이맥스가 이루어지고 제시부는 전체 오케스트라가 처음의 모티브를 함께 연주하며 마무리된다.

발전부에서는 호른이 불렀던 주제 선율이 점차 작은 요소들로 분해되어 마침내 하나의 화음만이 남아 현악기와 목관악기군 사이에서 조용힌 메아리친다. 그러고 나서 재현부가 첫 부분의 음악을 매우 강하게 반복한다. 짧은 코다는 힘찬 결말로 이끌어간다.

악장을 통틀어 긴 크레센도(피아니시모 pp에서부터 포르티시모 ff까지)와 조용한 부분(피아노, p)의 짧은 패시지들은 강렬함과 추진력을 부여한다. 전반적인 효과는 강력한 힘과 압축이라고 할 수 있다.

2악장

템포 : 안단테 콘 모토(느리지만 활기 있게)
박자 : 8분의3
조 : A♭장조
형식 : 변형된 주제와 변주 형식

2악장은 1악장과 대조적으로 서정적이고 평온하다. 그러나 매우 힘차고 웅장한 패시지들도 있다. 이 악장은 주제와 변주와 같은 성격을 지니지만, 일반적인 경우는 아니다.주제가 2개이기 때문이다. 첫 번째 주제는 매우 부드럽고 노래하는 듯하며, 곡의 시작에 등장한다. 베이스의 피치카토(뜯는 주법) 반주 위에서 낮은 현악기, 비올라와 첼로가 주제 선율을 연주한다.

두 번째 주제는 클라리넷과 바순이 부드럽게 제시한다. 그러나 곧바로 열정적인 팡파르로 변화한다. 그리고 분위기, 악기 편성, 구조의 변화를 준 몇 개의 변주들이 나온다. 악장의 중심부와 코다가 모두 두 가지 주제에 기반하고 있다.

코다는 파격적인 셈여림의 대조를 보여주며, 짧고 강렬한 종지로 이끄는 거대한 크레센도로 끝맺는다.

3악장

템포 : 알레그로(빠르게)
박자 : 4분의3
조 : C장조
형식 : 경과구가 있는 스케르초와 트리오

3악장은 매우 주목할 만하다. 스케르초와 트리오 형식으로 되어 있다. 구조적으로 미뉴에트와 트리오 형식과 동일하나, 스케르초가 미뉴에트보다 더 빠르고 생동감 있다. 이 악장의 경우, 전통적 구조의 놀라운 변형들도 나타난다. 악장의 시작은 머뭇거리다가, 갑작스럽게 호른이 크게 울리며 반복되는 음형을 연주하고, 이어서 전체 오케스트라가 이어받는다.

특징적인 사운드가 친숙하다. 이는 첫 악장의 특징들을 조합해놓은 것임을 알아차릴 수 있다. 즉, 단-단-단-장의 모티브와 제시부 중간에 나온 호른의 소환 모티브가 그것이다. 트리오 부분에서는 낮고 종종걸음 치는 듯한 패시지가 등장한다. 처음에 첼로와 베이스에서 시작하여 다른 악기들이 모방적인 방식으로 이어받는다. 이 부분은 자유로운 푸가와 같은 특징을 보인다.

스케르초로 돌아갈 때, 가장 놀라운 부분이 등장한다. 스케르초의 음악을 반복하는 대신, 베토벤은 분위기를 전혀 다르게 변화시켰다. 음악은 현을 뜯는 소리와 부드러운 목관으로 매우 조용하게 연주된다. 전체적으로 신비스럽고 고요한 느낌을 만들어내며 약간 음산하기까지 하다.

또한, 스케르초로 돌아와서 악장을 끝내지 않고, 베토벤은 경과적인 악구를 첨가하여 신비롭고 주저하는 듯하고 의문스러운 분위기를 유지했다. 점차로 주저하던 요소들은 활력을 얻고 점점 더 커지면서 거대한 클라이맥스를 만들고 바로 4악장으로 이어진다.

4악장

템포 : 알레그로(빠르게)
박자 : 4분의4
조 : C장조
형식 : 소나타 형식

4악장은 교향곡 전체를 마무리하는 승리의 대단원이다. 밝고 힘찬 C장조로 되어 있다. 베토벤은 4악장을 위해 오케스트라에 강렬한 음색의 트롬본, 깊고 풍부한 콘트라바순, 높이 나는 듯한 피콜로를 첨가했다. 전반적인 분위기는 승리, 영광, 환희이다.

이 악장은 소나타 형식으로 되어 있다. 제시부는 분명한 주제 선율로 가득하다. 모두 합하면 네 가지(각각의 조성에서 두 가지씩)이다. 각각의 주제는 밝고 희망적이다.

발전부는 이들 주제 중에서 주제 3에 집중되어 있다. 오케스트라의 다른 악기들이 서로 이 주제의 조각들을 주고받는다. 그중에서 두드러지는 조각이 전체 교향곡의 오프닝 모티브인 단-단-단-장 모티브와 매우 닮았음을 알 수 있다.

발전부가 거대한 클라이맥스로 나아가는 도중에 베토벤은 갑작스럽게 또 한번 놀라움을 선사한다. 발전부의 마지막과 재현부의 시작 부분에서 베토벤은 스케르초의 음악을 떠올리는 짧은 회상을 배치시킨다. 이 역시 상당히 이례적인 경우이다. 베토벤이 그의 승리의 순간 속에서 과거를 회상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주저함과 의심은 거침없는 오케스트라에 의해 쓸려 내려간다.

이 악장은 베토벤이 썼던 것 중 가장 긴 코다 중 하나로 끝맺는다. 매우 강렬하고 단호하다. 종종 음악이 끝난 듯한 느낌을 주지만, 다시 빨라지고 종지는 계속 유예된다. 마치 베토벤이 승리감을 주체할 수 없어 계속 강조하느라 멈추지 못하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베토벤의 후기 음악

베토벤의 후기 음악은 연주자와 감상자 모두에게 커다란 도전을 요한다. 확실히 음악이 기술적으로 연주하기 어려울뿐더러, 최대의 도전은 곡을 이해하는 것이다. 연주자가 연주하기 위해서는 작품을 이해해야 하며, 감상자도 그 깊이를 받아들이기 위해 집중해야 한다.

베토벤의 후기 작품들은 매우 다양하지만, 몇 가지 특징들을 공유하고 있다. 그것은 내적인 깊이와 외적인 단순성의 조합, 다수 악장 구성으로의 새로운 접근, 노래 형식이나 주제와 변주 형식과 같은 젊은 시절 기법으로의 회귀이다.

이 시기의 작품으로는 피아노 소나타와 심오한 현악 4중주들, 마지막 악장(‘환희의 송가’)이 전 세계적으로 평화와 화해의 상징으로 불려지는 9번 교향곡 등이 있다.

베토벤의 오케스트라

베토벤은 고전주의 시대에 성장하였고, 따라서 그가 사용한 오케스트라는 하이든과 모차르트로부터 이어받은 것이다. 즉, 현악기 부분은 바이올린, 비올라, 첼로, 베이스로 구성되며, 관악기는 플루트, 오보에, 클라리넷, 바순, 호른으로 구성된다. 때때로 트럼펫과 드럼이 포함되기도 한다. 베토벤은 생애 동안 그가 형식과 개인적 표현의 범위를 확장시킨 것과 같이 오케스트라도 확대시켰다. 5번 교향곡의 마지막 악장에서 베토벤은 피콜로, 콘트라바순, 3대의 트롬본을 추가하였다. 피콜로와 트롬본은 6번 교향곡에서도 나온다. 베토벤의 마지막 해에 작곡된 9번 교향곡에서는 일반적인 현악기와 관악기군의 조합에 피콜로, 콘트라바순, 추가된 2대의 호른, 3대의 트롬본, 트라이앵글, 심벌즈, 베이스 드럼이 요구된다. 베토벤 이후에 오케스트라는, 그가 손댄 모든 것에서와 마찬가지로, 더 광범위한 표현의 영역을 아우르기 위해 확장되었다.

베토벤의 음악 특징

세계적으로 베토벤의 음악은 셰익스피어의 문학 작품, 그리고 렘브란트 혹은 피카소의 회화처럼 서양 예술적 성취의 정점을 상징하는 것이 되었다. 베토벤은 세계 문화사에 거인으로 우뚝 서 있다.

음악적 힘과 스스로의 인생 역경을 이겨낸 감동은 베토벤의 작품에 더욱 강한 인상을 심어준다. 베토벤은 그의 작품에 전적으로 헌신했고, 이를 성스러운 것으로 여겼다. 그의 이러한 생각은 음악과 음악에 대한 사회적 태도에도 변화를 가져왔고, 이는 향후 200년간 지속되었다.

베토벤은 고전주의 형식, 장르, 관습을 이어받았다. 고전주의 작곡가들이 그랬던 것처럼 교향곡, 피아노 협주곡, 실내악, 피아노 소나타와 그 외 여러 유형의 음악들을 작곡했다. 그는 더 나아가 이러한 형식들을 더욱 광범위하고 강렬하며, 개인적인 감성을 풍부하게 표현하는 영역으로 확장하였다. 그의 교향곡들은 고전 양식의 작품보다 훨씬 길고 많은 악기들을 사용한다. 9번 교향곡의 마지막 악장에서 베토벤은 4명의 독창자와 합창단을 추가하였다.

음향이 큰 음악에서 베토벤은 그의 선배들에 비해 더욱 강렬하며, 부드러운 음악에서는 더욱 깊은 감성에까지 다다르는 것 같다.

베토벤 음악의 특별한 점에는 끈질기게 몰아가는 리듬, 탄탄하고 남성적인 주제, 긴 크레센도와 강렬한 클라이맥스도 포함된다. 한편, 그의 음악은 매우 아름답고 서정적인 특징도 지니고 있다. 이례적으로 가볍고 섬세한 패시지들이나 부드러움, 전례 없는 영적인 깊이를 보여주기도 한다.

그는 오케스트라를 크기(트롬본), 고음(피콜로), 저음(콘트라바순)의 측면에서 확장하였다. 1악장의 소나타 형식을 위트와 미학적 아름다움의 표현에서 서사구조와 드라마의 표현으로 바꾸었다. 느린 악장들은 인간 정서의 깊이를 헤아린다. 3악장 스케르초는 복잡한 리듬적 유희와 매서움이 있는 유머를 아우른다. 피날레는 찬란함과 승리의 기쁨, 영적 초월의 분위기를 보여준다. 베토벤은 주제와 변주 형식을 좋아해서 작곡 초기부터 말년의 작품들에까지 이 형식을 사용했다.

베토벤은 음악에 있어 ‘개인적’인 아이디어들을 고안했고, 고전 작곡가가 가지고 있는 아이디어가 무엇이며 그들의 음악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관해 이해하기 위한 기본 토대를 제공했다.

베토벤 음악 요점 정리

ㆍ강렬함/힘과 정서적 깊이/부드러움/서정성의 균형
ㆍ길어진 악장
ㆍ확장된 오케스트라 (콘트라바순, 트롬본, 피콜로)
ㆍ개인적 감정의 표현
ㆍ소나타 형식을 통해 표현된 드라마
ㆍ전례 없는 영적인 깊이의 달성
ㆍ모든 성악과 기악 장르를 섭렵
ㆍ낭만주의로의 길을 열다.

참고문헌

  • ・ Library of Congress Prints and Photographs Division [LC-USZ62-29499]
  • ・ Handwritten Score, ymphony No. 6 (astoral by Beethoven). Copyright 2000 by Verlag Beethoven-Haus Bonn.
  • ・ INTERFOTO/Alamy
  • ・ Erich Lessing/Art Resource, N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