돼지
돼지 멱따는 소리
“배부른 돼지보다는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낫다.”
영국의 철학자 밀(J.S. Mill, 1806-1873)의 말처럼 동물적 풍요를 즐기기보다는 비록 궁색하더라도 생각하는 인간으로 남아 있고 싶다.
‘돼지’는 흔히 탐욕스러운 대식가(大食家)로 치부된다. 특히 기독교에서는 돼지를 모든 추악함의 상징(象徵), 곧 야비한 본능, 간음, 질투, 탐욕, 이기, 분노, 울분 등의 상징으로 표현한다. 이와 달리 고대 그리스와 로마인들은 돼지가 자연의 풍요와 비옥함을 상징한다고 여겨 신에게 바치는 제물로 썼다.
원래 그리스인들은 풍요의 여신(女神) 데메테르(Demeter)를 돼지의 모습으로 표현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여신을 돼지로 표현하는 것이 불경스럽다고 생각한 후세 사람들이 돼지를 여신에게 바치는 희생으로 삼았다. 또한 로마인들은 자신이 위험할 때만 상대를 공격하는 멧돼지를 용기와 자신감, 용감무쌍(勇敢無雙)함의 상징으로 여겨 군기(軍旗)에 돼지를 그려 넣기도 하였다.
우리의 고대 문헌이나 문학에서도 일반적으로 돼지는 풍년, 번창, 길조 등을 상징하였다. 불교에서는 불교도의 수호신으로, 도교(道敎)에서는 방위신(方位神)으로, 신화에서는 신의 사자(使者)로 상징되었다. 그러나 설화문학에서는 탐욕과 애욕의 화신이었다.
본래 ‘돼지’란 말은 ‘송아지, 망아지, 강아지’와 같이 돝(猪)의 새끼를 이른다. “멧돝 잡으려다 집돝 잃는다”는 속담에서처럼 ‘돝’이 돼지를 이르는 일반 명사였고, ‘도야지’나 ‘돼지’는 지소사(指小辭)가 붙은 새끼 돼지인데, ‘돝’이 사어(死語)가 되면서 ‘돼지’가 ‘돝’의 자리를 대신하게 되었다. 그리고 ‘도야지’는 방언이 됐다. 그리하여 가축 가운데에는 ‘돼지’만이 새끼를 나타내는 명칭이 없어져 ‘송아지, 망아지, 강아지’ 등에 대등한 말로 따로 ‘돼지새끼’란 말이 쓰이게 되었다.
‘돼지’나, ‘도야지’는 ‘돝’에 새끼나, 작은 것을 뜻하는 ‘아지’가 합성된 말이다. 곧 ‘돝-아지’가 ‘도야지’로 변하고, 이 말이 다시 ‘돼지’가 된 것이다. 한편 ‘돼지’를 영어로 표현할 때 우리는 흔히 Pig라고만 하는데, 미국에서는 젖을 떼지 않은 새끼를 Pig라 하고, 성장한 돼지는 Hog라 하여 구별한다. 그리고 성숙한 암퇘지는 Sow, 거세하지 않은 수퇘지는 Boar라 구별한다.
돼지가 긍정적, 부정적 상징으로 모두 쓰였듯이 ‘돼지’라는 말이 붙은 우리말들도 양극성(兩極性)을 지닌다. 우선 ‘돼지떡, 돼지우리’는 부정적 의미를 지닌다. ‘돼지떡’은 돼지 먹이가 아니다. 이는 돼지 먹이가 그렇듯이, 이것저것 무엇인지 모를 물건들이 범벅이 되어 지저분함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돼지우리’는 비유적으로 ‘더럽고 어수선한 곳’을 가리킨다. 하지만 ‘돼지꿈’은 긍정적 의미를 지닌다. 이는 꿈에 돼지를 보는 것으로, 돼지 꿈은 재물이 생긴다고 믿는다. 그래서 이런 꿈을 꾸면 사람들은 곧장 복권을 사러 달려간다. 그리고 사실인지 모르지만 복권이 당첨된 사람들은 보통 이 꿈을 꾸었다고 한다.
돼지는 멧돼지과의 포유동물이다. ‘멧돼지’는 돼지의 원종(原種)으로 산짐승으로서의 돼지다. ‘멧돼지’의 ‘메’는 산을 이르는 ‘뫼’가 변한 말이다. 돼지는 이 밖에 ‘양돼지’가 있다. 이는 서양종(西洋種)의 돼지를 이르는 말로, 요크셔 종, 버크셔 종 같은 것이 그것이다. 이들 돼지는 토종 돼지와는 달리 털이 희고, 살이 포동포동 쪘다. 그래서 살찐 사람을 비꼬아서 ‘양돼지’라 한다.
한편 우리 속담에 “검정개는 돼지 편이다”라는 것이 있는데, 사람은 서로 비슷한 사람끼리 친하게 어울린다는 것을 비유적으로 나타내는 말이다. 이는 본래 토종 돼지가 검기 때문에 나온 속담이다. 그런데 같은 뜻의 속담인 “가재는 게 편이다”와 달리, 이 속담의 뜻을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간 세월이 변해, 흑돼지를 보기도 어려워졌을 뿐 아니라, 토종 돼지가 흑돼지란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많아졌기 때문이다.
돼지는 “돼지 멱따는 소리”란 관용어가 돼지의 한 특성을 제시한다. 이 관용어는 ‘아주 듣기 싫도록 꽥꽥 시끄럽게 지르는 소리’를 뜻한다. 지난날 돼지를 잡을 때 묶어 놓고 멱을 땄다. 목을 칼로 찔러 구멍을 내고, 그리 피가 빠져나와 마침내 죽게 하였다. 생돼지는 목으로 피를 콸콸 뿜어내며, 요동을 치고 꽥꽥 죽는 소리를 내었다. 여기서 ‘돼지 멱따는 소리’란 관용어가 생겨난 것이다.
이러한 돼지 잡는 방법은 우리만의 것이 아니었던 것 같다. 서양에서도 이렇게 잡은 것 같다. 일본의 근대화(近代化) 과정 초기에 규슈(九州) 나가사키(長崎)의 데지마(出島)에 홀란드 상인을 집거(集居)시켰다. 지금은 그 자리에 저들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게 축소 모형을 만들어 놓았는데, 그 건물 한쪽 벽에 우리의 돼지 잡는 모습과 같은 벽화가 그려져 있다. 이로 보면 돼지를 잡는 문화가 동서양(東西洋)이 비슷했던 모양이다.
돼지는 이렇게 잡는 경우가 아니더라도 꽤나 시끄럽게 꿀꿀거린다. 그래서 우리는 ‘돼지’를 ‘꿀돼지(꿀꿀이)’라 한다. 영어 속담 “돼지에게 꿀꿀거리는 소리 외에 무엇을 기대하겠는가?(What can you expect from a pig but grunt?)”라 하는 것도 돼지의 이러한 속성을 드러내고 있는 것임에 다름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