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리
정의 및 이칭
아니리는 판소리에서 창자가 장단 없이 말로 내용을 전개해 나가는 창 이외의 부분을 지칭하는 용어이다. 일부 기록에는 '말로' 또는 '안의리'라고 표기되어 있다. 정광수(丁珖秀, 1909-2003)가 자신의 판소리 사설집인 『전통문화오가사전집』에서 아니리를 '안의리(案意裏)'라고 적고, '속뜻을 알려준다'고 그 의미를 풀이한 바 있으나 통설은 아니다.
내용 및 특성
판소리는 이야기하듯 말로 내용을 전달하는 아니리와 장단에 맞춰 노래로 부르는 창, 소도구인 부채나 몸짓·표정 등으로 연기하는 발림의 세 요소로 구성되는 연희이다. 만약 세 요소 가운데 하나라도 빠지면 판소리는 판소리로서의 정체성을 잃게 된다. '판소리는 성음놀음'이라는 말이 공공연하게 쓰이는 데서도 알 수 있듯이, 판소리에서 아니리나 발림보다 창을 중시하는 경향이 있어온 것도 사실이다. 아니리광대라는 호칭에 단순히 아니리나 재담에 뛰어난 판소리 창자라는 의미 외에 아직 소리 실력이 부족하다는 폄하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창과 아니리의 교차로 이루어지는 판소리 텍스트에서 아니리가 차지하는 비중을 고려할 때, 아니리도 독립적인 연행 요소로서 중요하게 인식 및 평가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아니리를 언급한 비교적 이른 시기의 문헌은 신재효(申在孝, 1812-1884)의 〈광대가〉이다. 그는 여기서 "아니리 짜는 말이 아리따운 제비 말과 공교로운 앵무소리"라는 표현을 통해, 아니리란 제비가 우는 소리처럼 아름답고도, 앵무새가 남의 말을 흉내 내는 소리처럼 재치 있고 교묘해야 한다는 점을 밝혔다. 이는 아니리의 내적 요건에 대한 설명이라 할 수 있다. 박헌봉은 『창악대강』에서 "'아니리'라는 것은 판소리를 하는 창인(唱人)의 호흡을 되돌려 휴식의 편리를 주기 위한 것이다. 아무리 명창일지라도 그 힘차게 부르는 소리를 삼십 분만 계속한다면 매우 힘든 일이므로 한 시간을 쉬지 않고 창을 연이어 한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한 것"이라는 기술로, 아니리의 공연 외적 기능을 이야기했다. 이처럼 아니리가 판소리 창자에게 휴식을 제공하는 부분이라는 설명에는, 판소리를 창 중심의 연희로 파악하는 인식이 내포되어 있다.
아니리의 기능은 다음과 같다. 첫째, 판소리의 서사를 형성하고 유지시킨다. 창자는 아니리를 통해 앞서 부른 창의 내용을 요약·정리하고 사건을 전개시키는 한편, 뒤에 이어지는 창을 소개하고 이끌어낸다. 이로써 청중은 창의 내용을 더 수월하게 받아들이면서, 창이 주는 미적 감흥을 부담 없이 즐길 수 있게 된다. 아니리에 수반되는 부가적인 설명은 일부 비합리적이고 부조화한 서사를 보완하고 교정하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춘향가〉 가운데 "그때여 춘향이가 오리정으로 이별을 나갔다고 허되, 그럴 리가 있겠느냐. 내행차 배행 시의 육방 관속이 오리정에 가 늘어 있는듸, 체면 있는 춘향이가 서방 이별헌다 허고 오리정 삼로 네거리 길에 퍼버리고 앉어 울 리가 있겠느냐. 꼼짝달싹도 못허고 담 안에서 이별을 허는듸"나 〈흥보가〉 가운데 "이럴 지음에 흥보가 설사를 허는듸 궁둥이를 부비적 부비적 홱 틀어노니 누런 똥줄기가 무지개살같이 운봉 팔영재 넘어까지 어떻게 뻗쳐놨든지, 지내가는 행인들이 보고는 황룡 올라간다고 모다 늘어서서 절을 꾸벅꾸벅허든 것이였다. 이리했다고 하나 이는 잠시 웃자는 성악가의 재담이지 그랬을 리가 있으리요"와 같은 아니리를 통해 이러한 역할을 살펴볼 수 있다. 또한 아니리는 작중 현실과 소리판, 작중 인물과 창자·청중 사이에 일정한 거리를 형성함으로써, 소리판의 지나친 감상화를 방지하고, 서사적 객관성을 확보한다.
둘째, 아니리는 열린 '판'을 형성해 무대와 청중 사이의 의사소통을 보조한다. 창에 비해 즉흥성이 강한 아니리에서는 대화의 교체나 순간적인 관점의 전환이 용이하다. 창자는 아니리를 변화시켜 다양한 목소리의 공존 및 새로운 목소리의 개입이 가능한 열린 '판'을 형성하고, 작중 현실과 소리판을 자유롭게 넘나든다. 청중과의 유대감을 형성하고, 정서적인 교감을 이끌어내며, 소리판의 분위기를 조절하기도 한다. 때로는 소리 내력이나 더늠의 출처 등 판소리와 관련된 정보를 제공하고, 아니리에 시대적 문제를 녹여낸 풍자를 통해 현실 참여를 도모하기도 한다.
셋째, 아니리는 언어유희를 통해 골계와 풍자를 실현한다. 아니리에서 활용되는 언어유희는 청중들의 새로운 관심과 흥미를 끌고, 웃음과 지적 호기심을 창출한다. 이는 골계로 자연스럽게 이어지며, 여기에 비판적인 목소리가 더해지면 풍자가 된다.
넷째, 아니리는 창 부분에서 고조된 청중들의 긴장을 풀어준다. 창 부분에서 고조된 청중들의 극적 환상을 가라앉히면서 긴장을 풀어주고, 다음 단계의 긴장을 예비하도록 하는 것이 아니리의 역할이다. 이로부터 창과 아니리의 구도를 긴장과 이완, 비장과 골계의 구도로 볼 수도 있다.
창과 아니리의 관계는 각각 운문과 산문, 열거와 평서, 묘사와 서술, 언어미와 정보전달 등의 구도로 파악할 수 있다. 이처럼 아니리는 판소리에서 창과 변별되는 독자적인 영역을 유지하면서 중요한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 따라서 소리와 함께 창자의 중요한 예술적 표현 수단으로 인정받아야 마땅하다. 뿐만 아니라 시대 변화에 발맞춘 판소리의 지속적인 발전, 새로운 현대화 작업을 위해서는 창에 비해 변이와 교체, 선택이 용이한 아니리에도 많은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
참고문헌
- 김대행, 「수궁가의 구조적 특성」, 『수궁가 연구』, 민속원, 2001.
- 김흥규, 「판소리의 서사적 구조」, 『창작과 비평』 10-1, 창작과 비평사, 1975.
- 박헌봉, 『창악대강』, 국악예술학교 출판부, 1966.
- 이상원, 「판소리의 敍事 形態와 그 機能 : 唱·아니리의 特性」, 고려대학교 석사학위논문, 19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