협율사

협율사

[ 協律社 ]

요약 1902년(광무 6)에 설립된 황실극장(皇室劇場). 일명 협율회사(協律會社).

1902년 고종황제의 어극(御極) 40주년 칭경예식(稱慶禮式)을 위해 궁내부 직할로 설립된 협율사는 연습장소인 (戲臺)를 (奉常寺) 안에 두었다. 당시 한성부(漢城府)의 선가선무(善歌善舞)하는 여령(女伶)을 뽑아서 가무를 연습시켰다. 그때 책임자는 참령(參領) 장봉환(張鳳煥)이었다.

1902년 가을로 예정했던 예식은 콜레라의 유행으로 1903년 봄으로 연기됐으나, 또 다시 영친왕(英親王)의 우두병(牛痘病) 때문에 가을로 연기했다. 그 당시 국제정세가 악화됨으로 인하여 1903년 가을 겨우 예식의 명색만을 갖추고 끝났다. 그 후 협율사는 영업하는 극장으로 바뀌었다. 일반 시민을 상대로 영업하는 희대라는 무대에서 상업적인 공연활동을 지속하였다.

이때 김창환(金昌煥)을 비롯하여 ·염덕준· 같은 판소리명창 및 ··를 포함한 경서도명창이 협율사 공연의 주역들이었다. 협율사의 공연종목은 주로 (女妓)의 춤, (倡優)의 잡가와 소리, 창부(唱夫)인 광대의 판소로 구성됐다. 이렇듯 협율사가 본래의 설립취지와 다르게 일반 시민을 상대로 영업하는 사교장 겸 유흥장으로 변해갔기 때문에, 이필화(李苾和)의 상소로 인하여 는 1906년(광무 10) 4월 완전히 폐쇄됐다.

협률사 소속 관기(『음악, 삶의 역사와 만나다』)

협률사 소속 관기(『음악, 삶의 역사와 만나다』)

1906년 4월까지 존속된 협율사 소속의 판소리명창과 잡가 명창 및 기생들은 1908년 설립된 (圓覺社)에서 공연활동을 지속하다가 1909년 원각사의 폐지 이후 해산됐다. 원각사의 폐지 이후 은 송만갑협율사(宋萬甲協律社), 그리고 김창환은 김창환협율사(金昌煥協律社)라는 사설 유랑창극단을 조직하여 주로 지방에서 공연활동을 전개하였다.

김창환협율사는 강용환···· 등 50여 명으로 구성됐다. 한편 송만갑협율사는 ···유공렬· 등으로 구성됐다. 김창환협율사는 1910년 한일합방의 소식을 들은 후 경상도 남해(南海) 공연을 끝으로 해산됐다. 송만갑협율사도 같은 해 경남 통영(統營)에서 해산됐다.

1912년 전남 광주에서 지방 출신의 명창으로 구성된 광주협율사(光州協律社)가 설립됐다. 단원으로는 김채만의 문도(門徒)인 ···전일도· 등이었다. 이들은 1920년대까지 8년 동안 지방에서 창극활동을 전개하다가 해산하였다.

참고문헌

  • 『한국음악용어론』 송방송, 권6.2441~42쪽
  • 『증보한국음악통사』 송방송, 서울: 민속원, 2007년, 527~59쪽
  • 『음악, 삶의 역사와 만나다』, 과천: 국사편찬위원회, 2011년, 216쪽

참조어

협률사(協律社) , 협율회사(協律會社), 광주협율사(光州協律社), 송만갑협율사(宋萬甲協律社)