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
병사들의 발자국 소리들
우리 속담에 “빈 수레가 더 요란하다”는 말이 있다. ‘요란하다’는 말은 시끄럽고 어지럽다는 말이다. 이는 빈 수레가 더 덜컹덜컹 시끄럽게 소리를 내는 것을 말한다. 셰익스피어의 『헨리 5세』에도 “빈 그릇이 큰 소리를 낸다(The empty vessel makes the greatest sound.)”는 말이 있다. 그릇이고 머리고, 속이 비어 있을 때 문제다.
우리말의 ‘소리’는 음파(音波), 성음(聲音), 말 · 이야기, 소문 등의 의미를 지니는가 하면, 판소리 · 잡가 · 민요 등의 창(唱)을 의미한다. 소리가 ‘노래’ 아닌, ‘판소리 · 잡가 · 민요 등의 창’을 의미하는 것은 우리말의 한 특징으로, 이는 우리 문화를 반영하는 것이다. 영어의 경우는 사물의 진동음과 음성을 sound와 voice로, 일본어의 경우는 おと(音)와 こえ(聲)로 구별한다.
음파(音波)를 나타내는 대표적인 소리에는 ‘문소리, 발소리, 쇳소리, 신소리, 천둥소리’ 따위가 있다. 이들은 성대(聲帶)를 통해 나오는 소리가 아니라, 사물의 진동에 의한 소리다. ‘발소리’는 발의 소리이기보다 발걸음 소리다. 그런데 이 ‘발소리’를 ‘발자국소리’라고도 한다. 그러나 이는 잘못된 말이다. ‘발자국’은 밟은 발의 자국, 족적(足跡)으로 소리가 나지 않기 때문이다. 국정교과서에까지 실렸던 시, 「어머니의 기도」에도 이 말이 쓰이고 있다.
바람이 성서를 날릴 때
그리로 들리는 병사의 발자국소리들!
아들은 어느 산맥을 지금 넘나 보다.
성대(聲帶)를 통해 나오는 소리에는 사람의 말소리와 동물의 짖어대는 소리가 있다. 우리말에는 이러한 동물의 소리를 나타내는 말이 매우 발달되었다. ‘개굴개굴, 맴맴, 멍멍, 음매’ 같은 의성어가 그것이다. 사람의 말소리, 곧 성음(聲音)은 자음과 모음으로 나눌 수 있는 분절음(分節音)이다.
이러한 성음을 나타내는 말에는 ‘개소리, 끽소리, 놀소리, 새소리, 숨비 소리, 큰소리, 익은소리(俗音), 죽는소리, 짹소리, 외마디소리, 혀짜래기소리’ 같은 것이 있다. ‘끽소리, 깩소리, 찍소리, 짹소리’는 아주 작게나마 남에게 들리게 내는 소리다. 흔히 작게나마 반항하는 소리를 나타낸다. ‘놀소리’는 참으로 좋은 말인데, 사람들이 잘 모르고 있다. 이는 젖먹이가 누워서 놀면서 입으로 내는 군소리다. 놀면서 흥얼거리는 소리다.
‘숨비 소리’는 해녀가 바다 위에 떠오르며 참고 있던 숨을 내쉬는 휘파람 같은 소리다. ‘죽는소리’는 고통이나 곤란에 대하여 엄살을 부리는 말이다. ‘혀짜래기소리’는 ‘혀짤배기소리’가 변한말로, ‘혀(舌)-짧(短)-애기(접사)’가 ‘혀짤배기>혀짜래기’로 변한 말이다. 이는 혀가 짧아 ‘ㄹ’ 받침소리를 제대로 내지 못하는 것을 말한다. 이런 사람은 혀짜래기, 또는 혀짤배기라 한다.
‘소리’는 말, 이야기도 나타낸다. 이러한 말은 꽤 많다. ‘갖은소리, 군소리, 다리아랫소리, 동떨어진소리, 딴소리, 뭇소리, 별소리, 볼멘소리, 봉돗소리, 산소리, 선소리, 신소리, 웃음엣소리, 입찬소리, 잔소리, 제소리, 헛소리, 허튼소리, 흰소리, 벽제소리’가 이런 것이다. 이 가운데 ‘다리아랫소리, 동떨어진소리’는 색다른 말이다.
‘다리아랫소리’는 한자말로 각하성(脚下聲)이라 하는 것이다. 이는 비굴한 소리다. 머리를 다리 아래까지 숙여 내는 소리라는 뜻으로, 남에게 굽실거리거나, 애걸하면서 하는 말이다. 옛날 굶주린 하인이 상전에게 다소간에 식량이라도 얻어먹으려고 애걸복걸하던 자세가 이러했을 것이다. ‘동떨어진소리’는 경어(敬語)도 반말도 아니게 어리벙벙하게 하는 말씨다. 때로는 이런 경우가 있다. 존댓말을 하자니 그렇고, 반말을 하자니 너무 야박하고, 이런 경우에 ‘동떨어진소리’를 할 수밖에 없다. ‘벽제소리’와 ‘봉둣소리’는 벽제(辟除)나 봉도(奉導)할 때 내는 소리다.
‘벽제’는 높은 사람이 행차할 때 별배(別陪)가 행인의 통행을 금하여 길을 치우던 일이다. 이때 “쉬 물렀거라”라고 외쳤다. 봉도란 어가(御駕)를 편안히 모시도록 하기 위하여 별감들이 소리를 지르던 일이다. 봉도별감이 연(輦)이나 옥교(玉轎)의 머리채를 잡고 나아가면서, 또는 가교(駕轎)나 마상에 계실 때는 옆에 따르면서 먼저 목청을 높였다 낮추었다 하며 길고 느리게 부르면 다른 별감들이 따라 불렀다.
‘산소리’는 어려운 가운데서도 기가 살아서 남에게 굽죄지 않으려고 큰소리를 치는 것이다. ‘선소리’는 경위에 닿지 않는 소리로, 상대방의 말을 다른 말로 슬쩍 농쳐서 받아넘기는 말이다. 가령 ‘배가 부르다’는 말에 ‘몇 달이나 됐는데’라고 받아넘기는 투의 말이다. ‘입찬소리’는 장담하는 말로, “입찬말은 묘 앞에 가서 하여라”라는 속담의 ‘입찬말’이다. 장담은 함부로 하는 것이 아니다. ‘흰소리’는 터무니없이 자랑으로 떠벌리는 말이다.
이야기를 뜻하는 소리로는 ‘잡소리, 객소리’가 있다. ‘잡소리’는 잡말, 잡설 외에 잡가(雜歌)까지 의미한다. ‘객소리’는 객설(客說)로, 쓸데없이 객쩍은 말을 하는 것이다.
판소리나 잡가, 민요 등의 창을 나타내는 말로는 ‘뱃소리, 상엿소리, 선소리, 앉은소리, 짓소리, 판소리, 홑소리’ 같은 말이 있다. ‘뱃소리’는 배를 저으며 부르는 소리고, 선소리는 입창(立唱), 앉은소리는 좌창(坐唱)이다. ‘짓소리’는 부처에게 재를 올릴 때 불법 · 게송(偈頌)을 매우 길게 읊는, 작위(作爲)가 복잡한 소리다. 이는 대개 합창으로 불린다. ‘홑소리’는 범패(梵唄)에서 단성(單聲)으로 독창하는 소리다.
이밖에 ‘소리굿, 소리북, 소리판, 소리풀이’같은 말이 있고, 광대를 이르는 ‘소리광대, 소리꾼, 소리쟁이’가 있다. ‘소리굿’은 농악판굿에서 가락을 치면서 앞소리와 뒷소리를 함께하는 소리고, ‘소리북’은 판소리 반주에 쓰는 북이다. ‘소리판’은 소리와 노래를 부르며 즐겁게 노는 판이고, ‘소리풀이’는 명창이 소리를 마치고, 역대 명창을 하나하나 호명한 다음, 다시 자기의 독특한 소리로 한바탕 창을 하는 것이다. 이 밖에 ‘왼소리’는 사람이 죽었다는 소문을, ‘소리 소식’은 소식을 뜻한다 할 것이다. 본래 진동음을 나타내는 ‘소리’가 우리말에서는 이렇게 다양한 뜻으로 쓰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