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 위임 통치 청원

이승만 위임 통치 청원

요약 1919년 이승만(李承晩)을 필두로 제기된 독립 방안으로, 한국은 자립 능력이 부족한 상황이므로 국제연맹에 일정 기간 한국의 위임 통치를 청원하여 실력을 양성하자는 내용이다.

1919년 이승만은 미국 하와이에 거주하면서 미국에 살고 있던 한국인들과 독립 운동을 전개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이 종결되고 전후 처리 문제를 논의하는 파리 강화 회의가 1919년 1월 18일에 개최되었다. 당시 미국의 대통령이었던 우드로 윌슨(Thomas Woodrow Wilson)은 이 회의에서 민족자결주의(民族自決主義)를 제기하였다. 각 민족은 정치적 운명을 스스로 결정할 권리가 있으며, 다른 민족의 간섭을 받을 수 없다는 내용으로, 한국은 물론 각국 독립운동가들은 민족자결주의에 관심을 집중하였다.

이러한 국제 정세에 따라 이승만과 정한경(鄭翰景)은 1919년 2월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에 위임 통치의 내용이 담긴 보고서를 발송하여 회답을 요청하였다. 당시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장은 안창호(安昌浩)였는데, 위임 통치에 관한 내용은 불가하다면서도 윌슨에게 우리의 사정을 이야기해보라는 내용의 회답을 발송하였다. 이에 이승만과 정한경은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의 명의로 작성한 위임 통치 청원서를 윌슨과 미국 신문사에 송부하였다. 그 내용을 요약하면 ① 열강은 한국을 일본의 학정에서 자유롭게 하며 ② 열강은 장차 한국의 독립을 보장하며 ③ 한국을 일정 기간 국제연맹의 통치에 둘 것의 세 가지로 정리된다. 이는 이승만이 지속적으로 취해 온 외교 노선을 통한 독립과 상통한다고 평가받는다.

이승만과 정한경이 제출한 위임 통치 청원이 한국에 알려지자 비판의 발언들이 이어졌다. 먼저 신채호(申采浩)는 ‘이승만은 나라를 되찾기도 전에 나라를 팔았다’며 성토하였다. 이승만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대통령에 선출되자 국무총리 이동휘(李東輝)가 위임 통치 청원에 대한 해명을 요청하였는데 이승만이 거부하였고, 이동휘는 국무총리에서 사임하면서 위임 통치 청원을 외교적 대실패라며 비판하였다. 이러한 비판에 이승만은 위임 통치 청원이 독립운동을 선전하기 위한 수단이지 한국의 독립을 방해하려는 것은 아니었다고 주장하였고, 나아가 위임 통치 청원 논란은 자신의 반대 세력에 의한 공작이라는 답변을 하였다.

결국 위임 통치 청원은 받아들여지지 않았지만, 한국의 자력 독립을 인정하지 않고 열강에 국가의 통치를 위임했다는 점에서 비판적으로 평가받았다. 그러나 한편으로 위임 통치 청원이 1910년대 말 한국의 실정과 국제 정세를 고려한 현실적인 차선책이었다는 평가도 존재한다. 위임 통치 청원이 미국에 거주하던 한인 독립운동가들의 일정한 합의로 발의되었고, 김규식(金奎植) 역시 파리 강화 회의에 위임 통치의 내용이 담긴 문서를 제출하였다는 점에서 위임 통치라는 방안이 당시 독립운동가 사이에서 공유되던 논의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아울러 위임 통치 청원은 대한민국임시정부 내의 노선 및 세력 갈등에 따라 문제가 되었다는 주장도 더해졌다.

이처럼 위임 통치 청원은 민족의 독립을 외세의 손에 맡겼다는 평가와 청원 제출 당시의 국내외 정세를 고려한 방안이었다는 평가가 상존하고 있다. 비록 위임 통치 청원의 내용이 민족적 정서와는 부합하지 않는 면이 있지만, 당시 독립운동을 이끌던 인물들이 구상한 독립 방안의 하나였다는 점에서는 의의가 있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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